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의 사람들] MB 외교 '장자방' 김태효, 尹의 '외교 책사'로
2022-05-13 08:00
한·미·일 공조 강조하는 대북 원칙론자...NSC 사무총장 겸임
3월 15일, 김은혜 당시 당선인 대변인(현 국민의힘 경기도지사 후보)이 이와 같은 내용을 발표했을 때 서울 통의동 인수위 기자실은 잠시 술렁였다.
김 대변인은 "국제정치학 박사로 대학과 정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신 외교안보 전문가"라며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와 국가비상기획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대통령 대외기획전략관을 역임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김 교수는 강한 군대를 통한 튼튼한 안보와 한·미 동맹 복원, 대북정책 개선을 우선하고, 국익을 무엇보다 앞세워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해 왔다"며 "외교안보분과에서 역할을 맡아 윤석열 당선인의 상호주의와 실사구시 원칙에 입각한 남북문제 해결이 흔들림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정부와 논의를 진행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기대했다.
질의응답에서 한 출입기자는 "김 교수와 관련해 이명박(MB) 정부 시절 여러 논란이 있었다"고 질문했다. 김 대변인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라며 "알아보겠다"고 답했다. 이후 김태효 인수위원은 윤석열 정부 국가안보실 1차장이 됐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도 겸임하며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통일‧경제안보를 담당하게 됐다.
◆MB의 40대 '외교실세', 10년 만에 복귀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은 1967년 서울에서 출생해 마포고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코넬대 대학원 행정학 석사, 1997년 시카고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귀국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빙연구원,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 교수 등을 지내다 2005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도근시로 병역은 면제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캠프 자문 교수로 활동했고, 2008년 이명박(MB) 정부 인수위에 합류한 뒤 40대 초반의 나이로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 대외전략기획관(수석급)을 지내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4년 4개월간 MB의 외교·안보 핵심 참모로 활약했다.
한·미·일 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북 원칙론자로, MB 정부 대북정책 '비핵 개방 3000'을 입안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취임사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을 택한다면 남북 협력에 새 지평이 열릴 것"이라며 "국제사회와 협력해 10년 안에 북한 주민 소득이 3000달러에 이르도록 돕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취임사에서 밝힌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북한 경제와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계획을 준비하겠다"는 내용과 궤를 같이한다.
다만 '비핵 개방 3000'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북한은 '체제붕괴 후 흡수통일' 시도로 이를 받아들였고, MB 정부 5년은 두 번의 핵실험, 천안함 폭침(2010년 3월)과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등 북한의 연이은 도발과 우리 정부의 대응으로 남북관계는 몸살을 앓았다.
김 차장은 2011년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전제로 한 대북 비밀접촉 당시 협상 담당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 국방위원회는 대변인을 통해 "5월 9일부터 북남 비밀접촉을 가졌다. 남측 접촉 당사자인 통일부 김천식 통일정책실장, 국가정보원 홍창화 국장, 청와대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이라고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특히 북측은 "남측이 정상회담을 제의하면서 돈 봉투를 내놓고 천안함·연평도 사건 사과와 관련해 애걸, 구걸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사자들은 이를 부인했다.
김 차장이 외교정책을 주도한 MB정부 때 한·미 관계는 '동반자 단계'에서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격상됐다. 한·미 사거리 지침에 따라 300㎞로 제한됐던 탄도미사일 최대 사거리를 800㎞로 연장하는 것도 그가 주도했다.
그러나 미국 일변도의 외교 기조로 한·중 관계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한·일 관계는 원만했지만 김 차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 MB가 2012년 8월 10일 현직 대통령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면서 급격히 악화됐다.
MB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김 차장은 2012년 7월 '한·일 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 밀실 강행처리 논란이 커지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당시 청와대는 지소미아 체결에 따른 국민 여론 역풍을 피하기 위해 국무회의 비공개 의결과 주무부처(국방부→외교부) 변경 등을 지시했고, 그 중심에 김 차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그는 2012년 총선과 대선 당시 MB 정부가 국가정보원, 국군사이버사령부를 동원해 저지른 '댓글공작'에도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공교롭게도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인 2017년 조사를 받았다.
검찰 조사 결과 군형법상 정치관여, 대통령기록물법·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법원은 '정치관여 범행에 관여는 했지만 본질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기밀문서 유출 혐의는 유죄로 판단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2심에서도 정치관여 무죄, 기밀문서 유출 벌금 300만원 선고유예 결정이 났다. 검찰과 김 차장 모두 이에 불복해 현재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윤 대통령과의 관계는
김 차장과 윤석열 대통령의 관계는 우선 서초 아크로비스타 '이웃사촌'으로 알려졌다. 김 차장과 김일범 의전비서관(전 SK그룹 수펙스추구협의회 부사장)은 윤 대통령과 함께 일하기 전부터 아파트 목욕탕, 지하 마트 등에서 서로 마주친 적이 있다는 후문이다.
'검찰가족' 인연도 있다는 평가다. 2001년 별세한 김 차장의 선친 김경회 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본부장을 역임한 검찰 고위 간부였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의 외압에 버티며 1986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수사를 맡아 문귀동 전 경장의 구속을 관철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수사해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 구속을 주도한 검사로 이름 높다. 1994년 검사로 임용된 윤 대통령과의 인연은 불분명하지만, 윤 대통령이 존경할 만한 '선배 검사'다.
김 차장과 윤 대통령을 연결해주는 핵심 고리는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다. 김 실장은 윤 대통령과 서울 대광초 동창으로 윤 대통령의 외교 '과외 교사'로 불린다. 윤 대통령은 당선 다음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첫 전화통화를 김 실장 개인의 휴대폰으로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 차장과 김 실장은 2000년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로 있을 때부터 함께 호흡을 맞췄다. MB 정부 시절 김 차장은 청와대 기획관, 김 실장은 외교부 차관으로 재직했다. 두 사람 모두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보수우파 성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