[박종렬의 제왕학] 푸틴, 승리한다 해도 '이미지 전쟁'에서 참패

2023-02-15 17:58
(1) 21세기 '차르' 푸틴

[박종렬 논설고문]


“전쟁이 일어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역사에 남을 패배를 당하게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푸틴은 모든 전투에서 이겼을지는 몰라도 전쟁에서는 지고 있다.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그의 도박이 실패했음이 자명해지고 있다. 더 많은 우크라이나인의 피가 흐르면서 푸틴의 꿈은 망가지고 있다.”(영국 '가디언' 2022년 2월 .28일)

인류 문명사에 관한 ‘3부작’(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으로 유명한 이스라엘 역사학자이자 히브리대 교수인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우크라이나 침공 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해 “러시아 제국의 사망 진단서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이름이 적힐 것”이라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적’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할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의 주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활용해 러시아 멸망 작전을 진행하면서 러시아는 푸틴 체제의 붕괴 혹은 국가체제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다. 전쟁으로 이민, 출산율 저하, 전사자 등으로 인구가 25만명 감소한 데 이어 청년 수만 명의 전사로 매년 15만명의 인구 소멸로 이어진다는 블룸버그통신 보도(2022년 10월 18일)는 이를 입증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2022년 8월 1일 기준 러시아 인구는 연초보다 47만5500명 감소해 1억4510만명이다. 옛 소련이 붕괴한 1991년의 1억4830만명보다 320만명이나 줄었다.

21세기 ‘차르(황제)’로 불리며 1999년 12월 31일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해 23년째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 그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국영방송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전쟁’이란 표현 대신 ‘특별군사작전’을 전개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영토 점령 계획이 없다고 했지만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와 비나치화’ ‘젤린스키 정권 교체'를 추구하는 전면전임을 명확히 했다. 그는 무기력한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점령함으로써 러시아 안보를 위협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을 저지하고 ‘강한 러시아’를 넘어 ‘옛 소련의 영광 재현’을 위해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푸틴 대통령 2005년 의회 연두 교서)이라는 옛 소련 붕괴에 대한 복수극을 연출한 셈이다. 

2000년 대통령 취임 직후 ‘강한 러시아’ 건설을 정책 제1 목표로 삼았던 푸틴이 국방력 강화 등 20여 년간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통해 냉전 시대 미국과 맞섰던 강대국 옛 소련 복원이라는 더 강력한 국가 목표를 위해 우크라이나 침략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자신의 이데올로그이자 책사(策士)인 두긴의 파시즘적 비전인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를 이번 전쟁을 통해 실천에 옮긴 것이다. 세계 육지의 37%를 차지하는 유럽과 아시아를 합쳐 최대의 대륙이 패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유라시아주의’는 옛 소련 붕괴 후 미국과 중국의 패권에 맞서 재탄생한 ‘러시아 제국’을 꿈꾸는 새로운 파시즘이다. 푸틴은 2010년 카자흐스탄·벨라루스와 함께 출범한 ‘유라시아 관세 동맹’ 확대, 중앙아시아와 흑해 연안국을 포함한 단일 통화 경제권 확대를 꿈꾸는 ‘유라시아니즘’을 시현하고 있다. 

푸틴은 그동안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극동(極東) 캄차카 해상에서 고래에 작살을 꽂는가 하면 상의를 벗은 채 시베리아 호랑이 사냥에 나서 마취된 호랑이를 쓰다듬는 등 깜짝쇼도 펼쳤다. TU-160 전략폭격기를 탔고, 북해함대를 방문해 잠수함을 타고 훈련에 동참하는가 하면 2000년 대선 직전 전투기를 타고 체첸 내전 현장을 방문하는 등 ‘강력한 리더’로서 이미지를 연출했다. 러시아 국민은 국가위기 돌파를 위해 배짱 넘치는 리더십을 보이는 푸틴에 매료되었다. 2001년 독일 의회에서 KGB 요원으로 독일 드레스덴에서 6년여 근무하며 익힌 유창한 독일어로 연설해 기립박수를 받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러시아 국민은 감동했다. 유도 공인 7단인 푸틴은 틈날 때마다 도장을 찾아 업어치기 하는 모습은 국민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 브레즈네프, 체르넨코 등 노쇠한 공산당 지도자와 병약한 주정뱅이 이미지의 옐친 전 대통령과 비교하면 젊고 박력 넘치는 40대 젊은 지도자 푸틴은 러시아 국민을 열광시켰다. 푸틴은 벌이는 전쟁마다 이기는 ‘불패(不敗) 신화’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승리자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네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해온 그의 ‘영웅 신화’는 전쟁에서 비롯됐다. 그가 주도한 체첸(2000년) 점령과 조지아 침공(2008년), 크림반도 합병(2014년), 시리아 내전 개입(2015년) 등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은 항상 성공적이어서 러시아 국민을 열광시켰다. 

옐친 대통령은 연방 보안국 국장(한국 국정원장 격)이자 연방 안보위원회 서기에 불과했던 푸틴을 파격적으로 신임 총리에 발탁했다. 이후 옐친이 푸틴을 후계자로 점지(點指)하고 1999년 12월 31일 조기 사임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푸틴 총리를 지명한다. 38세에 옛 소련 붕괴로 실업자가 됐던 KGB 스파이 출신 푸틴이 10년 만에 우여곡절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 푸틴은 무기력했던 옐친과 달리 체첸 반군 테러에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전쟁을 통해 군과 경찰을 완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2000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을 거머쥔다. 이후 장기 집권에 성공한 푸틴은 김대중부터 문재인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5명을 다 만날 정도로 23년째 집권을 이어오고 있다.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한 장기 집권을 위해 푸틴은 자신을 ‘러시아판(版) 루스벨트’로 포지셔닝했다. 미국 경제를 일으키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자 전무후무한 ‘4선(選) 대통령’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평가받는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를 롤 모델로 삼은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뉴딜(New Deal)’ 정책을 통해 실업자가 수천만 명이던 미국 경제를 부흥시켰다. 그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眞珠灣) 공격을 계기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당시 유럽의 변방이자 신생국 미국이 세계적인 군사적 강대국 반열에 오르는 길을 개척한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푸틴=루스벨트’ 이미지 메이킹은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 크렘린(대통령궁) 행정실 부실장이 주도했다. 수르코프는 루스벨트 다큐멘터리를 러시아에서 방영해 그 이미지를 전이(轉移)시키는 방식으로 푸틴을 러시아를 재생시킨 국부(國父) 이미지로 부각시켰다. 그는 4선에 도전한 푸틴의 장기 집권에 대한 반감을 희석해 정당화하고 정권에 비판적 언론인을 회유·제거하는 등 미디어 통제와 정치선전을 교묘하게 배합했다. 옐친이 망가뜨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영웅 푸틴’은 러시아를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지도자 이미지로 국내외에 각인되었다. 수르코프는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킹 메이커로 평가되는 칼 로브(Karl Rove)에 비견되는 ‘스핀 닥터(spin doctor·정치홍보전문가)'로 푸틴 정권의 이미지 메이킹에서부터 이데올로기, 인사권 행사까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해온 정치고문이자 책사(策士)로 활약했다. 

실제 푸틴은 옛 소련 해체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재생시킨 업적을 바탕으로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푸틴 체제를 비판만 하지 않는다면 러시아인들은 역사상 가장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푸틴 정권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거듭된 졸전으로 전황이 점점 불리해졌고 전쟁 발발 후 1년이 가까운 현재 나토 국가들과 서방 전체의 공적(公敵)이 되었다. 서방의 집단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의 공격에 대항하여 생존을 건 싸움을 벌여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48세에 집권해 70세를 넘기며 23년 동안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해 온 ‘푸틴 신화’가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다. 

푸틴은 ‘성공의 최대 적(敵)이 성공’이듯이 실패보다 무서운 ‘성공의 덫(success trap)’에 걸려 퇴로(退路)는 많은데 길을 잃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는 어떤 정책적 결단을 내릴 때 부정적 증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성향을 보인다. 반대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앞세우는 이른바 ‘지나친 확신(overconfidence)’으로 제왕적 리더십을 발휘한다. 과거 히틀러 등 독재자들처럼 자신의 의사 결정이 항상 옳다는 과장된 믿음은 ‘성공의 함정’이 되어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처절한 실패의 원인이 되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푸틴도 그동안 카리스마 넘치는 마초 행각을 통해 강력한 지도자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하면서 세계를 움직이는 국제적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국제적 왕따 신세로 전락했다. 오히려 나치독일 히틀러처럼 2차 세계대전의 학살자 이미지 혹은 과거 소비에트 공화국의 부활 또는 19세기 유럽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제정 러시아 시대로 회귀하는 국면이다. '대변 실금(失禁)' 현상이 노출됐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로 71세(1952년생)인 병들고 노쇠한 지도자로 이미지가 투영되면서 국내외에서 ‘포스트 푸틴’이 거론될 정도로 조락(凋落)한 신세가 됐다. 개전 초 “사흘 안에 우크라이나를 함락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푸틴을 조롱하는 메시지도 전 세계에 SNS를 통해 확산됐다. 역사상 최초로 시시각각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로 중계되는 침략 전쟁 실상을 통해 야만적 침략자로 비판받고 있다. 6000기에 달하는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임에도 약소국인 우크라이나의 게릴라전식 저항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막강하다던 러시아 국방력과 푸틴의 무능한 민낯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그동안 조롱의 대상이던 코미디언 출신인 ‘취약한 리더십’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영웅으로 평가되는 기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푸틴은 2023년 1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방공미사일 제조공장을 방문해 “러시아의 강력한 군산복합체가 생산을 확충해 이는 끝내 승전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는 확실하다"고 주장했다(CNN 보도). 러시아 ‘대공 미사일’ 생산량이 세계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과 같고 미국보다는 3배나 많다“며 승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전세가 교착 상태에 빠져 푸틴의 호언장담이 허장성세(虛張聲勢)로 평가절하되면서 초강대국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2023년 1월 20일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서방 여러 나라가 우크라이나에 탱크 등 화력 지원을 약속하자 러시아는 다시 핵 공격 가능성을 거론했다. 푸틴 최측근인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핵 보유국이 재래식 전쟁에서 패배하면 핵전쟁이 촉발될 수 있다”는 엄포를 놓았고 크렘린궁도 러시아의 핵 원칙과 부합하는 발언이라며 위협 수위를 높였다. 

이에 맞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캐나다의 탱크 200대 지원 약속 등에 힘을 얻어 2014년 러시아에 빼앗겼던 크림반도 수복 등 실지(失地) 회복을 통한 극적 반전을 노리고 있다. 서방의 지지를 얻은 우크라이나와 핵 카드까지 꺼낸 러시아의 강대강 대결로 ‘핵전쟁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퇴로 없는 확전’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약체로 보고 호기롭게 쳐들어갔지만 러시아의 고전(苦戰)은 역설적으로 러시아가 허술한 무기와 무력한 전투력으로 ‘종이호랑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21세기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되고자 했던 푸틴의 타오르던 야망이 서서히 스러지고 있다. 전쟁은 백번 싸워 비록 백번 다 이겼다 하더라도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방도 깨지지만 나도 깨지므로 실패다. 그래서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부전이승(不戰而勝)이 최고의 승리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 손자병법 제3편 모공(孫子兵法 第三篇 謀攻)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수십만 명의 인명 살상과 수백만 명의 피난민으로 전 세계의 공분과 국제적 비판을 사고, 러시아 국내에서도 수천 명의 반전(反戰) 데모대를 투옥하면서 이룩한 승리는 ‘잃은 것이 더 많을 것’이며 푸틴에게는 ‘이미지 전쟁’에서 철저히 패배했다는 평가가 따를 것이다. 어떤 선의(善意)의 명분 있는 전쟁이라도 천하에 ‘의(義)로운’ 전쟁은 없다고 하지 않은가?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