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大기획, 우리말 성자 류영모(4.끝)] ‘한글신학’ 다석 가상인터뷰
2021-10-08 18:17
[빈섬 이상국의 뷰] 저녁의 참사람 류영모 “우리말엔 하늘의 계시가 있다”
다석 류영모(1890~1981) 선생이 펼친 생각들의 꾸러미를 ‘정음사상(正音思想)’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신앙을 ‘정음교’로 불러달라는 당부까지 했던 그의 삶은, 올곧고 올바른 소리를 찾아나선 여정이었다. 그는 세종이 만든 한글의 첫 명칭이 훈민정음이었다는 점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천지의 백성들을 일깨우는 하늘의 바른 소리라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우리말글이 영성언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말글에 하늘의 계시가 있다는 근거로, 한글 모음이 · (하늘) ㅡ(땅) ㅣ(사람)를 가리키는 형태로 고안되었다는 점을 든다. 이 천지인(天地人) 사상은, 우리 겨레의 고유 경전으로 추정되는 천부경(天符經)의 근본사상이기도 하다.
2021년 10월 9일, 575돌 한글날을 맞아 ‘한글성자’ 다석 류영모를 가상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박한 한복 차림으로 낡은 가방을 들고 서울 구기동 산장(山莊)에서 광화문 근처 아주경제까지 걸어서 온 그는, 마스크를 조심스레 벗고는 활력이 넘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담(對談)에 임했다.
얼과 한얼
- 먼 길 걸어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다석사상과 관련해, 이것저것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말씀 중에, 자연스럽게 선생이 제시하신 신학의 '한글 열쇠말'들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런 질문부터 해볼까요? 대체 신은 무엇입니까.
- 단도직입적인 물음이군요. 좋습니다. 저는 신을 ‘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말의 얼은, 인간이 생명을 영위하는 몸의 측면을 제외했을 때 남는 것입니다. 몸의 측면의 모두를 물질세계에 따르는 물성(物性)이라고 본다면, 그 물성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물성과 함께 하는 어떤 것이 얼입니다. 영성(靈性)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서구에선 이것을 성령(聖靈)이라고 표현해왔습니다. 신과 성령이 일체이긴 하나, 둘로 나눠 구분하는 개념이 서구 사상에는 있어 왔습니다. 신은 상대세계에서는 실존할 수 없는 대상이기에, 성령이라는 형식으로 인간에게 관계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신의 말씀이라는 개념으로도 쓰입니다.
- 얼이 신이라면, 인간 내부에 신이 들어와 있다는 말씀입니까.
-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 내부에 들어와 있는 얼은, ‘신의 씨앗’이지만 잘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씨앗은 바로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분령(分靈)’이라 할 수 있는 얼을 깃들게 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시한 것입니다. 저는 인간 속의 얼과 신의 본령인 얼이 같은 것이지만, 구분해서 생각하기 위해 ’한얼‘이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신은 ’한얼‘이며, 인간 ’얼‘의 아버지라 할 수 있습니다.
몸신(神)은 죽었다
- 선생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신은 존재합니까.
-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들이 매우 오랫동안 치열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왜 이토록 신의 존재에 대해 추궁을 했느냐 하면, 신에 대해 잘못된 관점을 가졌거나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보았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신을 ’얼‘로만 보았다면 그 존재를 따지는 일에 그토록 맹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신의 물질성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서구의 로고스적인 사유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격신(人格神)을 염두에 두어 온 게 사실입니다. 무엇인가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니체가 인간이성과 문명이 이제 신을 극복했다는 차원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가 고백한 것은 ’신‘에게 투사한 인격신적인 이미지입니다. 죽음이 있다면 삶이 있었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신을 생물체로 보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몸신(神)은 죽었다'고 말한 셈입니다. 신은 세상을 창조한 ’얼‘이기에 생사가 있을 리 없고, 존재로 증명될 수도 없습니다.
없신(神)여김, 없이 계심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 우리 말에 업신여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없는 것처럼 깔본다는 말인데, 이 말을 곱씹어 보면, 신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없신(神) 여김‘이 바로, 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닮아 있지요. 노벨상까지 받았던 테레사수녀가 ’신의 존재를 내내 의심했다‘는 고백을 해놓은 일기가 사후에 발견되었지요. 신에게 물질세계의 어떤 자취나 낌새를 기대하다 보니, 독실한 그분조차도 믿음의 깊이를 철저하게 유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 아닐지요. 저는 저 ’얼‘의 본령은, 이 상대세계에서 당연히 없으며 그 없음이 지닌 양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없이 계신다‘는 바로 그 말입니다. 상대세계에서는 없으며, 절대세계에선 계신다는 말입니다. 차원이 다르니, 다른 차원을 이곳의 차원으로 잴 수 없지만, 고차원의 영성으로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노자는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풀 수 있겠지만, 저는 유(有, 상대세계의 물성)가 없으면 즉 없이 계시면, 절대세계인 무(無)의 사이로 드나들 수 있다고 풉니다. 이게 뭡니까. 바로 얼과 신이 넘나드는 방식입니다.
말씀
- 고차원의 영성으로 존재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 성경을 우리 말로 풀면 ’말씀‘이 됩니다. 말씀은 말을 높인 말이니 성(聖)이고, 신의 말을 받아 써놓은 것이니 경(經)입니다. 말씀이라는 말은, 놀라운 말입니다. 절대세계의 신이 상대세계의 인간에게 던져놓은 말입니다. 이 귀중한 말을 인간이 받아쓰는 것이 ’말씀‘입니다. 신의 뜻을 알아채는 것, 신과 소통하는 것, 한얼과 인간 얼삶이 서로 접속하고 교신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얼의 소통법이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빈탕한데
- 절대세계라고 말씀하시는 그 곳은 어디입니까. 천국입니까. 신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 저는 ’빈탕한데‘를 신의 주소라고 말했습니다. 빈탕은 비어있는 곳입니다. 허공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빈 자리와는 다른 개념이기에 ’빈탕‘이란 말을 만들었습니다. ’한데‘는 바깥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한 곳‘이란 의미로 같은 장소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 바깥은 바로 태양계의 바깥입니다. 우리는 태양계 속에서 지배를 받으며 낮을 삽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태양계 너머에서 오는 별빛을 만납니다. 그때 우린 우주인이 됩니다. 저를 ’저녁의 참사람‘이라고 부르던데, ’저녁‘을 중시한 까닭은 저 우주인이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저녁은, ’저쪽‘이라는 뜻을 가진 ’저녘‘에서 나온 말이기도 합니다. ’저쪽‘은 바로, 별이 떠있는 곳, 은하계 저편을 말합니다. 우리가 맨눈으로 우주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저녁‘ 시간입니다. 태양계 인간이 그 바깥으로 눈을 돌려 바라볼 수 있는 저 텅빈 먼 곳이 바로 ’빈탕한데‘입니다. 저는 이곳을 우리가 상대세계에서 생각하는 허공의 개념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빈탕한데와, 우리 속에 있는 ’얼‘의 빔이 서로 통하는 ’단일허공‘이라고 여깁니다. 신은 그 허공 자체이며, 노자에서 말하는 골짜기의 신(谷神)이기도 합니다.
졔계
- 그러니까, 태양계 너머 우주에 신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 그렇습니다. 저는 그곳을 ’졔계‘라고 부릅니다. 이것도 우리 말입니다. 여기는 ’예‘라 하고 저기는 ’졔‘라 하고 거기는 ’계‘라 합니다. 여기와 저기는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는 가까운 곳이고 저기는 먼 곳입니다. 천체는 밤에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곳까지가 ’졔‘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저쪽은 뭐라고 해야할까요. 머리 속에서 생각을 더 벋어나가 ’거기‘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계’입니다. 그러니까 ‘졔계’는, 눈에 보이는 먼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이게 바로 신의 주소이며 빈탕한데입니다.
몸 짐승, 하루살이
- 얼이 그토록 중요하면, 현실 속에서의 몸은 무엇입니까.
몸은 얼에 걸친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얼만 있다가 몸을 거치고 다시 몸을 벗어 얼만 남게 되는 과정이 생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몸 또한 귀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신이 준 생명을 살아가는 사형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몸은 건강하게 잘 간직하다가 반납하는 것입니다. 사실 몸은 짐승이 지닌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이것을 탐진치로 규정을 했지요. 탐(貪)은 먹는 욕망이고, 진(瞋)은 싸우는 욕망이고, 치(痴)는 성적인 욕망입니다. 이 세 가지의 질긴 욕망이 자리잡아 인간을 ’짐승‘으로 살게 합니다. 그렇다고 이 욕망을 모두 없앨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내 속의 짐승을 잘 제어하여, 겨우 살아가도록 하는 게 최선입니다. 몸을 조심히 그리고 성히 잘 지녀야 얼삶을 사는 바탕을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사형수라는 생각을 하고, 하루하루의 시간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하루살이 사상이며 하루 한끼의 뜻이기도 합니다.
스승 예수, 몸죽얼삶
- 예수는 어떤 존재입니까.
- 예수는 ’한얼의 아들‘입니다. 인간의 몸을 지닌 신의 아들이기에 인자(人子)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그도 몸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육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는 높은 십자가에 매달린 공개적인 죽음으로, 육신은 죽는다는 것과 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인간의 큰 스승입니다. 가야할 길을 제시한 분이기에 큰 스승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초인(超人)이라는 믿음은 대개 그를 오해한 관점입니다. 그는 초인이어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잇는 ’얼의 접속‘을 실현해 보여주었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예수의 기적이나 부활 같은 스토리들은, 예수를 위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고통스럽게 내던지며 알려준 복음을 오해하게 합니다. 신은 사형수와 같은 인간육신을 구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참 기적은 오직 ’얼의 기적‘입니다. 몸죽얼삶(몸이 죽어 얼이 영원한 삶을 얻음)의 길을 생생하게 보여준 그 장면이 바로 기적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처럼, 얼의 기적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형틀일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예수처럼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얼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는, 신의 메시지를 알린 천하효자이며 우리는 가장 높은 가치의 효를 실천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너는 나다
- 죽음은 대체 무엇입니까.
- 우리가 신을 믿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죽음이 인간 삶의 종착지이며 그 이후엔 아무 것도 없이 벽에 부딪쳐 소멸된다는 생각이, 스스로의 생이 지닌 가치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듭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깃든 얼과 빈탕의 한얼이 마침내 차원을 극복하고 만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질긴 나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저는 이것을 파사(破私, 나를 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를 깨서 마침내 한얼에 다다르는 것이기에 ’깨달음‘이라고도 일컫습니다. 우리 생은 그 깨달음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신이 예수에게 말한 메시지를 ’너는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DNA를 지닌 인간이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인자(人子)를 바라보겠습니까. 그토록 아끼던 자식을 품에 안는 부모같은 신을 상봉하는 일, 그것이 참 죽음입니다. 죽음은 이 ’참‘을 실현하기 위한 생명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함부로 살 수도 없고 함부로 죽을 수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삶에도 죽음에도 신의 사랑이 늘 임재(臨在)하기 때문입니다. ’얼삶‘이 더 큰 삶이라는 걸 잊지 않기를.
모름지기, 옳음오름
- 마지막 질문이 되겠네요. 다석선생에게 우리 말글은 무엇입니까.
- 한글과 우리말은 가장 깊이있고 통찰력있는 영성의 개념들을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언어입니다. 제가 수많은 시조와 시편들을 한글로 써서 남긴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부지(我不知)라고 쓰면, ’나는 신을 모릅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이 됩니다. 그 모름을 모름으로 지키는 것을 저는 ’모름지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에 대해 섣부른 짐작으로 믿고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태도로, 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모름지기‘ 정신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오름은 ’옳음‘의 결과입니다.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바로 하늘로 솟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우리 말글에는, 심오한 이치가 깃들 수 있는 여지와 깊이가 있습니다. 신은 우리 말글에 이미 숨쉬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저녁에 저녘을 바라보며 나는 늘 신과 우리말로 대화를 하였습니다.
류영모 선생은 문득, 오래전 한글날을 맞아 '한글의 아들'을 자부했던 기억(1958년 10월10일 다석일지, 한글성자 류영모 시리즈 2편 참조)를 떠올렸을까. 63년 뒤인 2021년에 맞는 한글날에 대해 감회가 담겨있는 눈빛이었다. 광화문 이마빌딩의 신문사를 나서면서, '말(馬)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이마(利馬)'라는 건물 간판을 한참 쳐다보았다.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저 말이 내 말(言)을 만나니, 아마도 말씀(天音)을 이롭게 하는 언론이 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