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제왕학] '조선 식민지화' 설계자, 아베의 師表,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2022-08-21 16:48
제왕학으로 본 아베 시대 (1)
요시다 쇼인, 그는 근대화 사상가인가 국수주의적 몽상가인가
요시다 쇼인, 그는 근대화 사상가인가 국수주의적 몽상가인가
-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 <유수록(幽囚錄)>
조선·만주 정벌해 서양에 잃은 그것 벌충해야!
아베 신조(安倍晋三·1954.9.21.~2022.7.8) 전 일본 총리가 ‘정신적 지주’로 숭배했던 요시다 쇼인의 ‘조선 정벌론’이다. 아베는 총리 시절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할 때마다 사표(師表)로 삼은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19세기 일본 ‘메이지유신 심장’인 요시다 쇼인은 천황제 강화를 역설한 존왕(尊王) 사상가로 에도(江戶) 막부(幕府) 타도를 꾀한 죄로 29세 젊은 나이에 참수된다. 그가 감옥에서 집필한 <유수록>은 이후 등장한 ‘일본제국’의 국정철학이자 국가전략의 나침반이었다.
1872년 오키나와 왕국을 복속시켰고, 청·일 전쟁(1894~1895년)과 러·일 전쟁(1904~1905년)을 벌여 동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했다. 이후 대만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해 ‘근대 국가의 모델’로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이어 중국을 점령하고 동남아시아 제국까지 손을 뻗친 일본은 미국 지배를 받던 필리핀을 점령한 데 이어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요시다 쇼인이 설파한 ‘정한론(征韓論)’과 ‘다케시마(竹島·울릉도, 松島·독도, 쇼인은 같은 섬으로 간주) 개척론’은 제자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 등에 의해 계승·발전된다,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가 주창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과 이토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 등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 침략 정책의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쇼인이 일본제국 영토로 구상한 조선, 만주, 홋카이도, 캄차카,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에 걸쳐 그렸던 ‘큰 그림’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에서 ‘잠깐’ 완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1945년 패망하면서 청·일 전쟁 후 차지했던 모든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아베 전 총리의 정치 역정은 쇼인의 유훈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궤적과 한 치 오차 없이 일치한다. 아베는 평소 “나 자신, 쇼인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고방식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밝히곤 했다. 실제로 아베의 ‘2차 내각’은 ‘메이지 시대의 영광’을 되찾자며 과거 침략사를 부인하고, 쇼인 위패가 안장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 미화, 군대 보유와 전쟁을 금한 헌법 9조(일명 평화헌법) 개정 시도 등 ‘부국강병’을 모토로 삼았다. 메이지유신의 산파인 쇼인의 교시(敎示)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사나이 일생은 한 편의 시(詩)가 되어야 한다.”
“이 몸이야 비록 무사시(武蔵·도쿄 근처 너른 들판으로 전국시대 전장·戰場) 들판에서 썩어갈지라도,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만은 세상에 꼭 남기리라(身はたとひ 武蔵の野辺に 朽ちぬとも 留め置かまし 大和魂).”
쇼인이 처형 전야 제자들에게 남긴 ‘유혼록(留魂錄)'이라는 유언서 서두다. 총리에 취임한 아베가 교육 쇄신을 논하며 이 절명시(絶命詩)의 기개에 압도당한다면서 “내일은 제 고향이 낳은 위인,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참수당하시기 전날인 1859년 10월 26일, 선생은 밤새워 유서를 쓰셨습니다”라며 추모했다. 아베는 쇼인 고향인 야마구치현 쇼인 신사를 때때로 참배하며 쇼인 정신 계승을 공공연히 표방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사 정신을 일컫는 용어가 된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는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스러져간 젊은 황군(皇軍)들이 ‘돌격 앞으로’와 함께 외친 ‘죽음의 구호’로 등장했다.
‘꽃은 사쿠라, 사람은 사무라이’, 일본 에도시대부터 인기 있는 전통연극(歌舞伎)인 ‘츄신구라(忠臣蔵)’의 상징어다. 국민 서사시로 일본적 미학의 전형인 ‘츄신구라’는 1702년 막부 시절 아코번의 낭인 사무라이 47인이 암살당한 주군 원수 목을 베 주군 무덤에 바친 뒤 부하 전원이 주군 무덤 앞에서 모두 할복자살한 사건을 극화했다. 할복 부하 중에 10세 정도인 무사도 있었다. 사무라이를 벚꽃에 비유하는 일본에서는 할복을 순식간에 화려하게 피었다 한꺼번에 지는 벚꽃이 마치 사무라이가 지조(志操)를 지키기 위해 벚꽃처럼 아름답게 진다고 표현해왔다. 죽음을 불사하는 모습을 닮았다 해서 ‘죽음의 미학’으로 치부한다. 야스쿠니 신사의 조종(祖宗)인 요시다 쇼인 역시 사쿠라처럼 불꽃 같은 삶을 마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음을 앞둔 쇼인에게 수제자(首弟子)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가 “사나이가 죽어야 할 때는 언제냐”고 묻자 쇼인은 대의(大義)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라는 사생관(死生觀)을 설파한다.
“세상에는 비록 몸은 죽지만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고, 몸은 살아 있지만 영혼이 죽은 사람도 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살아 있어도 어떤 가치도 없다. 죽어서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죽음을 택할 것이다. 또 살아남아 국가의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살길을 택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죽고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쇼인은 나라를 위해 큰일을 도모하겠다고 마음먹은 당시 일본 청년들 가슴에 불을 지피는 강의로 유명했다. “단 한 번뿐인 인생 길지 않으니 시시하게 굴지 마라”면서 “사나이는 일생 그 자체가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한다···”고 가슴을 울리는 레토릭으로 젊은이들을 격동시켰다. 국가가 바로 천황으로, 천황을 위해 ‘한목숨 바쳐 들이는 정성’으로 온 힘(渾身)을 다해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一生懸命)는 가르침이다. 천황 중심 국가를 표방하는 과정에서 ‘국민’이란 존재를 천황을 위한 소모품으로 던져 버리는 것도 충성심, 애국심으로 미화시켰다는 점이 쇼인 사상의 비극이었다. 실제로 쇼인은 ‘사나이는 자기 머리를 잃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는 식의 비장한 언사로 청년 제자들의 끓는 피를 격동시켰다. 쇼인은 2차 세계대전 말기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등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비극의 원초적 설계자였다.
한편 5·16쿠데타로 집권한 뒤 ‘10월 유신’을 단행하며 18년 동안 한국을 통치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이건흥 사무총장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만주 군관학교 시절 일본 관동군 장교들과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일본말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인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사무라이 행동 규범을 설정하는 규칙을 중시한 쇼인은 제자들에게 사무라이가 지녀야 할 7가지 덕목으로 '사규칠칙(士規七則)'을 제시했다. 전쟁 중 일본 군부가 암송을 장려했던 이 신조는 일본 육사를 나온 박 전 대통령도 자주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쇼인은 사규칠칙에서 “'뜻을 세우는 것으로 만사의 시작으로 한다'는 ‘입지론(立志論)’을 시작으로 마지막 7항에서는 '죽어서야 그만둔다(死而後已). 즉 몸이 부서질 때까지 생명이 있는 한 끝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그만두지 않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사이후이’는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이다.
‘해외 확장론’, 아시아 지배 첫걸음은 바로 ‘조선 지배’
병법가, 사상가, 교육자인 요시다 쇼인. 그는 일본 정치인의 우상이자 메이지 유신의 산파역이다. 쇼인은 아베의 선거구인 야마구치(山口·옛 이름 長州·조슈)에서 에도(江戶) 막부 말년 무렵 1830년 하기(萩)성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신동(神童)으로 소문난 그는 11세에 번주(藩主) 앞에서 교범으로 사용하는 <무교전서(武敎全書)>란 병학서를 명쾌하게 강의해 주변을 놀라게 한다. 이어 15세 때 <손자병법> 허실(虛實) 편을 강의하자 감동한 번주는 쇼인의 후견인을 지정하고 지원했다. 1851년 에도(江戶)로 6개월간 유학해 동북지방을 여행하며 안목을 넓혀 나간다. 20대 초반이던 1853년, 그는 3년 반 동안 전국 1만3000리를 주유천하하며 강호(江湖)의 재재다사(才才多士)들과 교유하며 견식을 넓힌다. 미토현에서 일본 뿌리를 ‘국체(國體)’로 개념화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배격)를 국가 사상체계로 정리한 미토학의 <신론>은 메이지유신 이후 국민 정서의 원형이 된다. 쇼인 등이 발전적으로 계승한 미토학은 메이지유신 지도자들에게 이어진다.
쇼인은 이때 설화(說話) 수준인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탐독했다. 특히 <일본서기>의 진구황후(神功皇后)가 369년 가야 지방을 점령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다가 562년 신라에 멸망했다는 삼한(三韓) 정벌론을 신봉했다. 일본 야마토 정권{야마토는 일본을 가리키는 아어(雅語)로 한자로 대화(大和), 왜(倭), 일본(日本)이라고 쓰고 ‘야마토’라고 읽는다. 야마토라고 불린 땅(오늘날 나라현)에 야마토 왕권이 있었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처음에는 한자로 왜(倭)라고 썼으나 원명 천황 치세 때 국명을 두 글자로 결정해 왜와 동음(일본 발음 ‘와’)인 화(和)에 크다는 의미인 대(大)를 붙여 ‘대화’로 표기하고 ‘야마토’로 훈하도록 결정}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지금은 폐기된 학설이지만 쇼인은 이를 사실(事實)로 수용했다. 그는 섭정이자 황제인 진구황후라는 ‘덴노(天皇)’에게 조공을 바치던 속국인 한반도 고대국가 삼한이 ‘덴노’의 은혜를 저버리고 중국을 섬기는 것은 배신으로 삼한은 정벌해 마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이 임진왜란과 한일강제병합 명분으로 내세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논거다.
전국을 둘러보고 귀향한 쇼인은 1854년 에도(江戶) 말기 서양 세력의 일본 진출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구국일념으로 선진 문물을 견학하려고 법으로 금지된 밀항을 시도한다. 당시 일본 개항을 압박하기 위해 일본에 온 페리 미국 제독 함대에 몰래 잠입해 죽음을 각오하고 해외로 떠나는 일을 간청했으나 실패했다. 쇼인은 제자가 된 친구와 함께 함대로 타고 갔던 배를 잃어버려 탄로 날 것을 의식해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밀항을 엄하게 처벌하던 에도막부에 자수해 수감됐다.
1855년 출옥하기 전 노야마옥(野山獄)에 갇힌 쇼인은 1854년 10월 24일부터 14개월간 한 달에 40권, 하루에 한 권 이상 책을 읽어 500여 권을 독파했다. 그가 남긴 저작이나 그 후 활동상은 이 시기의 집중적인 독서 결과물이다. 쇼인은 감옥 책임자 배려로 독서를 통해 쌓은 지식을 동료 죄수들에게 강론하는 한편 자신만의 이론과 사상을 형성해 나간다. 당시 25세였던 쇼인은 감옥에서 밀항 동기와 자신의 사상적 배경과 주장을 담은 <유수록(幽囚錄)>을 저술했다. 이 책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일본 우익의 정한론은 물론이고 훗날 2차 세계대전의 근거가 되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특히 쇼인의 ‘해외 확장론’은 아시아 지배를 위한 첫걸음으로 ‘조선 지배’를 꼽았다. 그는 제자들과 ‘울릉도 개척’에 관한 서한을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8.11.~1877.5.26. 유신 3걸 중 1인)에게 2통,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1840~1864. 아내는 쇼인의 누이동생)에게 2통 등 총 4통을 주고받았다. “다케시마(竹島·울릉도)를 개척하면 해외의 사변에 대응하거나 조선과 만주에 진출할 때에도 일본의 거점으로 쓸 수 있어 크게 이익이 된다.” <竹島 開拓の意見書>(1858.2.) 그는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먼저 당시 조선 영토인 울릉도를 침략해 일본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울릉도는 대륙 침략의 시발점이자 조선 지배의 전략적 출발을 시사하고 있다.
쇼인의 교시 실천을 위해 아베는 재임 중 독도를 노리는 일본 우익 군국주의자들을 추동(推動)해 여론을 조성하고 교과서를 개정함으로써 현재 일본에서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대부분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고 있다. 아베 재임 중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임을 2014년 초등학교, 2015년 중학교, 2016년 고등학교 저학년 역사·사회 교과서에 못 박고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등 역사 관련 기술을 크게 왜곡했다. 아베가 주도해 최초로 마련한 국가안전보장전략에서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데 이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YTN, 2013년 12월 18일), 2022년 일본 방위백서는 독도가 ‘일본 고유영토’라는 주장을 18년째 이어가며 “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고 기술했다.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게 숙원인 아베 정권은 1954년 9월 25일 이래 독도를 분쟁지역화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여차하면 무력 침공으로 ‘독도 탈환 시나리오’를 짜놓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20대 열혈청년 쇼인은 혁명 사상가로 성장해 출옥한 뒤 1856년 8월부터 1858년 12월까지 2년 남짓 숙부와 이웃이 운영하던 개인 교육기관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인수해의 제자 90여 명을 위한 사설 학원을 열었다. 정해진 시간표 없이 강론과 토론, 역사, 독서 등 수업이 이뤄진 메이지유신의 요람이 된 쇼카손주쿠에서 피가 끓는 청춘인 10대를 갓 넘긴 제자들에게 국가와 혁명을 위한 대의(大義)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지라고 격동시켰다. ‘메이지유신의 태동지’라는 입석이 서 있는 쇼카손주쿠의 수강생들은 훗날 막부 토벌을 주도한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조선 강제 병합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메이지 유신 주체세력이 되었다.
근대 일본 역사에서 불멸(不滅)의 영웅으로 떠오른 쇼인. 현재 일본에는 그의 삶과 관련된 기념관이 약 200개에 달하며, 도서 2000여 종이 발간되었다. 그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학당 쇼카손주쿠는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일본인의 심중에 깊게 자리 잡아 국가 정체성으로 체화되었고 아베는 철저히 쇼인을 계승한 정책을 실천했다.
일본은 쇼인을 숭배하는 아베의 장기집권으로 ‘쇼인제국’이 되었지만 과거 쇼인의 사상을 토대로 구축한 ‘일본제국’의 허망한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면 또다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경구처럼 비극적인 파국을 맞을 것이다. 20대의 천재라고는 하지만 일본 밖을 나가 본 적 없는 쇼인의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폐쇄적 국가관과 광기(狂氣) 어린 과대망상(誇大妄想)에 빠진 망상가를 신격화한 실상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다시 자멸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진정한 평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실천하는 도덕적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