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제왕학] 용산 르네상스 시대, 새 역사창조의 징표인가?
조선 역사상 1000년 동안 ‘제1 대사건’ 비견되는 ‘청와대’ 이전
“서경(평양) 전투 실상은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妙淸, ?~1135)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후자의 대표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저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평양천도운동이 좌절된 것을 ‘조선 역사상 1000년 동안의 제1 대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는 “민족의 흥망성쇠는 항상 사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느냐에 달린 것이며 그 방향성은 매번 어떤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면서 스님 묘청이 낭불양가(郎佛兩家) 이상을 실현하려다 패망하고 드디어 유가(儒家)를 숭상하는 김부식류의 사대주의파 천하가 되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윤석열 당선인이 지난 10일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마침내 용산 시대가 열렸다. 이로써 조선 경복궁 창건 이후 600여 년, 고려 남경(南京) 행궁(行宮) 시절까지 포함하면 무려 1000년 가까이 지속된 ‘4대문’안에서 이뤄진 ‘광화문 권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청와대를 옮기는 일은 단순한 집무실 이전을 넘어 수도를 옮기는 천도(遷都)에 버금가는, 한 국가의 미래 향방을 가르는 크나큰 사업이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던 3월 20일 대통령실 개혁 구상을 밝히며 “현 청와대 구조는 왕조시대 궁궐 축소판으로 권위 의식과 업무 비효율을 초래한다”면서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방식의 국정 운영이 필요하다”며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을 선언했다. 공간심리학 측면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며 권위주의 타파를 위해서라도 집무실 이전은 필수라고 말했다.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는 것은 한때 신구(新舊) 권력 간에 갈등이 형성되는 등 찬반 여론이이 분분했다. 비판론자들은 “무속(巫俗)에 가스라이팅 당한 건가?”라며 서울의소리 등 30개 시민단체는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저지를 위해 긴급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권한 위법, 관습법 유린, 국가재정법 위반, 군시설 이전 관련 회계법규 위배 등을 문제 삼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국가의 백년대계를 토론 없이 밀어붙이면서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무척 모순적(矛盾的)으로 느낀다”며 각을 세우고 ‘안보 공백’ 운운하며 “위험하다”고 했다. 집권 여당 측이 취임 전에 제왕적(帝王的) 행태를 보인다고 비판하자 윤 당선인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내려놓는 방식을 제왕적으로 한다는 말씀이신데···”라고 맞서며 ‘단 하루도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작심 발언을 하며 이전을 관철했다.
74년 만에 청와대를 개방해 국민 품으로 돌려준다는 윤 당선인의 공약 실천에 찬성하는 여론도 비등했다. 용산 이전에 대해 건축가 유현준 홍익대 교수는 ‘신의 한 수’라고 평가했다.(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3월 17일) 풍수지리(風水地理) 및 예언과 미래사에 대한 비결(秘訣)인 도참서(圖讖書)에 근거해 ‘용산’ 일대가 길지(吉地)라는 풍수가(風水家)도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이 현실화하자 일찍이 용산을 복 있는 터로 비정해 화제가 된 인물도 있다. 강골검사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석열 검사는 박근혜·이명박 정권에서 정권의 ‘치부(恥部)’를 수사하다 좌천돼 검찰 내에서는 ‘끝난 인물’로 치부(置簿)되었다. 이때 윤 검사가 왕기(王器)임을 간파하고 제왕학을 전수해 추종자들에게 고려를 창업한 ‘왕건의 도선국사’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뒤의 무학대사’와 비견되며 국사(國師)로 불리는 도인풍(道人風)의 ‘천공(70)’ 스승이 바로 그다. 그는 윤 총장이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하라는 문 대통령의 덕담(德談)을 우직하게 실천해 ‘역린(逆鱗)'을 건드려 집권 여당에서 ‘내부의 적’이 되어 핍박받는 등 신산(辛酸)한 세월 속에서 부침을 거듭할 때마다 정치 훈수를 두는 등 결정적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11월 유튜브를 개설해 ‘2025년 가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예언하는 등 ‘정법’ ‘진리’ 강의를 해온 그는 현재 폴로어 약 8만명, 관련 동영상 1만1646개, 총 조회 수 2억2000만회에 달하는 유튜브 인플루언서다. 폴로어들에게 난세(亂世)에 출현한 진정한 스승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4년 전 ‘용산 활용 방안’ 강의가 새삼 재조명되었다.
천공은 “용산이 힘을 쓰려면 용이 여의주를 들고 와야 한다. 용은 최고의 사람이고, 여의주는 법”이라면서 “용산 (미군)기지는 문화 기지로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화를 일으킬 장소를 지금 마련해야 한다. ··· 문화의 메카로 등장할 공원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윤 대통령 당선인에게 용산 이전을 조언한 적은 없으나 이전은 너무나 잘했고 앞으로 그쪽(용산)이 빛나기 시작하고 발복(發福)하기 시작하면 국제 귀빈들이 오더라도 굉장히 좋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작년 10월 6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유승민 전 의원이 ‘천공 스승’이라는 이름을 꺼냈다. 윤 후보는 “천공 스님은 알긴 아는데 멘토라는 얘기는 과장된 것”이라면서 “미신이나 점 보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고 역성을 들며 영상 시청을 권하자 유 전 의원은 “이런 유튜브 볼 시간에 정책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역공했다. 천공도 ‘윤석열 멘토설’이 불거지자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한 뒤에는 만나지 않았으며 멘토 관계가 아니다”고 밝혔다.(3월 23일 YTN) 정법 강의 마니아 제자를 자처하는 한 인사는 “천공 스승은 미신이나 무당, 굿, 무속 이런 것도 아니다. 김건희 소개로 윤 검찰총장을 소개받아 열흘에 한 번씩 만난다는 말은 거짓말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터에 대한 끊임없는 흉지설(凶地說)
윤 대통령은 지난 10일 취임 직후 용산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용산 르네상스 시대를 열겠다는 집권층 의지가 장차 새 역사 창조의 징표가 될지 주목된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의 불운한 말로는 청와대 터에 대한 흉지론(凶地論)에 불을 지폈다. 오랜 세월 길(吉)보다는 흉(凶)이 많았다. 조선 개국 후 경복궁을 중심으로 500여 년 동안 피비린내가 멈추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두 차례(3대와 5대)에 걸쳐 10년 가까이 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1927년 경복궁 옆 지금 청와대 자리에 조선총독부 관저를 세웠다. 그는 귀국 후 6년 뒤 일본 총리대신(1932~1934년)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할 때까지는 청와대 터의 저주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대신 재직 중 일본을 패망으로 이끈 군국주의화를 앞당긴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2·26사건 때 47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된다. 1936년 2월 26일 육군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1483명의 병력으로 일으킨 반란사건이다. 사이토가 청와대 터에 관저를 지은 지 꼭 10년째 되는 해였다.
이후 그 터에 살았던 조선 총독들의 말년 역시 비참했다.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4대)는 ‘조선총독부 의옥(疑獄)사건’이란 뇌물 게이트에 연루되어 사임했고, 법정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모든 공직에서 밀려났다. 미나미 지로(南次郎·7대)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벌어진 도쿄 국제전범재판소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형,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8대)도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9대)는 일본 패망 후 일가족만 데리고 몰래 일본으로 도망치다 폭풍으로 실패하고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1953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청와대 터에 대한 ‘흉지설’이 회자되었는데,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6대)만 빼곤 퇴임 후 전부 뒤끝이 좋지 않았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 역시 청와대 생활이 순탄치 못했고, 퇴임 뒤 비극적 운명에 처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하야 후 망명길에 올랐고, 그의 양자 이강석은 부모와 함께 권총 자살했다. 윤보선∙최규하 대통령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내려왔다. 18년간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시해됐고, 육영수 여사는 피살됐다. 전두환은 사형을 구형받는 등 순탄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 뒤를 이은 노태우 역시 결과는 비슷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 아들이 모두 각종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는 우환을 겪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자살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현재 수감 중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재 탄핵 결정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했고, 재임 기간보다 긴 수형생활 뒤 2021년 12월 특별사면됐다.
이러한 탓인지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 이전 문제가 은밀하게 거론되다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청와대 이전 공약을 발표했지만 추진되지 못했다. 그 후 2002년 대선에서 청와대 이전 문제가 다시 제기됐고,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청와대와 북악산을 시민들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 문구의 대선 공약 광고를 내보냈으나 역대 정부의 청와대 이전 구상은 추진 단계에서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됐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이전하고 기존 청와대를 시민에게 개방하겠다고 약속하며 문재인 10대 공약에 포함했다. 취임사에서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로 대통령실 이전을 선언했고 ‘광화문 대통령 시대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퇴근 후에는 시민들과 함께 맥주 한잔 마시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 1월 4일 유홍준 광화문 대통령 시대위원회 자문위원이 청와대 이전 보류를 발표했고, “관저의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때 옮겨야 한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야·쿠데타·탄핵 등 어두운 말로(末路)로 이어진 전례 때문인지 은밀하게 청와대 풍수 문제가 거론됐다.
‘활을 너무 당기면 부러지고, 달도 가득 차면 기운다‘
최근 청와대 이전 논란을 보면 1392년 창업한 조선 왕궁 자리를 놓고 무악(毋岳)과 백악(白岳)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천도론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1392년 7월 17일 역성(易姓)혁명으로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다. 동시에 왕조 교체에 따른 민심 이반을 추스르고, 개경 지기(地氣)가 쇠락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천도를 국정 제1과제로 추진했다. 풍수도참사상은 오늘날엔 속설로 취급되지만, 당시엔 고려 창업 과정에서부터 국책(國策)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이런 정치사상적 배경으로 쿠데타 주도 세력은 새 왕조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려면 천도가 가장 확실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천도를 기획하며 애초 계룡산을 새 도읍지로 거론했으나 개국공신 좌도(경기도)관찰사 하륜(河崙)의 '계룡산 형세가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폐기되었다. 1393년 2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이성계는 개국 3년 되던 1394년(태조 3년) 9월부터 신도(新都) 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건설 계획을 진행하는 한편 10월에는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때부터 한양(서울)은 수도로서 위치를 확고히 해 오늘에 이르렀다.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은 ‘사대문(四大門) 한양 시대’ 종식을 의미한다.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윤 대통령의 10대 공약에서 시작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청와대 개방과 맞물려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일이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지만 청와대의 공간적 문제점은 극도의 폐쇄성이었다. 역대 대통령마다 청와대만 들어가면 민심과 멀어졌다. 조선 쇠망과 역대 대통령의 불운한 말로는 풍수 때문이 아니라 외부 소통에 눈감은 집권자의 무능, 그리고 민심 이반 때문이었다. 대통령 권력은 경험칙으로 당선인 시절이 가장 파워풀하고 취임하는 날부터 파워가 줄어드는 강노지말(强弩之末)의 운명을 면치 못한다. 청나라 석성금(石成金)이 지은 전가보(傳家寶)의 지적은 세상 이치를 함축하고 있어 장구한 역사에서 보면 수유(須臾)에 불과한 5년 뒤 끝나는 한시적 정권임을 집권층은 직시하고 새겨들을 말이다.
“옛사람은 말했다. 말은 다 해야 맛이 아니고, 일은 끝장을 봐서는 안 되며, 봉창에 가득한 바람을 편 가르지 말고, 언제나 몸 돌릴 여지는 남겨 두어야 한다. 활을 너무 당기면 부러지고, 달도 가득 차면 기운다. 새겨둘 일이다(話不可說盡 事不可做盡 莫撦滿篷風 常留轉身地 弓太滿則折 月太滿則虧 可悟也).”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