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행] 빌딩숲 서울에서 찾은 운치…성북동 한옥이 들려주는 이야기

2021-07-14 06:00

"서울에 가볼 만한 곳을 좀 추천해줄래?" 꽤 오랜 기간 여행기자로 활동했지만, 혹자가 조언을 구해온다면 마땅히 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하루 24시간 중 12시간 이상을 서울에서 생활하지만, 서울은 아직 낯설다.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는 곳이 때론 더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멀리 떠날 수도 없는 요즘, 생경한 서울과 친해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발걸음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학인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성북구의 한옥으로 향한다. 무더운 여름도, 코로나 우울도 날릴 수 있는 당일치기 여행지라 더 좋다. 천천히 걸으며 역사 문화적 이해도까지 높일 수 있는 '서울도보해설관광'도 운영한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이를 활용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산수국이 핀 최수우옛집 뒤뜰. 이곳에 쉼터 공간은 방문객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사진=서울관광재단 제공]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공간 '최순우옛집'

첫 번째 목적지는 최순우옛집(서울시 등록문화재 제268호)이다. 이곳은 미술사학자이자 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인 혜곡 최순우가 말년을 보냈던 공간이다. 대표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도 이곳에서 집필했다.

이후에 집이 헐릴 뻔한 위기를 맞았지만, 김홍남 이화여대 교수가 시민 후원금을 모아 집을 지켰고, 그 덕에 최순우옛집은 시민이 지켜낸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1호가 됐다. 후원자 명단은 후원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는 외벽 풍경에 고스란히 담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재직하는 동안 유물 수집과 보존 처리, 연구, 인재 양성에 힘을 쏟은 혜곡은 1950년대 말부터 일본, 유럽, 미국 등을 순회하며 우리 문화재 알리기에 앞장섰다. 

혜곡이 살뜰히 가꾸었던 옛집 곳곳에는 그의 유품과 친필 원고, 문화·예술인들이 보낸 연하장 등이 전시돼 있다.

혜곡이 "창살의 비례가 아름답고, 무척 정갈하다"고 극찬했던 안채의 용(用)자 창살, 그리고 혜곡이 애정을 쏟은 식물들은 꼭 눈여겨보길 바란다. 

혜곡은 맘에 드는 나무나 꽃이 있으면 뜰에 옮겨와 심었다고 한다. 식물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지금도 가옥의 앞뜰과 뒤뜰에는 소나무, 대나무, 산사나무, 산수국, 모란, 수련 등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길상사 경내에 공덕주 김영한의 사당과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서울관광재단 제공]

◆종교를 초월한 도심 속 안식처 '길상사'

성북구에는 놀라운 곳이 또 있다. 바로 '길상사'다. 보고 또 봐도 이런 공간이 서울에 있다는 것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길상사 일주문을 통과한 후 마주하는 절 마당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 청량하다. 삼각산 남쪽 자락의 숲과 계곡이 절 안에 오롯이 들어앉은 느낌,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계곡 상류 비탈에는 오두막 같은 건물이 늘어서 있다. 바로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으로, 길상사가 개원하기 전 대원각에서 사용했었다. 성북동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어떻게 '길상사'라는 사찰로 탈바꿈하게 됐을까.

1987년 대원각 주인 김영한이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에 감동한 덕이다. 김영한은 대원각 대지 7000평과 건물 40여동을 절 짓는 데 시주하겠다고 밝혔다. 

1995년 법정 스님은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고, 2년 후인 1997년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길상사 창건일에 대원각 주인 김영한은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불명을 받았다. "내 유해는 길상사에 뿌려달라"던 김영한의 유언도 이뤄졌다. 눈 내리는 날, 그의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다. 법정 스님도 2010년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길상사는 대원각 시절 건물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한다. 설법전 앞의 관음보살상은 마치 천주교의 마리아상을 연상케 한다. 법정 스님이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의뢰해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수연산방은 1900년대 개량한옥으로서 건물 한 채에 사랑채와 안채가 함께 지어져 있다. 오른쪽 누마루가 사랑방 역할을 했다. [사진=서울관광재단 제공]

​◆일제강점기 문인들의 사랑방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선구자인 상허 이태준의 성북동 자택은 이미 서울의 명소로 이름이 났다. 이태준 가옥은 몰라도 '수연산방'은 대부분 안다. 이곳은 이태준이 월북하기 전인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한 건물에 배치한 1900년대 개량한옥이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을 두었다.

수연산방(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은 '여러 사람이 모여 산속의 집에서 책 읽고 공부한다'는 뜻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수연산방은 문인들의 사랑방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상허는 김기림, 정지용, 이효석, 박태원, 김유영 등과 구인회를 조직하고 수연산방에서 시와 문학을 논했다. 

상허는 '달밤', '복덕방', '돌다리', '밤길', '화관' 등 100여편에 이르는 작품을 집필했다. 이 작품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월북작가의 작품이 해금된 1988년에 이르러서다. 

수연산방은 1998년부터 찻집으로 운영 중이다. 건넌방과 튓마루, 안방과 누마루를 다실로 사용한다. 누마루는 앞뜰 풍경을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 오롯이 만끽할 수 있어 찻집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수연산방의 여름철 대표 메뉴는 단호박 빙수와 오미자차다.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냈던 심우장의 단출한 모습. 만해는 방에 불을 지피지 않고 냉방에서 생활했다. [사진=서울관광재단 제공]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 만해 한용운 '심우장'

만해 한용운 선생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심우장'(사적 제550호)도 이곳 성북동에 있다. 1933년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성북동 골짜기에 지은 집으로, '심우'(尋牛)는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유래했다. '심우장'(尋牛莊)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썼다.  ​현판은 만해가 서재로 사용했던 온돌방에 걸렸다. 

비좁고 가파른 골목을 한참 오른 후에야 보이는 심우장. 낮은 철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마당에 북향으로 지은 근대한옥 한 채와 관리소가 눈에 띈다. 우리는 "만해는 조선총독부를 마주 보기 싫어서 일부러 산비탈 북향 터에 집을 지었다"고 익히 알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사실무근"이라고도 얘기한다. 

심우장은 온돌방, 대청, 부엌 등 단출한 구조로 지어졌다. 이곳 심우장에는 만해의 친필 원고, 유품, 연구 논문집, 서화, 초상화, 옥중 공판 기록 등에서 만해의 독립운동 활동상과 애국지사들과의 교류 현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29세에 불가에 입문한 만해는 입적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쳤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훈련장을 순방하며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돼 3년 동안 옥살이하기도 했다.

만해는 "조선 땅이 감옥인데 방에서 편히 지낼 수 없다"며 늘 냉방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토록 독립을 염원했던 그는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중풍과 영양실조로 심우장에서 숨졌다. 그가 떠나고, 심우장에 살던 그의 외동딸 한영숙씨가 심우장을 만해사상연구회에 기증했다.

수령 1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와 만해가 심은 향나무, 한영숙씨가 심은 잣나무가 심우장과 함께한다. 사철 푸른 세 나무의 기개는 마치 일제의 끈질긴 협박과 회유에도 변절하지 않았던 만해를 닮은 듯하다. 소나무와 향나무는 성북구 보호수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