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 칼럼] 30대 임원과 70대 인턴이 '베프'되는 사회
2022-01-18 06:00
영화 인턴. 열정적인 30세 CEO가 70세의 ‘어르신 인턴’을 고용한 뒤 펼쳐지는 따뜻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입지(立志)의 나이인 30세 CEO 줄스 오스틴은 인터넷 의류업체인 ‘어바웃더피트’를 창업한 지 불과 1년 반 만에 직원 220명이 일하는 중견기업으로 키운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다. 사업에 여유가 생긴 오스틴은 사회공헌 차원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인턴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이 기회를 잡은 사람은 전화번호부 회사의 임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70세의 벤 휘태커. 오스틴은 처음에는 고희(古稀)의 휘태커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경험과 관록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베프’가 된다. 휘태커는 상사인 오스틴에게 삶과 경영에 대해 귀중한 조언을 해주는 멘토 역할을 하게 된다. 40년 차이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나이가 큰 문제 되지 않는 미국에서는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연공서열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픽션’으로 느껴지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2021년 말 한국의 대기업. 임원 인사가 이어졌다. ‘별’이 뜨고 지는 연례적인 시기이지만 예년과는 다른 파격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임원진이 크게 젊어졌다. 50대나 돼야 넘볼 수 있던 부사장 자리에 40대가 기용되고, 30대 상무들도 탄생했다. 40대 신규 임원은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심지어 40대를 사장으로, 그리고 30대를 부사장으로 올린 기업도 나왔다(SK하이닉스). 한 금융회사에서는 50세(만 49세)가 넘으면 아예 임원 대상에서 배제되는 ‘50세 룰’이 거론되기도 했다. 나이를 고려하지 않는 임원 인사가 이뤄지면서 다단계 직급도 단순화됐다. CJ그룹은 상무대우부터 사장까지 6개로 나뉘어 있던 임원 직급을 ‘경영 리더’로 통일했다. 삼성전자는 부사장·전무를 부사장으로, 현대차그룹은 이사대우·이사·상무를 상무로, 그리고 SK그룹은 상무·전무·부사장을 부사장으로 통합했다.
기업들이 이같이 인사 혁신에 나선 것은 무엇보다 나이가 중요한 문화에서 가위 눌려온 젊은 인재들이 실력만으로 임원진에 합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다. 조직의 활력을 부추기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나이가 많고 일한 기간이 길다고 해서 임원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기업 전반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효과도 노린 것으로 보인다. 팬데믹의 장기화로 경영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경영의 발 빠른 포석을 해나가려면 새바람을 불어넣는 이런 조치가 불가피했을 것이라는 점에 공감이 간다.
다음으로 젊은 임원의 등장이 선배들의 퇴직 러시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 연공서열을 무너뜨린 것은 다양한 나이의 임직원들이 한데 섞여 일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직급 호칭을 없애는 대신 ‘~님’이나 영어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연령 혼합’의 근무 분위기를 가져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문제는 직장 밖 사회는 연공서열이 여전한 문화라는 데 있다. 밖에 나가면 후배인데 직장에서는 상사로 모셔야 하는 일이 충분히 어색할 수 있다. 이에 적응하는 분위기는 기업마다 다른 것 같다. 한 기업의 간부는 “이젠 어린 임원과 같이 일하는 게 그다지 이슈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대기업의 간부는 “이번 인사에서 젊은 임원이 상사가 돼 아무래도 짐을 싸야 할 것 같다”고 불안해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30·40대 임원이 나왔다고 해서 50대가 집에 가야 하는 상황은 기업 스스로 나서서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연령층이 조화로운 협업 체제를 이루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100세 시대로 일컬어지는 고령 사회에서 조기 퇴직이 잇따르면 개인은 물론 기업과 국가에도 손실이 적지 않다. 50대는 지식과 경험이 쌓여 통찰력과 지혜의 ‘진액’이 나오기 시작하는 경력의 정점이다.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다. 그런데 이들을 ‘노후 자산’으로 분류해 ‘상각(퇴출)’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 ‘인턴’처럼 젊은 상사의 경험 부족을 노련한 중년 또는 고령의 하급자가 메워줄 수 있다. 더구나 정년 연장까지 논의되는 마당에 50대가 등 떠밀려서 직장에서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50대는 노후로 가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50대가 튼튼하게 서야 ‘준비 안 된 노후’라는 사회적 걱정거리도 완화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런 상황에서 연령 피라미드 아래쪽의 청년 구직자에게도 좋지 않은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취업으로 가는 ‘큰길’이었던 대기업 공채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10대 그룹 가운데 공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삼성, 포스코, 신세계 등 3개로 줄어들었다. 나머지 7개 그룹은 아예 공채를 없애고 수시 채용으로 전환했다. 이 같은 추세는 금융권 등 다른 산업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취업포털 인쿠르트가 최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지난해 대기업 채용 방식 중 대졸 정기 공채는 29.4%에 불과했다. 지난 2018년 61.0%에 비해 31.6%포인트나 낮아졌다. 이에 비해 수시 공채 비중은 같은 기간에 18.0%에서 58.8%로 상승했다. 3년 사이에 대기업 채용 방식의 주류가 뒤바뀐 것이다. 기업은 나름대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외부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인력 수요가 있을 때마다 채용해서 바로 쓸 수 있는, 경력을 가진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젊은 임원의 등장이 직장인 연령 피라미드의 위쪽인 50대를 줄이고, 공채 폐지가 아래쪽인 청년 일자리를 줄이는 쪽으로 작용한다면 이는 한국 경제라는 숲에 먹구름을 드리울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기업의 활력과 경쟁력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지키는 데 기업이 한몫을 해준다면, 그 역할 또한 중요하게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본다. 정부도 이번 기회에 일자리 창출에 많이 기여하는 기업일수록 금융이나 세제 등에서 다양한 혜택을 주는 인센티브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