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경제심서] 선진 경제? 단기 수익보다 중장기 국가 경쟁력 키우라
2022-02-10 14:17
필자는 취재 기자 시절인 1992년에 경제기획원(기획원)을 담당했다. 1961년 7월 발족해 경제개발을 주도해온 기획원은 말 그대로 경제의 사령탑이었다. 부총리급 장관에 예산, 경제기획, 물가 관리, 정책조정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부처가 가진 힘도 힘이었지만 국가 경제의 장기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부서이어서 그런지 관리들의 사고가 자유분방한 점이 특징이었다. 취재차 만난 한 관리는 지금 기준에서 생각해보면 깜짝 놀랄 만한 아이디어를 툭 던졌다. “은행들이 기업의 주인이 되게 하면 어떨까요?” 독일이나 일본처럼 기업의 대주주를 금융기관으로 바꾸는 방안에 대해 타진해보는 정도의 말이었다. 물론 기업의 주인을 인위적으로 교체하는 ‘극약처방’은 공론화되지는 않았지만, 정책의 시선에 거의 제한이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 이런 파격적 생각이 관리들 입에서 수시로 거론됐던 게 그 시절의 분위기였다.
당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던 시절이어서 경제 정책은 긴 호흡을 가지고 펼쳐졌다. 물가 급등 등 단기 현안에 대한 대응도 추진됐지만, 무엇보다 5년 단위의 중장기 정책이 중시됐다. 그 실행의 힘은 예산 배정에 있었다. 경제기획국에서 짜는 5개년 계획안에 들어간 정책에는 예산국이 예산을 배정했다. 미래를 내다보고 개척하는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게 하는 체제였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저서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이때를 회고하며 “5개년 계획에 반영되지 않은 사업은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5개년 계획서는 작성 후에도 캐비닛에서 잠자는 신세에서 벗어나 계속 참고하는 문서가 되었다”고 증언한다.
지난 시간을 다시 소환한 것은 5개년 계획 같은 제도를 재도입하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경제는 이미 세계 10위권인 데다 민간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과거의 국가자본주의 방식은 몸에 맞지 않는 게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단기 현안 중심으로 정책이 가동되면서 국가 경제의 장기가치를 키우는 전략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김영삼 정부 시절 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경경제원(재경원)을 만든 게 패착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끔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하지만 미래의 꿈을 꾸는 기획원과 금융 등 현안 중심의 치밀한 현장형 사고를 하는 재무부의 ‘한 집 살림’은 그 진로가 예상됐다. 장기 비전에 대한 단기적 사고의 승리였다. 이후 경제 정책은 고용, 물가, 환율 등 급하게 대처해야 할 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산업구조, 잠재성장률, 과학기술 등 미래의 핵심 성장동력을 키우는 일에는 방점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발등의 불로 떨어진 이슈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1994년 12월에 통합부처로 탄생한 재경원은 이후 잇따른 정부조직 개편으로 간판을 재정경제부로 바꿔 달은 데 이어 현재의 기획재정부(기재부)에 이르고 있다. 재경원이 가지고 있던 예산 기능은 국민의정부 당시 기획예산처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기재부가 품게 된다. 이와 관련, 짚어볼 점은 기재부 같은 ‘대(大)부처’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평가이다. 사실 기재부는 과거 재경원의 부활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오재록 전주대 교수는 기재부는 세제, 예산, 정책조정 등 ‘경제 3권’을 보장받음으로써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중앙행정기관 위에 군림했던 옛 재경원을 쏙 빼닮았다고 말하고 있다. 기재부 같은 대부처는 장관의 기능적 책임이 지나치게 넓은 데다 이질적인 업무가 집중돼 관리가 어렵고 다른 부처의 발언권이 대폭 축소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워낙 많은 현안 앞에 장기 정책이 들어설 자리가 협소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3월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이 정부조직 개편의 방향에 대해 부분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예산편성 권한을 기재부에서 분리하는 데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후보는 팬데믹 국면에서 재정 투입에 대한 기재부의 태도에 비판적인 데다 대부처인 기재부가 갖는 문제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짧은 의견만은 밝힌 상태이다. 정부 조직을 수술대에 올리는 두 후보의 의견은 앞으로 구체화할 전망이다.
주지하다시피 국가 경제의 경쟁력은 단기 응급대응에서 나오지 않는다. 체질을 강화하는 중장기 정책에서 발원한다. 상대적으로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미국이 다시 산업정책 수립에 나서고 중국이 장기적 일관성을 가지고 경제를 운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정치 이슈이면서도 경제적 중요도가 높은 이슈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바로 대통령 단임 문제이다. 장기집권을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지만 이제는 국가 경제가 장기적 청사진 아래 운용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느 정부가 됐든 ‘5년 단막극’으로 끝나는 정부가 차기나 차차기 정부가 책임질 일에 힘을 쏟아붓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면 대통령 임기는 줄이되 연임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선진 경제권에서 대통령이나 수상의 임기를 단 1회로 묶어두는 경직적인 제도를 운용하는 나라가 있는가. 장기적 경제 개혁조치로 유럽 경제의 맹주이자 제조업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있는 독일. 총리의 임기를 보면 헬무트 콜과 앙겔라 메르켈이 각각 16년, 콘라트 아데나워 14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8년, 헬무트 슈미트 7년 등이다.
<제언 요약>
요즘 글로벌 경제 핫이슈 중 하나는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이다. ESG가 기업에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경영의 초점을 단기 수익 극대화에서 중장기 가치 제고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렌즈로 경제 정책을 들여다보면 같은 맥락의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국가 경제의 중장기 경쟁력을 키우거나 구조를 견실하게 다지는 정책들이 단기 현안에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장기 정책을 꾸준하게 밀고 나갈 제도가 미비한 데다 대통령 임기도 5년 단임인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중요한 점은 국가 경제의 경쟁력은 단기 응급대응에서 나오지 않고 체질을 강화하는 중장기 정책에서 발원한다는 데 있다. 대선을 계기로 정부조직 개편 논의가 공론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과제를 해결하는 데도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예산과 중장기 계획 기능을 통합해 멀리 내다보는 정책에도 힘을 실어주고 다른 나라의 경우처럼 대통령도 중임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방안이 심도 있게 검토돼야 한다. 국가도 기업도 중장기 체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게 성숙한 선진경제로 가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