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 칼럼] 신냉전 자초한 미국의 두가지 '전략적 오판'
2022-10-28 06:00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국제정세는 이미 신냉전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아야 하지만 러시아가 실패하면 더욱 가파른 속도로 신냉전 구도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 체면을 손상한 러시아는 이를 만회할 기회만을 노릴 것이고 이런 러시아가 연대할 유일한 나라는 중국이다. 따라서 향후 러시아는 중국의 보조적 협력국(Junior Partner)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패권경쟁을 이미 벌이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자국의 약점을 보완해 줄 러시아와 이러한 주·종적 연대관계를 내심 바랄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에 푸틴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중·러 양국은 무제한 협력협정(No Limit Pact)를 이미 체결한 바 있다. 이는 양국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무제한 협력하겠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에너지와 식량을 대량 수입하고 있다. 이렇게 수입한 물량을 중국은 제3국에 재판매하여 이득을 거두고 러시아가 겪을 제재의 고통을 완화해주고 있다. 이런 중국의 행보가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를 무력화하는 효과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취약한 중국의 경제안보 구조를 보강해준다는 점에서 더 전략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중·러의 유대강화는 신냉전 구도의 도래를 더 촉진할 뿐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신냉전 구도가 굳어지게 되면 한반도가 이 구도의 하부구도로 편입되어 소위 북·중·러 북방삼각연대와 한·미·일 남방삼각연대 간 대립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우리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이 불길한 신냉전 구도의 형성과정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신냉전 구도를 초래한 것은 서방언론에서 지목하듯 중·러로 지칭되는 현상변경 세력의 탓도 있지만, 다분히 미국이 전략적 오판을 하여 자처한 면이 많다는 점도 동시에 지적되어야 한다.
구소련과 동유럽이 몰락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던 1990년 당시 최근 작고한 소련의 고르바초프 총서기는 물론 그를 뒤이은 옐친 대통령까지 러시아는 서방 세력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원했다. 옐친 대통령 당시 러시아는 친서방 정책을 상당 기간 시행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서방의 경제협력과 자금지원을 통하여 자국의 경제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러한 러시아 초기 친서방정책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특히 미국은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중요한 행위자가 되기에 너무 쇠락한 이류국가라는 관점에서 러시아를 무시하였다. 이로 인해 경제발전이 좌절되자 러시아 국민들은 그 책임을 서방에 돌리고 자국의 자존심을 되찾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이런 국민의 여망을 등에 업고 푸틴이 등장하였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소련이 누렸던 지정학적 세력권을 회복하려 하였고 이러한 국가자존심 회복 비전을 내세워 장기 집권의 기반을 닦았다.
미국 내에도 키신저나 미어샤이머 같은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은 미국의 러시아 경시 정책이 미국의 장기적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지적하였다. 그들은 1972년 소련이 강성했을 때 미국이 중국과 연대라는 파격적 행보를 하며 소련을 고립시켰던 것처럼 점차 강성해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미 러시아와 손을 잡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워싱턴의 외교·안보 기성집단은 이러한 주장을 일축하고 자유주의적 팽창정책을 지속해나갔다. 냉전 종식 후 유일 강대국이 된 미국은 유럽에서 NATO 팽창을 지속하여 4차례의 신규 회원국 영입을 통하여 NATO를 계속 러시아 국경 쪽으로 확장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까지 NATO에 가입하였다면 러시아 코앞에까지 NATO가 확장될 것이고 러시아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미국은 잘못된 전략적 판단을 하였다. 미국은 78년 수교 이래 중국이 경제발전을 하게 되면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고 민주화가 된 중국은 미국의 최대시장이자 친미적인 국가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잘 가동될 때 미국에서는 미국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한 몸이 되어 서로 상생하는 관계, 즉 미국·중국 의존관계(Chimerica)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미국이 중국에 대해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된 배경에는 뉴욕 월가의 금융, 산업자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국가이익에 앞세웠다. 그들은 중국이 미국의 하청공장이자 주니어 파트너로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미국 내 퍼뜨렸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국의 눈을 가리는 동안 미국을 또 다른 잘못된 길로 인도한 그룹이 있었으니 이는 네오콘을 비롯한 미국 내 자유주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9·11을 빌미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하여 테러의 근거지가 박멸되고 더 나아가 이라크와 아프간에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미국이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진창에 빠져 20여 년을 허비하는 동안 미국 패권에 대한 최대 도전국인 중국의 급속한 성장을 방치하였다. 그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시아 회귀(Asia Pivot)’를 외치며 중국 견제에 나섰다. 그 무렵 중국은 이미 중국몽의 야심을 표방하는 시진핑 주석이 권력을 잡은 뒤였다. 이미 강대국의 반열에 진입한 중국은 더 이상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 패권 도전국이 되었다.
이제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이 이끄는 중국은 미국과 전략적 경쟁을 넘어 패권경쟁을 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런 중국은 우크라이나와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한 러시아가 중국을 도와 함께 강한 반미전선을 구축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러시아가 바라던 다극체제는 이제 물 건너갔으니 중국이 원하는 양극체제 형성에 러시아가 중국을 지원하는 보조 협력자 역할을 해주리라고 보는 것이다. 미국의 장기전략에 불리한 이런 신냉전 구도는 다른 국가가 아닌 미국이 연이은 전략적 오판으로 자초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전 장기화를 방치하는 것도 장차 미국의 전략적 오판으로 기록될 수 있다. 미국의 이런 전략적 오판은 미국 주도 국제질서를 오히려 위태롭게 하는 것은 물론 미국을 믿고 있는 동맹국들에도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미국이 비전을 추구하는 이상주의 말고 현실주의적 국가전략으로 복귀하여 신냉전 구도의 형성을 촉진하지 않기를 고대해본다. 비전이 없으면 국가 발전이 멈추지만 비전이 너무 크면 국가 안전이 위험해진다. 절제된 현실주의 외교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해 필요한 시점이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특임대사 △주호주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