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과학기술엔 '진보'도 '보수'도 없다

2022-06-20 11:09

[임병식 위원]

무소속 양향자 의원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함께 주말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국민의힘이 양 의원에게 반도체특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언론은 국민의힘이 초당적 차원에서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양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측에서 반도체특위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해 온 건 사실이다”면서 “‘국민의힘 차원을 넘어 국회 차원의 특위로, 정부와 산업계, 학계가 함께하는 특위일 때 위원장 수락을 검토하겠다’고 답변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치권과 산업계, 학계가 하나 되어 다음 세대를 위한 과학기술을 준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덧붙였다.

통상 특위 위원장은 자당 소속 중진 의원이 맡는다. 국민의힘이 무소속 의원에게 제안한 건 이례적이다. 양 의원이 처한 정치적 입장까지 고려하면 쉽지 않은 제의다. 양 의원은 얼마 전까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는 지난 5월 “지금 민주당은 국민이 바라는 민주당이 아니다”며 복당 신청을 철회했다. 민주당이 강행한 ‘검수완박’ 법안에 문제를 제기하면서다. 양 의원은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유일한 반도체 전문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당 대표 시절 대기업 임원이던 양 의원을 영입했다. 양 의원이 특위 위원장을 수락한다면 민주당은 정치적 타격은 물론이고 상징 자산까지 잃는 셈이다.

국민의힘은 반도체에 공을 들이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갖는 파급 효과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반도체 전쟁에 돌입한 지 오래다.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경제패권 전쟁 이면에도 반도체가 있다. 지난해 4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으로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각각 세계 1위인 삼성전자와 TSMC를 비롯해 인텔, 마이크론, NXP를 불렀다. 이 자리에서 바이든은 “반도체가 인프라다”면서 투자를 당부했다. 삼성전자와 TSMC는 대규모 투자로 응했다. 세계 최강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웨이퍼를 손에 들고 투자를 독려한 건 반도체가 차지하는 위상을 반영한다.

문재인 정부 한·일 경제전쟁도 반도체가 시발이었다. 일본은 3개 핵심 소재 수출을 전면 중단했다. 한국 반도체 업계는 화들짝 놀랐다. 민주당은 즉각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를 설치해 반도체 전쟁을 주도했다. 2021년에는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자 ‘반도체기술대책특위’를 설치했다. 특위는 반도체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인센티브를 담은 반도체 특별법을 제정했다. 또 종합적인 ‘K-반도체 전략’을 내놓았다. 양향자 의원은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부위원장, ‘반도체기술대책특위’ 위원장을 맡아 반도체 산업 육성에 필요한 밑그림을 완성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인재 양성을 강조했다. 이후 한덕수 총리를 TF팀장으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국민의힘은 반도체특위를 설치했다. 현재 위원 선임을 끝내고 위원장 자리만 남겨놓은 채 양 의원을 기다리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로서 지난 정부에서 보여준 역량을 존중한 결정이다. 앞서 양 의원도 반도체 인력 양성과 관련 필요한 법안으로 뒷받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정치권 움직임은 일단 긍정적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불편한 분위기가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정파를 초월한 당위론은 힘을 얻고 있다. 경제 현실은 첩첩산중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20~2024년 동안 1%대 극심한 저성장을 전망했다. OECD 한국경제보고서도 다르지 않다. 2020~2060년 평균 잠재 성장률은 1.2%로 2005~2020년 3.0%에 비해 뚝 떨어진다. 제조업 둔화, 고령화, 저출산, 양극화가 주된 원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제조업 생산력은 2006~2010년 5.2%에서 2011~2015년 2.2%, 2016~2019년 0.7%로 추락세가 가파르다. 경제활동 인구도 크게 줄고 있다. 2025년이면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는 25년 만이다. 일본 36년보다 빠르고, OECD평균 증가율보다 네 배 높다. 반면 출산율은 세계 최저다. OECD회원국 가운데 1.0명 이하는 한국이 유일하다. 2018년 이후 4년 연속 1.0명을 밑돌고 있다.

계층 갈등을 유발하는 양극화는 극심하다. 2020년 4분기 기준 하위 20%의 월 평균 소득은 164만원, 상위 20%는 1003만원으로 6.1배 차이다. 자산 격차는 더 크다. 자산 상위 20%의 총자산 중위값은 12억7000만원인 반면 하위 20%는 3252만원으로 39.1배 차이다. 주택으로 따지면 더 벌어진다. 상위 20%는 4억8000만 원, 하위 20%는 614만원으로 무려 77.6배 격차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 이념과 정파가 있을 수 없다.

국회는 경제정책을 뒷받침한다. 한데 정치인과 법조인, 공무원 출신은 과대 대표된 반면 과학기술인은 가뭄에 콩 나듯 귀하다. 21대 국회에서 정치인은 62명(20.6%), 법조인 47명(15.6%), 공무원 46명(15.3%)이다. 전체 51.3%를 차지한다. 과학기술인은 4명(1.3%)에 불과하다. 양 의원은 19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를 마다하고 지역구를 택했다. 그 이유로 “1회용 비례대표가 아니라 기술인 출신 정치인으로 각인되고 싶었다”고 했다. 양 의원은 <과학기술 패권국가>에서 “국민들은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반목에 지쳐 있다. 경제성장 기틀을 마련하는 정치가 절실하다”고 했다.

책은 부민강국과 과학기술을 강조한다. “기술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기술이야말로 진보이고 평등이다. 기술이 정치를 이길 수 있다.” 그 어떤 수사보다 명징하다. 진영 싸움에 익숙한 우리 정치에 던지는 다음 말도 의미심장하다. “과학기술에는 이념이 없고 진보와 보수로 나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에 불리한 과학이 없고, 국민의힘에 불리한 기술도 없다. 효율적‧생산적‧미래적인 과학기술만 있을 뿐이다.” 양 의원이 특위 위원장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정치의 본령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여야는 주말 내내 서해 공무원 피살을 놓고 정치 공방으로 날을 샜다. 아직도 멀었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