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느림보' 바이든, 파월 유임결정 왜 이제 내렸나요
2021-11-23 10:11
바이든 대통령이 장고 끝에 내년 2월 임기가 만료되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68)의 유임을 결정했다.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는 연준의장은 중장기 시계의 통화정책 연속성 측면에서 한 차례 연임이 관례였다. 게다가 공화당 출신이지만 중도성향인 파월 의장은 정치권과 월가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어 그의 유임은 두세달 전부터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각종 국정수행에서 ‘결정 느림보’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은 파월의 재지명을 계속 미루어 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심각한 민주당 내 내분 때문이었다. 민주당 내 중도파 인사들은 금융권 규제 완화에 호의적인 친(親)시장 성향의 파월을 지지했지만 진보파는 자신들의 ‘복심’인 레이얼 브레이너드 연준 이사(59)를 지지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악화 등 경제문제로 인해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하자 연준의장 교체 카드를 통한 분위기 쇄신을 몇달이나 저울질해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바이든의 최종 선택은 보다 ‘안전한 선택지' 파월의 연임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은행규제와 기후변화 대응에 소극적이라며 파월 의장의 재지명을 반대해온 진보파 의원을 달래기 위해 브레이너드 이사를 은행감독 담당 연준 부의장에 지명했다. 그는 "파월의장과 브레이너드 이사가 저인플레이션과 물가안정을 유지하고 완전고용을 실현하는 데 집중해서 우리 경제를 전보다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미국 경제는 향후 재닛 옐런 재무부장관과 파월 의장이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진두지휘하고 브레이너드는 월가의 금융산업 규제와 감독 업무를 사실상 총괄하는 체제로 움직일 예정이다. 큰 틀에서 파월 의장과 하버드대 경제학박사 출신인 브레이너드 이사의 경기 판단과 통화정책 방향은 비슷하다. 다만 브레이너드 이사가 파월 의장보다 더 비둘기파적이며 금융규제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사람 모두 옐런 재무장관과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재무부와 연준 간 긴밀한 정책 공조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형은행의 기후변화 리스크에 대한 대응,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개발 그리고 은행의 자본확충 문제에 있어서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온 브레이너드의 영향력이 주목된다. 특히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 추후 시중은행의 돈줄을 죈다면 브레이너드의 역할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는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조정관의 부인이기도 하다.
파월 의장은 상원의 인준 절차가 남았지만 다수의 공화당 의원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어 통과는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파월 의장은 전임자인 재닛 옐런, 벤 버냉키, 앨런 그린스펀처럼 저명한 경제학자 출신이 아니다. 정치학과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 출신으로 월가의 투자은행과 사모펀드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1992년엔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금융기관과 국채시장 담당 재무부 차관을 지냈고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에는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의회에 국가 부채한도 상향을 촉구하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파월이 공화당 인사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연준이사로 지명했다. 파월은 온건하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활발한 소통과 끈끈한 팀워크로 조직을 이끄는 그의 특출한 능력으로 '컨센서스 빌더(consensus-builder)' 또는 '문제 해결사(problem-solver)라는 찬사를 받아왔다. 2014년 오바마 대통령은 물가보다 성장과 고용을 중시하는 '비둘기파'의 대표적 인물인 옐런을 여성 최초로 연준의장에 임명했다. 연준의장은 1회 연임이 가능하지만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과 환율과 금리 정책뿐 아니라 금융시장 규제 문제에서 엇박자를 내던 옐런의 재지명을 거부하고 파월을 신임 의장으로 지명한다. 옐런은 파월에게 의장직을 물려줄 때까지 연준에서 6년을 함께했다. 파월은 옐런이 지휘하는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적인 연준 내에서 큰 불협화음 없이 손발을 맞춰 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옐런의 후임자로 관례처럼 굳어졌던 경제학자 등용 카드를 버리고 파월을 선택한 몇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규제완화를 주장해온 트럼프 경제라인 및 월가의 금융기관들이 선호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연준의 수장에 오른 파월은 전임자 옐런의 '점진적 금리정상화' 조치에 따라 금리를 올려갔다. 트럼프는 여러 차례 파월에게 배신감을 토로하며 그를 해고하겠다고 위협하며 금리인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파월은 대통령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연준의 독립성을 지켜냈다. 트럼프의 연준 길들이기와 경기 둔화 흐름 속에 파월은 2019년 하반기부터 금리를 내렸다. 그러다가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로 미 경제가 전례없는 위기에 빠지자 제대로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연준은 금리를 '제로'수준으로 내리고 사상최대 규모의 국채매입에 나서는 등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적극적이고 신속한 지원사격에 나섰고, 이때 경제학자들과 월가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연준은 도드-프랭크법의 일부로 은행의 무책임한 투자를 막기 위해 도입된 '볼커룰'을 크게 완화하는 개정안을 발표한다. 개정안은 은행들이 계열사 간 파생상품 거래 시 증거금을 쌓도록 한 규정을 삭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런 조치는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 중 가장 큰 승리로 꼽히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자신을 지명해 준 트럼프에 대한 파월의 보답 '선물'로 볼 수 있다. 개정안은 민주당 내 진보파 인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비틀거리던 월가는 환호했다. 지난해 12월에는 팬데믹 위기로 금지된 대형은행들의 자사주 매입을 다시 허용하기도 했다.
파월 연임 불가론을 펼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비롯한 일부 민주당 진보파 인사들은 그의 코로나19 사태 대응 공적은 인정하면서도, 금융권 규제 완화에 호의적인 친(親)시장 성향을 문제삼았다. 이들은 위험도가 높은 투자를 제약하는 볼커룰을 수정하는 등 규제 완화 조치가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대응으로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이 대폭 풀려있는 만큼 향후 금융시장 안정과 건전성 회복을 위해선 금융권 규제 강화 작업의 적임자를 차기 의장으로 지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준은 미국의 중앙은행으로 통화정책과 함께 은행감독 업무를 겸하고 있다. 유동성을 늘리는 방법으로 정부 국채를 발행하거나 기준금리를 내리는 것 외에도 은행권 규제를 풀어 대출을 용이하게 만들 수 있다.
월가는 그의 연임을 환호하고 있지만 그의 추후 4년은 녹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사태로 풀린 막대한 유동성으로 초인플레이션 위협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딘 일자리 회복도 문제이지만 물가 안정이 최우선 과제로 꼽히고 있다. 일단 연준은 이달 말부터 나랏돈으로 사들이던 국공채를 줄이는 이른바 '테이퍼링'을 시작한다. 8개월 후 채권매입을 통한 통화확대정책이 끝나면 고용 등 경제상황을 감안해 금리인상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년에도 물가상승 속도가 심상치 않으면 금리 인상은 예상보다 빨리 진행될 수 있다. 연준이 너무 성급하게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하면 세계 경기는 급속히 가라앉을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국제 금융시장의 자금도 선진국으로 이동하면서 빚더미에 오른 일부 신흥국들은 부도 위기에 처할 가능성도 대두된다.
바이든 행정부나 연준의 고민은 미국 경제 회복 속도가 예상보다 더디고 당초 일시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단정했던 물가 상승 추세가 장기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의 소비자 물가는 6개월 연속 5% 이상 상승률을 기록했다.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무려 6.2%나 올랐다. 1990년 11월(6.3%) 이후 31년 만의 최대 상승 폭이다. 11월에는 7%에 육박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연준이 통제력을 상실하면 1970~80년대 '거대 인플레이션(great inflation)' 시대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 그동안 "아직 금리를 올릴 때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파월 의장에게 거친 파고가 몰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