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 전쟁, 암호화폐 시대 앞당기나

2022-04-02 05:00
전쟁 터지자 러시아-우크라이나 모두 암호화폐 '급부상'
대러 제재에 달러패권 균열…CBDC 등 디지털 금융 채택 촉진되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상자산(암호화폐)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전례 없는 금융제재가 부메랑이 돼 달러 패권을 흔들자, 무법지대에 있는 암호화폐가 급부상하는 모습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월드리포트'는 전쟁 기간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주요 암호화폐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에서 전례 없는 중요 역할을 하면서 디지털 자산의 채택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전쟁 터지자 러시아-우크라이나 모두 암호화폐로 달려가

암호화폐 비트코인 [사진=로이터·연합뉴스]

현재 암호화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에는 달러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통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이 격화하자 수백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은 현금을 인출해, 조국을 떠나 이웃 국가로 향했다. 이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계엄령을 내려 외환뿐만 아니라 자국 통화로의 현금 인출을 제한했고, 우크라이나 국민 다수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암호화폐는 다르다. 국경 없는 결제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정부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블록체인 관련 회사인 엘리펀트머니의 설립자인 토니 퍼킨스는 피란길에서도 "암호화폐를 통해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친구나 가족에게 자금을 즉시 보낼 수 있다"고 US뉴스&월드리포트에 말했다. 

또한 암호화폐는 우크라이나를 돕는 온정의 손길이 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전 세계 사람들은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암호화폐로 성금을 보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를 통해 60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이는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암호화폐 산업을 위한 법적 틀을 만드는 법안에 서명한 이유다. 

중요한 점은 러시아에서도 우크라이나와 비슷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서방의 대러 제재에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고 러시아 증권 시장의 거래가 중단되자, 러시아인들에게 암호화폐는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떠올랐다.  

더구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러시아를 배제하는 등 서방의 강력한 금융제재는 러시아를 국제 결제 시장에서 고립시키는 효과를 낳았고, 이로 인해 달러 패권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달러화를 많이 보유하는 것이 국가 경제의 안정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국제 결제 시장에서 배제된 러시아는 달러화를 대체할 다른 수단을 찾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특히 석유와 가스 거래에서 서방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제 수단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실제 CNBC는 러시아가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대금으로 비트코인을 수용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파벨 자발니 러시아 하원 에너지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보다 유연한 지불 방식을 취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에너지 대금 결제에서 위안화, 리라화, 루블화를 비롯해 "비트코인 거래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블록웨어 솔루션스의 애널리스트인 조 버넷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비트코인의 검열 저항 특성을 부각시켰다"며 "좋든 나쁘든 두 나라 모두 세계의 어떤 힘도 개입할 수 없는 비트코인으로 자금을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퍼킨슨은 지금과 같은 상황은 "각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위해 준비자산 일부를 암호화폐로 보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암호화폐, CBDC 등 디지털 금융 채택 촉진되나

지난 2월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민들이 현금자동인출기(ATM)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다. 이날 러시아 각지에서는 루블화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달러화 인출이 잇따랐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이번 대러 제재가 러시아를 옴짝달싹 못하게 꽁꽁 묶자, 일부 국가들을 중심으로 달러화 패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러시아와 인도는 루피-루블 결제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유 결제 통화로 위안화를 검토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도들이 달러 패권을 흔들며, 디지털 통화 도입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타 고피너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는 지난 3월 30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대러 제재가 국제 통화시스템을 분열시키며, 개별 국가 간 무역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 통화 블록의 출현을 촉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피너스 부총재는 세계 무역 시장에서 달러 외 통화의 사용이 확대되면 중앙은행의 준비자산이 한층 다양해질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이번 전쟁이 암호화폐, 스테이블코인 및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등 디지털 금융의 채택을 촉진할 것이라고 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CEO인 래리 핑크 역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국제 거래의 결제수단으로서 디지털 통화가 부상할 것으로 전망했다. 

래리 핑크 CEO는 최근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전쟁으로 인해 세계 각국이 화폐 의존성을 재평가하게 됐다며 "신중하게 설계된 글로벌 디지털 결제 시스템은 자금 세탁과 부패의 위험을 줄이면서 국제 결제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밝혔다.

달러화 패권이 흔들리면서 ‘디지털 달러화’(CBDC) 논의가 급속도로 이뤄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CBDC는 민간 암호화폐와 달리 중앙은행이 공신력을 담보하기 때문에 법정화폐로 취급된다. 앞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지난 1월 '디지털 달러화'의 장단점을 설명한 백서를 발간하고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도입 논의에 착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