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한 尹과 광주의 새로운 미래
2022-06-01 12:55
주말 저녁 자리에서 윤석열 정부의 첫 인사가 화제에 올랐다. 요지는 “장관급 인사에서 호남 출신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장관 자리를 특정 지역에 대한 배려와 균형 인사의 기준쯤으로 여기는 세간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도 개각 때면 장관들 프로필을 보면서 영남은 몇 명, 호남은 몇 명 하며 세던 시절이 있었다. 유인태 전 의원이 노무현 정권에서 정무수석(2003∽2004년)을 할 때 얘기다. 사석에서 공정인사 시비가 일자 그는 일갈했다. “자꾸 영남, 호남 하지 마라. 우리 같은 사람(충북 제천)은 영호남 어디에도 못 끼어서 ‘기타’로 분류되니까.” 좌중엔 폭소가 터졌다.
장관 인사에 촉각을 곤두세우다
장관 인사에 상대적으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들이 있다. 이른바 개발독재-영남패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생긴 소외와 피해 의식 탓이다. 민주화가 되면서 나아지긴 했지만 그 상처까지 치유된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단순 비교가 가능한 고위공직자 수(數)나 출신 지역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는 단순한 인사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정권의 국정 운영의 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 유력 정치인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반문(反文) 정서가 심상치 않은 지역을 어떻게 끌어안고 갈 것인가? 그의 대답이 이랬다. “우선 장관 인사에서 조금 배려해야 되겠지요. 청와대도 (어떻게 대처할지) 다 알아요.”
이런 ‘배려’를 윤석열 정부에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지역 안배보다는 능력 위주의 인사를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징후도 보인다.
보수와 광주의 상징자산을 공유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윤석열 대통령이 장관과 여당 의원 전원을 데리고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을 때 나는 궁금해졌다. 40년 동안 한국 사회를 옥죄어온 이념과 지역 갈등의 한 매듭이 이렇게 풀린다면, 앞으로 광주는 어떻게 될까. 아니 어떻게 되어야 하나.
광주의 언론들은 윤 대통령의 파격적인 5·18 참배를 긍정 평가하면서도 단서를 달았다. “호남 민심을 겨냥한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기 위한 개헌과 진상 규명의 로드맵까지 함께 제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이미 공수(攻守)가 바뀐 것 같다. 윤 대통령은 앞으로도 계속 광주를 찾을 것이고, ‘임을 위한 행진곡’도 더 우렁차게 부를 것이다. 그 추모사와 노래가 ‘이제는 광주가 달라져야 한다'는 압박으로 들리지 않을까.
광주는 윤 대통령과 자유, 민주, 인권이란 광주(5·18)의 상징자산을 공유할 수밖에 없게 됐다. 사실 진작 그렇게 됐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5·18 비방금지법 같은 과잉 입법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린 게 광주 민주화운동이다.)
“뒤틀린 수구 좌파와 단절하라”
우파 보수정권의 적극적인 5·18 포용 노력 앞에서 광주에 남은 것은 뭘까. 5·18 정신을 국민 통합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꾸준히 해나가야겠지만, 현실의 광주로 돌아간다면 새로운 광주, 달라진 광주를 만드는 일밖에는 없을 것이다. 민주도시 광주가 세계 일류도시로 비상(飛翔)하는 미래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광주 출신 정치인이자 시민사회운동가인 주동식(64)을 주목한다. 운동권 출신으로 일관되게 영남패권주의를 비판해 온 그는 ‘광주담론’ 세계에선 잘 알려진 논객이다. 지금은 국민의힘 광주 서구갑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표적인 반노(反노무현), 반문(反문재인) 인사로 꼽힌다.
주동식은 호남 혐오와 맞서 싸우면서 유명해졌다. 일베(일간베스트) 같은 곳에서 호남과 호남인을 비속한 표현으로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뛰어들었다. 다른 지역들도 이와 비슷한 혐오에 시달리고 있어서 ‘지역평등시민연대’라는 단체도 만들어 대표로 활동 중이다.
친노·친문 패권의 대안 세력을
그에게 있어서 달라진 광주, 새로운 광주는 친노·친문 패권과 단절한 광주다. 정리하면 이렇다. “김대중(DJ)을 중심으로 한 광주의 민주화 투쟁이 5·18을 거치면서 좌파(주로 NL계 주사파)에 의해 반미자주화투쟁으로 변질됐고, 광주가 이들 좌파의 숙주(宿主)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2016년 <호남과 친노>라는 저서에서 “독자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친노가 민주당에 들어와 호남의 정치 기반을 접수하고, 호남의 민주 자산까지 훔쳐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친노는 ‘우리가 아니면 호남 너희는 왕따가 된다’는 논리로 호남을 압박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친노·친문의 패권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세력의 형성을 광주의 시급한 정치적 과제로 꼽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물론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럼에도 친노·친문에 대한 현실정치적이고 객관적 접근을 통해 광주·호남 정치의 실체를 봐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차제에 공론화가 되기를 소망한다.
주동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양향자 의원(55·무소속·광주 서구을)은 새로운 광주를 얘기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한 요소다. 아니, ‘자산(資産)'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어릴 때 광주는 그 자체로 자부심”
광주여상 출신인 양 의원은 연구보조원으로 삼성전자에 입사해 고졸 직원으로는 삼성전자 사상 처음으로 여성 임원(상무)이 된 반도체 전문가다. 반도체의 ‘반’자도 모르던 그가 당시만 해도 커피를 타고 복사를 하던 일이 당연했던 보조원에서 28년 만에 반도체 설계 담당 임원이 된 과정은 어떤 인간승리보다 극적이다.
그의 자서전 격인 <꿈 너머 꿈을 향해 – 날자, 향자>(2018년)에는 그가 반도체를 알기 위해 밤잠 안 자고 사내대학과 직장 선배들에게 공학과 수학의 기초를 배우는 모습이 나온다. 읽다가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양 의원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반도체 경쟁은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우리 미래가 걸린 국가 간 패권 경쟁인데도 우리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면서 정부에 더 과감한 투자와 인재 양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보좌진의 성폭력 문제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민주당을 탈당했다. 최근 복당이 가능해졌으나 복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가 입당했던 민주당이 지금의 민주당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때 광주는 그 자체로도 자부심이었다고도 했다.
당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강행 처리와 송영길 전 대표의 서울시장 선거 출마, 이재명 고문의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 출마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광주에서 민주당 정치인이 이런 결심을 한다는 게 놀랍다.
양 의원의 말이다. “지금 광주는 멈춰 있다. 바다를 향해 굽이쳐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저수지와 같다. 사람도, 돈도, 일자리도 모두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다. 광주가 흐르려면 이제 다른 생각이 필요하다.” 그는 스티브 잡스의 말,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를 인용한 것인데 나는 그걸 이렇게 이해했다. 문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기울어진 실력이야.
자랑스러운 광주를 되찾아야
윤 대통령이 광주를 다녀간 이튿날, 광주 무등일보는 ‘20대에게 외면받는 5·18, 달라져야 한다’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냈다. “5·18이 그 당시를 살았던 세대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있어서 젊은 세대들의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낼 콘텐츠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광주, 달라진 광주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주동식의 지적처럼 좌파의 숙주가 되고, 좌파 특유의 반(反)기업 정서로 인해 인구 145만 대도시에 복합쇼핑몰 하나 유치하지 못하는 광주라면 보여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광주 출신 한 출향 인사의 자탄이다.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자랑스러운 광주의 정신과 역량, 인정(人情)과 관용의 문화는 다 어디로 가고 뒤틀린 좌파와 마주 잡은 손만 덩그러니 남았는가.”
한없이 정치적이지만, 정작 정치가 죽어버린 땅에, 윤 대통령의 5·18 참배가 새 정치의 싹을 돋게 하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 그게 이번 대통령의 5·18 참배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 고려대 정치학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