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서 돌아온 이재용]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향후 키워드는 초격차·M&A

2022-06-19 18:00
'신경영 선언' 29년째 되는 날 유럽 땅 밟아...'승어부(勝於父)' 본격화
출장 동선 보면 '삼성 미래 먹거리' 보인다...반도체·배터리·바이오 강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2일간의 유럽 출장을 마치고 지난 18일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향후 삼성의 미래 전략 사업과 경영 비전 등에 반영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부회장은 유럽 출장 소회를 묻는 취재진 질문에 “좋았어요”라고 답했다. 이어 “시장에 여러 가지 혼돈과 변화와 불확실성이 많다”며 “우리가 할 일은 좋은 사람 모셔오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문화를 만들고, 그다음엔 아무리 생각해봐도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 같다”고 답했다.

재계는 이 부회장이 귀국길에서 ‘기술력’을 강조한 만큼 삼성이 앞으로 초격차 기술력 유지에 더욱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그의 출장 일정을 통해 미래 삼성의 로드맵을 엿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교롭게도 부친인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지 정확히 29년째 되는 날 이 부회장이 유럽 땅을 밟은 것을 계기로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뜻의 ‘승어부(勝於父)’가 다시금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5개국 순회 ‘강행군’...배터리·반도체·바이오 챙겼다
지난해 12월 중동 출장 이후 약 6개월 만에 해외 출장길에 오른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을 통해 헝가리 괴드에 있는 삼성SDI 배터리 공장, 2016년 인수한 자동차 전장기업 하만카돈, 유럽 내 연구·영업조직 등을 살피며 해외 사업장을 직접 점검했다.

또 네덜란드 ASML, 독일 BMW 등 협력·고객사를 비롯해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 루크 반 덴 호브 IMEC 최고경영자(CEO) 등을 만나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했다.

이 부회장의 방문국으로 헝가리,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이 거론되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행보는 그가 직접 밝힌 독일 완성차 기업과의 만남이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그간 LG에너지솔루션, SK온 등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다소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삼성SDI가 이를 계기로 태세 전환에 나설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삼성SDI가 미국 인디애나주에 스텔란티스와 합작법인(JV)을 설립한 데 이어 유럽 내 완성차기업과도 합작법인을 설립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제로 최윤호 삼성SDI 대표는 지난 3월 스텔란티스 외에 추가적인 합작법인 설립 가능성과 관련한 질문에 “배터리 사업을 하려면 많은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과 협력하는 게 당연하다”며 “(협력) 이야기를 해오는 회사도 있고,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은 또 네덜란드 일정을 통해 베닝크 CEO와 만나 연간 생산량이 50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진 EUV 장비 공급을 놓고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하고, ASML의 차세대 EUV 장비를 직접 살피며 차세대 공정을 구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벨기에 IMEC에서는 최첨단 반도체 공정기술, 인공지능(AI), 바이오·생명과학, 미래 에너지 등 첨단분야 연구개발 현장을 살폈다. 재계는 이 부회장이 이곳에서 ‘삼성의 미래 먹거리’와 관련해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중장기 미래 전략에 녹여낼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삼성은 지난 5월 반도체, 바이오, AI·차세대 통신 등 미래 신사업을 중심으로 향후 5년간 45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삼성의 미래 준비’ 계획을 발표했다.

이 부회장이 언급하진 않았지만 프랑스도 이번 출장의 중요한 축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출장 후반부 일정의 거점을 프랑스 파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파리에 AI 연구조직을 두고 유럽 내 AI 연구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파리에서 관련 연구 상황을 점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부회장의 유럽 출장 행보와 삼성의 미래 먹거리 분야를 근거로 현지 완성차 기업 르노, 이동통신사 SFR·오랑쥬 등과 협업 논의를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이 지난 6월 14일(현지시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를 방문해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 보유 실탄 124조원...대형 M&A 임박했나
이 부회장이 귀국길에 ‘기술’을 세 차례나 강조한 것과 관련, 재계는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 선도를 위한 ‘기술 리더십’을 위해 과감한 인수합병(M&A)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여러 차례 “3년 내 유의미한 M&A가 있을 것”이라고 공언한 만큼 이 부회장의 이번 출장이 M&A 전초전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올해 1분기 말 삼성전자 현금성 자산은 124조원에 달해 실탄은 충분하다.

가장 유력한 인수 후보로는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이 꼽힌다. 최근 외신에서는 삼성전자가 인텔과 함께 ARM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에 참여할 가능성을 잇달아 보도하고 있다. 패트릭 겔싱어 인텔 CEO가 ARM 인수를 위한 컨소시엄을 구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최근 그가 방한해 이 부회장과 만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삼성과 인텔 간 공조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는 특정 기업이 혼자 ARM를 인수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공개적으로 ARM 인수 의사를 밝힌 업체는 퀄컴, 인텔, SK하이닉스 등이다. 문제는 반도체 업계 상황을 고려하면 미국과 영국 등 경쟁 당국 측 반대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앞서 엔비디아에서 400억 달러에 ARM을 인수하려 했지만 이런 이유로 무산됐다.

ARM은 저전력으로 구동되는 시스템반도체 설계 업체인데 스마트폰용 칩세트 설계만 놓고 보면 시장을 90%나 차지한다. 퀄컴 스냅드래곤, 애플 A 칩세트, 삼성전자 엑시노스 같은 주요 기업 스마트폰용 칩세트가 ARM 코어를 기반으로 한다.

향후 자율주행차 등 활용 사례가 늘어날 전망이어서 ARM 코어 수요도 늘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특정 기업에서 ARM을 인수하면 반도체 시장 지형이 단번에 바뀔 수도 있다”며 “삼성 역시 ARM에 관심이 큰 것으로 알려졌지만 신중하게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은 뤼터 총리와 ASML 경영진을 잇달아 만나며 네덜란드를 비중 있게 찾았고 독일 BMW를 고객이라 표현하며 만났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차량용 반도체 기업 NXP(네덜란드)와 인피니온(독일)을 인수할 가능성도 제기한다.

재계에서는 이번 이 부회장 출장 기간에 뱅크오브아메리카 출신 반도체 M&A 전문가로 불리는 마코 치사리 반도체혁신센터(SSIC) 센터장이 이 부회장을 수행했을 것이란 관측도 내놓고 있다. SSIC는 삼성의 미래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조직으로 삼성전자 DS부문 소속이다. 2017년 미국 전장업체인 하만을 80억 달러(약 9조원)에 인수한 주역으로 꼽힌다. 지난달 초 선임된 치사리 SSIC 센터장은 과거 퀄컴이 NXP를 인수할 때 자문한 경험이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하만 인수 이후 지난 5년 동안 대규모 M&A를 추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만간 ‘큰 건’이 나올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앞서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도 지난달 삼성호암상 시상식 만찬 행사 뒤 기자들과 만나 M&A 윤곽 시기를 묻는 말에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다. 워낙 보안 사항”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M&A가 진행 중이냐’는 질문에는 “그렇게 보면 된다”고 답해 조만간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것이란 게 업계 중론이다.
 

유럽 출장을 마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월 18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귀국, 청사를 나선 뒤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