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다산(茶山) 정약용 생가에서

2022-12-27 12:00

[임병식 위원]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다산 정약용(1762~1836)에 흠뻑 빠져 지낸다. 책과 유튜브를 통해 만나는 다산은 매력적이다. 그는 위대한 학자이자 가슴 따뜻한 관료, 또 자애로운 남편과 아버지였다. 다산은 분노와 좌절을 딛고 저술을 통해 사회 개혁을 제시했다. 또 폐족 처지에 내몰린 자식들에게 때로는 질책하고 애걸하며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조선 후기를 빛낸 실학자이자 경세가를 통해 우리 정치를 돌아본다.

남양주 조안면 마재(馬峴)는 다산이 태어난 곳이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다. 올해 다산 생가에만 6~7차례 다녀왔다. 가까운 곳에 다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건 큰 위안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마재에서 만난다. 두물머리로도 불리는 이곳에서 한강은 바다처럼 넓다. 앞으로는 너른 강, 뒤로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재는 고요하다. 다산은 이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또 유배지에서 돌아와 생을 마감한 곳도 마재다. 촉망받던 다산은 높이 올랐다 한순간 추락한다. 남쪽 먼 강진 땅에서 18년 동안 죄인 신분으로 세월을 견뎠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을 되짚노라면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좌절과 절망을 딛고 500여 권 저서를 남긴 한 인간의 위대함에 경외를 보낼 수밖에 없다.

개혁군주 정조(1752~1800)는 다산을 끔찍이 아꼈다. 정조는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 왕은 권력을 쥔 노론에 맞서 남인을 통해 개혁을 도모했다. 개혁군주 정조와 신진 학자 다산은 뜻이 맞았다. 다산의 젊은 날은 찔레꽃처럼 향기로웠다. 노론은 다산과 남인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서학(천주교) 탄압 광풍이 불었다. 그들은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남인과 다산을 단죄했다. 급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은 다산을 지켜주지 못했다. 다산은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58살 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인 학자는 “개인에게는 불행했지만 조선에는 행운이었다”고 했다. 유배 시절 5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쓴 걸 두고 한 말이다. 중국 최고 역사서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도 삶은 불운했다. 그는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치욕을 딛고 역작을 남겼다. 다산과 사마천 모두 분노와 절망을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다산은 위선을 경계했다. 벼슬길에 오르기 전 스물셋 때 일이다. 1784년 그해 여름, 오랜 장마로 끼니가 끊겼다. 계집종은 옆집 호박을 훔쳐 죽을 끓여냈다. 아내는 계집종을 혼냈고, 뒤늦게 사정을 안 다산은 자신을 꾸짖었다. “만권 책을 읽은들 아내가 배부르랴, 두 이랑 밭만 있어도 계집종은 죄짓지 않아도 됐다.” 박무영 교수는 <뜬 세상의 아름다움>에서 “가장으로서 다산은 식솔들 굶주림을 외면하는 독서, 치국평천하를 외치는 포부가 얼마나 허상인지, 배고파 겨우 호박을 훔친 계집종을 윤리를 앞세워 꾸짖고 매질하는 게 가증스러운 위선임을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산은 생활인으로서 한계를 외면하지 않고 이웃으로 확산하는 ‘사람의 길’을 걸었다고 평했다. 정쟁에 매몰된 나머지 민생을 등한시하는 우리 정치가 돌아볼 대목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정작 현실은 외면하는 여의도 정치는 위선이다.

또 다산은 신분질서가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평등을 추구했다. 그는 “길 가는 사람을 고관대작 대하듯 하고, 천민 대하기를 큰 제사 받들 듯하라”고 했다. 또 “사람이 친구와 거문고, 비파, 책을 조심스럽게 대하기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소경과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 걸인, 비천한 자를 대하여서도 공경하는 빛을 잃지 않고 예의로 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고 했다. 다산은 신분질서에 얽매인 시선이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서 사회적 약자와 소통했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이들을 가볍게 여겼던 당시 사회에서 쉽지 않은 삶이다. 권위주의에 찌든 여의도 정치인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지, 다산의 가르침은 많은 것을 전한다.

다산은 말조심, 그리고 당파에 휩쓸리지 말라고도 했다. 다산은 “전체가 멀쩡해도 구멍 하나가 새면 그것은 깨진 항아리일 뿐이다. 온갖 말이 다 믿을 만해도 허튼소리가 한 마디 있으면 귀신소리일 뿐이다”고 했다. 가파른 여야 대치로 여의도 정치는 품격을 잃은 지 오래다. 욕설과 고함, 상대를 비난하는 날선 언어만 난무하고 있다. 또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5·18 유족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망언도 되풀이되고 있다. 무릇 국민을 생각한다면 허황된 말을 버리고 기품 있게 행동해야 한다. 다산은 파벌 짓지 말라고 했다. 자신 또한 당파 싸움 희생자이기에 더욱 간절했다. 여의도 정치는 파벌로 멍들었다. 같은 당원끼리도 편 가르고 건강한 비판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진영 정치에 매몰된 이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다산은 소소한 이익을 얻기 위한 어정쩡한 타협을 멀리했다. 유배 후기, 큰아들 학연은 조기 사면을 위해 유력자들에게 호소할 것을 권했다. 다산은 “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 또한 운명이다. 그들에게 꼬리를 흔들며 동정을 애걸하라는 건 그른 것을 추구하다 해를 입는 것과 같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겠느냐”고 반문한다. 조정은 유배 10년째 다산을 사면했다. 하지만 반대파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8년 동안 해배를 방해했다. 다산 또한 하루라도 빨리 가족을 만나고 싶었을 게 분명하다. 다산은 소신을 택했다. 작은 이익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정치인들이 다산의 고독한 결단을 헤아릴 수 있을까.

다산은 또한 전문적인 식견을 강조했다. 양계를 시작했다는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격(格)이라는 것은 끝까지 연구하여 도달한다는 뜻이다. 끝까지 연구하여 끝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산은 무슨 일이든 전문가 수준에 이르고 이익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익만 따진다면 못난 시골 사내의 양계법에 불과하다며 폭넓은 사유를 강조했다. 또 책을 그냥 읽기만 하면 하루에 천백번을 읽어도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했다.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해당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라는 부탁이다. 입법은 국회 고유권한이다. 정치인이라면 자신이 만든 법이 가져올 파장을 깊이 있게 살펴야 한다. 과잉 입법과 포퓰리즘을 의식한 선심성 입법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다. 다산은 “남들 모르게 하려면 안 하는 것이 최고고, 남들이 못 듣게 하려면 말하지 않는 게 최고다”고 했다. 또 “내가 쓴 편지가 큰길가에 떨어져 원수가 펼쳐보아도 아무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새해에는 따뜻하고 당당한 정치, 또 상대를 존중하는 정치를 기대한다. 삼가고 삼갈 일이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