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의 헌법정치] 기업에 '자유'를 許하라

2024-11-26 06:00
권력을 남용하면 '창조적 혁신' 안나온다

 
[성낙인 26대 서울대 총장] 

삼성의 위기는 '기술 한국'의 위기  

 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그 나라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1외국어는 1년이 지나야 들리고, 제2외국어는 2년이 지나야 들린다고 한다. 제대로 들을 수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외국에 가면 집에 라디오를 하루 종일 틀어놓는다. 영상매체시대에 접어들면서 라디오는 텔레비전으로 바뀌었다. 필자가 파리대학에 유학할 시절에도 제일 먼저 TV를 사러갔다. 전시장 한가운데는 세계적 유명 메이커인 소니, 톰슨, 필립스 등 유럽과 일본 제품이 차지하고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 입장에서 좀 더 싼 제품이 없느냐고 직원에게 문의하니 “글쎄 있기는 한데 잘 나올지 모르겠다”면서 구석에서 보여준 뽀얗게 먼지 쌓인 TV가 LG의 전신인 금성사의 ‘Gold Star’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애국심을 발휘하고 싶어도 한국산을 구매할 수는 없다.

그런데 30년 전부터 세계 가전시장은 삼성과 LG로 완전히 교체되었다. 전 세계 TV시장의 46%, 거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다. 가전제품은 소비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생활필수품이다. 현대차는 포니 신화를 이끈 반세기 만에 세계 3위 자동차기업으로 우뚝 섰다. 바다의 제왕인 조선업은 세계 1위에 등극한 지 오래 전이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구 대우조선)은 조선업의 상징이다. 세계적인 무기 수출국에서 더 나아가 원자력발전소까지 수출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피땀으로 과학입국을 이룩한 과학자들은 스스로 자부할 만하고 전 국민의 칭송과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세계인의 일상생활에까지 파고든 ‘Made in Korea’는 이제 한류로 이어간다. K팝으로 상징되는 K컬처 현상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기술한국의 연장선상에 있다. 최근 거리에는 외국인들이 부쩍 늘어났다. 예전에 단체관광에 머물던 한국관광이 이제 가족이나 친구들과 자유여행으로 바뀐다. 한국의 이민증가율은 OECD 국가 중에서 2위에 이를 정도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삼성, 왜 하이닉스에도 뒤지나

하지만 최근 인공지능(AI) 시대를 접어들면서 변화에 직면한 반도체에 대한 우려가 깊어간다. 그 위기의 진원지는 그간 세계 1위를 유지해왔던 삼성전자 반도체다. 인공지능(AI) 반도체인 고대역메모리(HBM)에서는 후발주자인 SK하이닉스에도 밀린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는 적자를 면하지 못한다. AI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이 호황을 누리는 와중에 대장주 삼성만 유독 하향곡선을 그린다. 한때 컴퓨터를 켜면 바로 나오는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의 인텔이 제왕의 자리에서 밀려난 현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1년 총 수출액이 830조원인데 삼성전자의 수출액이 150조원으로 전체 수출액의 18%에 이르고, 베트남 전체 수출액의 26%를 삼성전자가 차지한다. 그 삼성전자가 위기에 빠졌다. 삼성전자의 위기는 대한민국의 위기다. 그간 초일류·초격차를 지향해온 삼성은 애니콜을 불태우며 갤럭시 신화로 애플과 더불어 세계 휴대폰 시장을 장악하였다. 세계 최초로 폴더블 폰도 개발했다. 그 사이 선두주자였던 노키아와 모토롤라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휴대폰 시장도 화웨이 등 중국시장에 밀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위기의 삼성에 대한 원인은 다양하다. 의대열풍, 공대기피, 교육열 저하, 인재 유출 등등. 그런데 왜 하이닉스에도 뒤지는가라고 묻는다면 설명이 안 된다. 이건희는 그 유명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야 한다”라든가, 어찌 보면 막말과 같은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는 어록으로 혁신을 이어갔다. 관리의 이학수, 기술의 윤종용으로 중용된 투톱 부회장은 나름 시대적 소명에 충실한 삼성의 견인차였다.

3세에 이른 이재용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되면서 수감생활을 감내해야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 ‘경제공동체’라는 허구의 제물이 된 측면도 있다.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부당 합병·회계 부정” 재판은 1심의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항소했다. 그 과정에서 구명운동이랍시고 자신들의 보위에만 급급했던 이 회장을 옹위한 최측근 세력들의 잘못된 판단에 대하여는 엄중한 문책이 뒤따라야 한다.

정치권도 기업에 자유를 허(許)하여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부터 내세우는 최고의 화두는 ‘자유’다. 그 자유를 기업인들에게도 적용하여야 한다. 기업인들은 부산에서 파리까지 동원되었지만 부산 엑스포 유치는 실패했다. 검찰도 이 회장과 관련된 지방법원의 판결에 깨끗이 승복하고 항소를 포기했어야 한다. 하지만 검찰의 조직 체면용 항소, 즉 무죄판결이 나오면 일단 항소하고 보는 검찰의 태도는 검찰권 남용을 넘어 국가폭력이라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정치·법조인이 장악한 기업 이사회

지금은 ESG 즉 환경, 사회적 책임, 가버넌스 시대이다. 더 이상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준법을 실천하는 기업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기업들이 앞다투어 설립한 준법감시 또는 윤리경영 기구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의문이다. 이런 기구가 오너의 면피성 바람막이용이어서는 아니 된다. 기업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는 경영전문가보다는 관료, 법조인, 정치인 등이 꿰차고 있다. 이는 그 사이 정치권력이 보여준 행태에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반작용의 결과이다. 더 이상 정치권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너와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서 기업경영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라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와 경제라는 두 바퀴가 잘 굴러가야 한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5년 단임제에서 대통령이 탄핵까지 당하는 상황이라 집권세력의 사회적 장악력은 현저히 저하된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는 5년 내내 여소야대 상황에서 의회권력의 통제와 견제를 받는다. 반면에 재벌은 자자손손 기업을 물려받으면서 금권(金權)의 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그들의 잘못된 판단은 국가경제를 멍들게 할 수 있다. 창업자 세대의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올린 공든 탑은 2세·3세들이 자행하는 일탈로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다. 재벌가 중에서 상속재산을 둘러싼 골육상쟁 소송과 중혼 등으로 인한 가사소송을 벌이지 않은 쪽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수신제가(修身齊家)도 제대로 못하는 기업주는 사회적 존경은 고사하고 임직원들로부터도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기업경영을 자식들에게 상속시키는 방안과 기업가 즉 대주주는 주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방안 중에서 어느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유럽과 일본은 상속에 중점을 둔다면, 미국은 전문경영인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포스트잇’(Post-it)으로 잘 알려진 3M이나 유한양행은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킨다.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고도산업사회에서는 경륜을 갖춘 인사들이 경영을 책임지는 시대로 갈 수밖에 없다. 다만 전문경영인은 삼성의 반도체, 현대의 자동차 진출과 같은 위험을 감수(risk taking)하는 결단을 내리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에 문어발식 기업경영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한국의 재벌(Chaebul)은 세계경영학의 연구대상이다.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전문경영인과 대주주의 합리적 소통은 기업 내부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불가결하다. 필자의 헌법철학인 균형(balance)이론은 이 세상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내 몸이 균형을 상실하면 감기나 암에 걸리듯이, 국가권력의 작동도 균형을 잃으면 헌정중단이나 탄핵 같은 파국을 초래한다. 기업경영에서 대주주의 횡포도 경계의 대상이지만 전문경영인의 직무해태나 오판은 기업의 생존을 위태롭게 한다.

세계적인 경제규모 수준에 이른 대한민국에서 재벌 총수가 스스로 물러난 적도 없지만, 자식들에게 상속시키지 않은 예도 없다. 그런데 이재용 회장은 더 이상 삼성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포스트 이재용이 정상적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현재의 이재용이 스스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허(許)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재용의 자유는 견제받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대주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한도 내에서의 자유이다. 서울대보다 더 많은 박사학위 소지자가 재직하는 삼성전자는 임직원들에게도 자유를 허하여야 한다. 뛰어난 인재들이 제대로 꿈을 펼칠 수 있는 ‘자유’로운 여건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그 기업에서는 ‘창조적 파괴’라는 혁신이 불가능하다.

빈대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판 

미국의 10대 기업은 창업 1세대 기업들이 장악한 지 오래다. 그만큼 기업환경은 급변한다. 그런데 국내 기업들은 어떠한가? 기존 재벌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네이버·카카오·하이브 등 창업 1세대 기업들조차 문어발식 경영의 후유증에 따른 갖가지 분쟁으로 사법처리의 대상이다. 신세대는 신세대답게 구시대적인 잘못된 재벌의 행태에서 벗어나 ‘창조적 혁신’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여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와 사회도 기업을 대하는 자세에 변화가 필요하다. 국민적 성원으로 쌓아올린 대기업이 행동주의펀드와 같은 세계를 떠도는 기업사냥꾼들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엘리엇’이 2018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 소송에서 정부는 1300억원이라는 거액의 혈세를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최근 고려아연 사태에서 드러난 특정세력 간의 이전투구는 기업발전과 국민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소액주주의 권익 보호를 위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의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자칫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헌법이 추구하는 ‘경제의 민주화’를 구현하기 위하여 대주주의 일탈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균형있는 경제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기업이 살아나야 나라 경제도 살고 근로자도 산다.
 

필자 주요 이력 

▷파리2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한국공법학회 회장(2005~2007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2009년 1월~2012년 12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2013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 의장 ▷제26대 서울대 총장(2014년 7월~2018년 7월)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