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 칼럼] 30대 보수당 대표, 그의 5년 후가 궁금하다
2021-06-13 19:52
- 기대와 우려, 그래도 이준석을 환영하는 이유
제1야당 국민의힘이 ‘30대 대표’ 시대를 맞았다. 국회의원 한번 된 적 없는 이준석이, 그렇게도 변할줄 모른다는 소리를 들어왔던 보수정당의 대표가 된 것은 정치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준석 대표의 등장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양가적이거나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이준석 대표’는 민심이 앞장서서 이끌어낸 결과이다. 당심에서는 여전히 나경원을 앞서지 못했음에도 대표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해준 민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야 불문하고 낡은 기득권 정치에 식상할 대로 식상한 민심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원했고, 그 흐름을 타고 부상한 것이 이준석이었다.
그러니 이준석의 등장은 민심이 갈망하던 ‘새로움’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고, 야당을 넘어 한국정치에 세대교체의 흐름을 낳는 일대 전기가 될 수 있다. 이준석 개인에 대한 평가의 차이를 넘어, 우리는 이 정치사적 흐름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 새로운 흐름에 이준석이 최적임자인가에 대한 판단은 더 지켜보고 내려야 할 일이지만, 일단 ‘이준석 대표’의 등장 자체는 긍정적이다. 설혹 실패로 끝나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새롭게 해보려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시민의 올바른 상식일 것이다. 그것은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들조차도 이준석 돌풍에 놀라며 환영의 덕담을 쏟아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 흐름이 갖는 의미를 읽어내면서도 이준석 대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속내가 그리 단순할 수 없는 건 그가 가져올 ‘효과’와 ‘위험’ 사이에서의 저울질 때문일 것이다. 위험이라 함은 어떤 위험을 의미하는가. 먼저 이준석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반페미니즘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남성들이 당하는 역차별을 강조하고 여성할당제의 폐지를 공약하는 그의 모습은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거부한다는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정치권 등 일부에서만 적용되고 있는 여성할당제를 거론하며 ‘이대남’들의 착시를 조장하는 이준석은 남녀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고 그에 편승해 인기를 얻는 ‘젠더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준석은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젠더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으며 여성들을 자극하지 않는 영리함을 발휘했다. 단지 ‘치고 빠지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이제 주목과 기대를 받는 야당 대표가 된 이상, 젠더 갈등을 조정해내고 양성평등이라는 상생의 길을 만들어가는 정치인으로 거듭나기를 주문하게 된다. 남성으로서의 경험만을 절대화하여 여성들의 삶에 무지한 야당 대표가 정권교체를 호소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다음으로 이준석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능력주의’라는 것이다. 대표 수락연설에서도 그는 토론 배틀을 통한 대변인 선출, 고위공직 후보자 자격시험 얘기를 했다. 그가 반복해서 말하는 ‘공정한 경쟁’은 ‘불공정한 경쟁’보다는 분명 나은 대안이지만, 경쟁에서 열패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낙오자들에게는 절망의 덫이 될 수도 있다. “정치인의 책무는 그 어떤 시민도 그 시험에서 낙오하지 않게 하는 것임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는 정의당 장혜영의 말에 이준석은 ‘잊지 않고 있음’을 답할 책임이 따른다. 사실 이준석의 대북관도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책을 통해 “통일의 방법이 체제 우위를 통한 흡수통일 외에 어떤 방법이 있겠나”라고 물으면서 ”흡수통일이란 북한 체제를 지우는 것이고 북한과 타협할 일은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외교라는 것에 대한 식견 없이, 감정으로만 나라의 앞길을 말한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당내 정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리더로서의 비전이라는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이준석 대표가 지고 가야 할 리스크는 이렇듯 한두 개가 아니다.
이준석에 대한 평가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에 대한 평가가 어려운 것은 기존의 정치인들처럼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페니즘적 발언을 쏟아내며 당 대표가 된 그는 이제는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것이 개인의 개성을 꺾어버리는 폭력”임을 말하고 있고, 최고위원 4명 가운데 3명이 여성임에도 지명직 최고위원에 외부 여성을 기용할 것이라고 밝힌다. 어느 것이 진심인지 더 지켜볼 도리밖에 없다. 공존을 말하며 누구보다 개방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이준석이지만 극우 정치인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흡수통일’을 주장한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못한 정치인이라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정형화된 것이 없는 정치를 지향하는 새로운 콘셉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그 판단조차도 우리의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준석의 등장에는 층위가 다른 여러 성격들의 것이 혼재되어 있기에 하나의 잣대로만 평가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 언제나 정해져 있는 정치인들의 말에 대해, 정해져 있는 잣대로 판단해오던 우리에게는 낯선 상대임에 분명하다. 그러기에 이준석은 ‘모’가 될 수도 ‘도’가 될 수도 있는 시험대에 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움을 상징하는 야당 대표로서 인정받는 데 성공한다면, 이준석은 5년 후에는 40대 초반의 대통령후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30대 대표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다면, ‘반짝 인기’로 끝나게 될 이준석 돌풍은 우리 정치의 세대교체를 오히려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아직은 안갯속에 싸인 이준석의 길이지만, 그가 했던 대표 수락 연설의 내용은 반가웠던 것이 사실이다. 흔히 나올 법한, “제가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겠습니다”, “제가 정권교체의 견인차가 될 것입니다”, 그런 구호의 외침없이, 그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공존과 개인의 개성’에 대해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정당 대표의 연설에서 듣는 ‘개인의 개성’ 얘기라니, 사실은 그것이 진보의 집단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보수의 화두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해오던 내게는, 이준석이 그것을 알아차렸나 하는 궁금증이 문득 들었다. 물론 그런 정치철학적 문제에 관심있는 보수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 싶다만 말이다.
이준석 돌풍 현상에 대한 찬사만 늘어놓다가는 혹여 나중에 무슨 망신이라도 당하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이 글도 그래서 생겨나는 균형의 필요성을 의식하며 쓴 것일 게다. 그래도 보수정당의 대표 선출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가졌던 일이 평생 처음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준석 효과를 이미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화면에서 이준석 옆에만 서면 다들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니, 그런 피부에 와 닿는 효과가 어디 더 있을까 싶다. 그러니 온갖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단 지금은 ‘30대 이준석 대표’의 탄생을 환영하게 되는 시간이다. 여기서 ‘일단’이라는 조건어를 빼는 것은 이준석의 몫이다.
유창선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 박사 ▷한림대 외래교수 ▷경희사이버대 외래교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