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학교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학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임병식 칼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2021-12-06 06:30
20대 청년들과의 대화는 항상 기발하고 신선하다. 청년 세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한다. 지난주 강의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강의에 앞서 한국형 탐사보도의 전형을 다루기 위해 영화 <1987>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 한 편을 놓고도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구나 생각할 만큼 제각각이었다. 그 가운데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들은 그 시대 국민들에게 부끄러워하고 배워야 한다”는 말에서 순간 멈칫했다. 부연하자면 이렇다. 엄혹했던 시절에도 수많은 이들은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했는데 오늘날은 물리적 억압이 사라졌음에도 오로지 이익을 좇아 맹목적 편들기에 연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덧 무감각해진 우리 세대에게 주는 날카로운 힐난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과장되지도 틀리지 않았다. 청년들 눈에 우리는 어느덧 치열함을 상실한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했다. 군사정권 아래에서 당시 국민들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억압당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은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향한 치열한 여정이었다. 그 와중에 서울대 학생 박종철 군이 숨지는 사건이 터졌다. 영화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실화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법 감금된 박종철은 물고문 도중 숨졌다. 1987년 1월 14일이었다. 사건 초기 경찰은 “탁 치니 억하고 숨졌다”며 단순 쇼크사로 축소한 채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탁 치니 억’하고 죽은 게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한 타살이었다. 경찰은 음습한 고문실에서 22살 청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세상과 단절된 은밀한 곳에서 진행된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물고문 정황을 처음 언론에 흘린 의사 오연상, 증거를 없애기 위해 화장을 종용하는 경찰에 맞서 부검을 관철시킨 검사 최환, 고문 경찰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린 재야 정치인 이부영과 김정남, 이를 교도소 밖으로 전한 교도관 안유와 한병용, 고문 가담자를 5명이라고 폭로한 천주교 신부 김승훈, 최초 보도한 중앙일보 기자 신성호, 1년 넘게 보도를 이어간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과 황호택, 황열헌이 그들이다.
경험하지 않았으니 공감 영역 또한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20대 초반 학생들은 <1987>을 통해 1980년대 국민과 오늘날 국민을 비교하며 핵심 메시지를 건져 올렸다. “지금 국민들은 1980년대 국민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은 내내 머리를 맴돌았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벌이는 저급한 대립과 맹목적인 지지를 보노라면 한층 그렇다. 지금 민주당은 1980년 민주당에서 멀어졌다. 한때 민주당을 지지했던 많은 이들은 지금 민주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당이 아니라며 등 돌리고 있다. 불의한 국가권력에 맞섰던 민주당이 아니라 기득권에 눈감고 타협하면서 정체성을 잃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북대학교 명예교수 강준만은 ‘부족공동체’로 규정하며 비판했다. 그는 민주당이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집단이라기보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부족공동체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익을 나누는 이익공동체라는 뜻이다. 이재명 후보가 민주당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강변하는 이들은 이런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그들조차 이재명이 선명해서가 아니라 정권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다며 모순된 논리를 펼친다. 그들이 내세우는 정권 유지는 곧 기득권 연장을 뜻한다.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한 것으로, 이익공동체의 일부임을 자인한 것과 다르지 않다. 지난 4년 반 동안 민주당이 보인 행태 또한 연장선상에 있다.
<1987>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가족들 생각하세요.” 영화에서 결론은 그들의 선택이 역사를 바꾸었다. 모두가 망설일 때 누군가는 앞장서 길을 열었다. 그들 덕분에 역사는 조금씩 진전해 왔고, 오늘 우리는 그 결과물을 향유하고 있다. 역사에 빚지지 않은 이는 없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확인했듯 고비 고비마다 목숨을 건 선택이 쌓이고 쌓여 오늘을 만들었다. 40여 년이란 세월의 강을 건너 지금 우리는 제대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민주당은 집권 초기 “야당 복 있다”며 반겼다. 민주당 입장에서 지리멸렬한 야당은 다행이었는지 모르지만 여당복은커녕 야당 복마저 없는 국민들은 우울하다.
80년대 국민들은 모든 것을 억압당한 상황에서도 바른 선택을 위해 치열하게 행동했다. 반면 지금 우리는 모든 자유를 누리면서도 합리적 판단을 유예한 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건 아닌지 자괴감이 든다. “이재명은 민주당을 대표하기엔 지나치게 흠결이 많다”는 여론이 표심을 좌우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국민의힘과 윤석열이 대안이 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고민은 깊다. 최선이 아닌 차선,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국민들에게 20대 대선은 악몽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실체적 위협에 맞섰던 80년대를 떠올리면서 절망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