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중앙은행들, 약한 인플레이션 핑계로 금리 인상 미룰까
2022-01-05 17:59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40년래 가장 높은 수준의 물가 상승률에 대응하기 위해 코로나 시기에 도입한 부양책을 거둬들이고, 기준금리를 인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가운데 세계의 여러 국가들도 이에 대응해 금리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낮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세)과 경기 부양 필요성을 이유로 기준금리 인상을 적어도 2분기 이후로 미룰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전 세계적인 공급망 차질과 높은 에너지 가격 등으로 인해 지난 11월 미국의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물가 상승률은 1982년 이후 최고 수준인 6.8%까지 상승했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물가에 미국 연준은 자산매입축소(테이퍼링)를 가속하고, 기준금리를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같은 신흥국들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금리 인상에 앞서 기준금리를 높이며 자국의 달러가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자국 통화 가치를 보호한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들이 아직 코로나로 인한 경제 침체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가운데, 지난해 물가 상승률 역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들 국가들의 기준금리 인상이 미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블룸버그는 지난 3일(이하 현지시간) 스리 물랴니 안드라와티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해 인도네시아의 인플레이션이 통제된 상태를 유지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올해 인플레이션에 대해서는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그는 "특히 식품과 상품의 가격 상승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인도네시아 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식품·음료·담배 가격은 2020년 12월 대비 3.09% 상승했다. 그러나 12월 물가 상승률은 18개월래 최고치를 기록했음에도 여전히 지난해 대비 1.87% 상승하는데 그치며 중앙은행 목표치 2~4%를 밑돌았다.
관광업에 크게 의존하는 태국 역시 인플레이션보다는 경제 회복에 힘쓰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태국 중앙은행은 5일 발표한 12월 통화정책위원회 회의록을 통해 국내 인플레이션이 △2021년 1.2% △2022년 1.7% △2023년 1.4%를 기록해 중앙은행의 목표치 내에 머무를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세계 공급망 차질로 인해 물가가 상승할 수 있지만 2022년 하반기부터는 다시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대신 오미크론 변이 등으로 인해 경제 회복과 관련한 불확실성이 높아진만큼 기준금리는 현행 0.5%로 동결하겠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중앙은행 역시 지난 11월 기준금리를 동결하며 예상보다 약한 세계 경제 성장률과 공급망 혼란 악화, 코로나 신규 변이 우려로 인한 봉쇄 조치 등을 우려하며 경제 회복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31일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은 11월 물가 상승률이 지난해 대비 3.3% 상승했다고 밝혔지만 지난해 11월 3일 기준 말레이시아의 평균 물가상승률이 2.3% 수준에 머무른만큼 인플레이션은 큰 우려 요인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경제전문매체 말레이시안리저브(TMR)는 5일 리 흥 기에 말레이시아 사회경제연구센터(SERC) 연구팀 이사를 인용해 올해 하반기 기준금리 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리 이사는 "경제 성장과 인플레이션 위험에 따라 시기가 바뀔 수 있겠지만 하반기에 금리가 인상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한편,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수출 호조가 경제 회복을 이끌어 예상보다 빠른 기준금리 인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12월 14일 아시아개발은행(ADB)은 동남아 국가들이 전반적인 규제를 완화하고 경제 활동을 되살릴 것으로 전망하며 올해 동남아 경제성장률이 5.1%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코로나로 인해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공장이 문을 닫았던 지난해 전망치 3%보다 높은 수준이다.
닛케이아시아는 4일 수출 증가로 인한 경제 회복은 동남아시아 중앙은행들이 긴축 정책으로 돌아서도록 부추길 수 있지만, 오미크론 변이 확산 등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동남아 주요 국가들 중 일부에서 수출은 급증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수출은 지난해 10월 월간 기록을 경신한 뒤 11월에는 1122억 링깃(약 32조309억원)까지 늘며 지난해 대비 32% 증가했다고 밝혔다. 특히 전체 무역의 약 40%를 차지하는 전기·전자 제품 수출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웡 슈 하이 말레이시아 반도체산업협회 회장은 올해 반도체 분야의 수출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싱가포르 수출 역시 지난해 11월 지난해 대비 24.2% 증가하며 약 10년래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싱가포르대화은행(UOB)은 올해 경제회복세에 힘 입어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태국에서 금리 인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닛케이아시아는 오미크론 변이 확산 등으로 봉쇄 조치가 재개된다면 관광 산업의 회복이 늦어져 수출 증가의 효과를 상쇄해 통화 정책 시나리오는 뒤집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