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문인수 시인 시 13편, 그를 보낸 날 몰아 읽어보며
2021-06-08 17:11
21세기 비범한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문인수 시인이 7일 별세했다.(향년 76세)
시인 한 분이 돌아간 것이 아니라, 한국 시가 지녔던 광채의 조도(照度)가 낮아졌다고 할 만큼, 치명적인 상실을 겪은 날이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문인수를 대신할 문인수는 없다는 절망감이다. 그간, 읽었던 빼어난 시 13편과 그 소감과 단평들을 모아서 정리해본다.
경운기는 어떻게 우는가
그 집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었다./할아버지, 점심 때 집에 왔으나 할머니가 아직 오지 않아/대강 챙겨 자시고 다시 부지런히/경운기 몰고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아랫마을 갔다가 부랴부랴 집에 와 보니 에고, 이 양반/맹물에 밥 말아 그냥/밥 떠 넣고 장 떠 넣고 한 눈치. 할머니 못내 속이 상해서/쯧, 쯧, 평소처럼 일 거들 요량으로 한참 걸어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 와락 달려들어 영감! 영감님을 얼싸안아 일으켰으나/119 구급차가 도착했을 땐 이미/숨을 거두어 묻은 흙 묻은 손.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 기분이 좋구만."/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이 말/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장면, 별사가 따로 있다.
무쇠팔 경운기 모는 소리도/먼 길 소실점처럼 이랴, 이랴…… 멀어져간다.
'경운기 소리'(문인수)
■ 칼같은 기승전결이 묘하게 사람을 사로잡는다. 경운기 몰고 나가 일하시다가 점심 먹으러 들어왔는데 외출한 할머니가 아직 귀가하지 않아 혼자 밥을 차려먹은 할아버지. '기'는 참 평범한 일상이다. 무슨 얘길 하려 저러시나 하는 기분으로 만나는 도입부다.
'승'은 '기' 상황을 몰고 간다. 로미오 줄리엣처럼 이번엔 할머니가 돌아와서 보니, 영감님이 혼자 점심 드시고 다시 일하러 나가셨다. 아이고. 미안하고 안타까워 서둘러 할아버지 계신 밭으로 일 거들러 나간다. 둘이 사는 촌로부부지만 그래도 정겹고 아름답다. TV '여섯시 내 고향'쯤에서 보이는 얼굴들이 아닌가. 여기까지였다면 리포터의 수다 몇 줄 듣고 돌아가면 될 일이다.
반전이다. 예고도 하지 않고 바로 급진전되는 바람에 더욱 놀랍다. 할머니가 바로 쓰러진 할아버지를 얼싸안아 일으키는 장면이다. 구급차가 왔을 땐 숨을 거뒀다. '전'의 상황이 되면, 아까 점심 못 차려준 일이 얼마나 애통해졌는지 느껴진다. 혹여 그것이 저승길을 재촉했는지 할머니의 자책 또한 글자 밑에서 한스럽게 뚝뚝 떨어져 나온다.
'결'은 또 하나의 반전으로 아리는 마음을 더욱 키운다. 아침에 노부부가 나눈 대화이다.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린다고 할머니가 말해줬더니 "그래, 기분이 좋구만." 했던 그 말. 이제 경운기만 바라보면 그 말이 생각나고, 영감님이 눈물로 터져나올 판이 됐다. 그놈의 경운기가 영감님을 보내려고 그토록 시동이 잘 걸렸던가. 그 '소리'가 새삼 원망스럽다. 아니, 영감님이 세상 하직할 걸 부지불식간에 예감하면서 나더러 안심하라고 "그래, 기분이 좋구먼" 했던가. 그 소리 좋던 경운기를 소처럼 이랴 이랴 몰고 밭고랑 누비느라 저승 흙 파는 것인 줄도 몰랐던가.
문인수 시인은 아마도 시골의 어느 상가에 가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고, 저 할머니의 곡소리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를 읽었을 것이다.
상복을 입고 "그래, 기분이 좋구먼"의 할아버지 마지막 말씀을 되뇌며 눈물 쏟아내는 어수선한 별사를 시의 행간 속으로 쟁여넣었을 것이다. 사는 일, 혹은 그 뒤의 일. 이 일 말고 또 뭐가 있는가. 서울서는 들을 수도 없는 경운기 소리가, 한번에 드르륵 시동 걸린 그 소리가 귀에 자꾸 들린다.
비 맞는 전문가가 쉬고 있다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앞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식당의자'(문인수) 중에서
■ 거지가 거지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은, 경계를 넘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쥐고있는 것들을 놓아버리는 경계.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걸 살아있을 때 놓아버린 자의 고요. 드디어 희망이나 내일이 간섭하지 않는 그 경계. 문인수는 개처럼 뛰어다니던 생이, 문득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 고요히 쉬는, 완전한 휴가를 발견한다. 의자에게는 한 평생 '필요'가 그의 자랑이었지만 실은 그 '필요'가 그를 목줄 달아 끌고 다녔다. 필요없는 몸이 되니 비 맞아도 젖은 게 아니다. 우린 죽기 전에 이런 폐품의 상태가 필요한 게 아니던가?
막 죽은 문어, 제 몸을 다 만져본다
포항 공동어시장 구판장 비닐 좌판 위에 이제 막 죽은 문어 두 마리가 잘 펴져있다 而而/雨雨, 길게 빠져나가는 슬픔은 이제 뉘 몫인지.
한 마리. 아직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놈 제 몸이 현재시각 무엇인지 급히, 그러나 참 느리게 한 군데도 빠뜨리지 않고 다 만져본다.(......)
'앞과 뒤'(문인수) 중에서
■ '내리막의 눈'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 산을 오를 땐 대개 바라보는 눈 앞에 산꼭대기와 하늘이 보이지만, 내려올 땐 저 아래 산자락과 바닥이 보인다. 저 섬뜩하고 불유쾌한 죽음과 익숙해지는 과정이 그 내리막의 눈이 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 예민한 시인의 감관은 저렇듯 그 수업의 교보재를 곳곳에서 끌어온다. 문인수는 막 죽은 문어 두 마리다. 축 처진 형상 而而 거품을 품는 雨雨.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 다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을 시인은 숨을 멈추고 들여다본다. 꿈틀거리는 것, 제 몸에 대한 내무검사같은 것이다. '제 몸이 현재시각 무엇인지 급히, 그러나 참 느리게' 이 문장에 담긴 생사의 경계와 긴박한 생의 최종호출. 그게 끝나면 이제 건조과정이 시작되리라. 건조과정, 이 건조한 말이 이토록 마음을 사무치게 한다. 내 가슴 속에 말라가는 당신의 기억까지, 마지막 습기를 내주는 문어 한 마리의 희미한 꿈틀거림.
향기가 죽인다, 마지막으로 번지는 영혼의 반경
악취는 가련하다./썩은 생선 대가리며 삶은 고양이, 녹슨 쇠사슬 … 무두질의 어둠이 어둑, 어둑, 더러운 거리를 절일 때 한 떨기!/자두 파는 어여쁜 소녀가 지나간다./향기가 "죽인다."/저 장미 백만 송이를 따 끓여낸 영롱한 눈물 한 방울의 고요,/이것이 향수다. 마지막으로 번지는 영혼의 반경이여
'코'(문인수) 중에서 -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장편소설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에 꿰어져 나는 한동안 버둥거렸다. 인간은 화장실에서 5분만 있어도 지속되는 냄새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지는, 둔한 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 소설 속의 남자는 광장에 뒤엉킨 인간과 사물의 냄새를 미분하고 적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냄새들을 분리하고 재구성하여 그 냄새를 만들어낸 행위와 장소와 상황까지 유추해낼 수 있는 기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녔다. 정액 냄새를 분석하여 성관계의 양상과 시간까지 알아낼 수 있다. 작가 김영하는 말했다. "'향수'는 구원이 아니라 냄새를 키워드로 다시 쓴 신약성서다." 그르누이에게서 풍겼던 성스러움과 악마성의 기묘한 결합은 바로 저 신약성서의 패러디에서 온 것이었다. '후각적 예수'. 그르누이를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적실한 말은 없을 것 같다.
흉금이란 노후해도 영롱하게 글썽이는 것
피아노 속이 환한가, 때로 궁금하다. 지금/콩나물 대가리가 다시 수북하게 자란 저녁일까./아이들이 자라 스무살이 훨씬 넘는 동안 또 몇 년/뚜껑 한번 열린 적 없었을 것이다/무겁게 내려앉은 피아노는 저도 컴컴한 헌집이다./문턱처럼 걸린 불화와 저녁노을처럼 걸린 쓸쓸한 날들,/묻지 마라. 어두워진 것처럼 꽉 다문 입, 속은 구린내 나겠지만/흉금이란 노후에도 노후해도 썩지 않고 영롱하게 글썽이는 것.(......)
'낡은 피아노의 봄밤'(문인수) 중에서
■ 우리 집에도 그런 피아노가 있었다. 굳이 몇백만원 짜리 피아노를 산 것은, 아내의 로망에 헌정하기 위해서였다. 아이 셋이 초등학교를 지나오는 동안, 피아노 건반 위에는 세 아이의 손이 번갈아 지나갔다. 살이가 각박해진 아내는, 먼지가 쌓여가는 피아노를 자기자신처럼 생각했다. 먼지가 쌓여가는 피아노같은 아내. "좁은 거실에 저거 필요 있을까"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아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피아노가 굳이 필요의 문제냐고 묻는다. 가끔 피아노 아래에 엎드리거나 누워 나는, 아이들의 발이 닿았다 지나간 피아노의 발을 만지작거린다. 첫날밤 잡았던 아내의 작은 발처럼 매끄러운 그 발을.
오줌발 그 길고 긴 뜨신 끈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구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쉬' (문인수) 중에서
■ 어느 신문에서 노인요양원에 대한 심층취재 기사를 냈는데, 치매 걸린 70대 할머니의 이야기가 마음을 아리게 했다. 그녀의 기저귀를 남자 요양보호사가 갈아주는 바람에 수치심을 느껴 요양원을 나오게 된 사연이다. 노인을 보살피는 업체의 무신경을 비판하는 얘기였는데, 그보다도 인간의 존엄과 기품을 임종까지 유지하지 못하는 그 슬픈 현실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문인수는 그 굴욕의 몸을 안아주고 있는 어느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생을 해피엔딩으로 반전시켜준다. 오래전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렇게 했듯, 아버지의 오줌을 뉘어주는 아들. 부끄러운 아버지와 그 부끄러움을 걱정하는 아들 사이에서, 가벼운 몸이 쪼를쪼를 뿜어내는 몇 방울 오줌. 그걸 돋우기 위해, 오래전에 들었던 그 말, '쉬'를 자신도 모르게 흘려 내는 아들. 그 '쉬'의 바람소리를 따라 오줌보를 조금 더 풀어보는 아버지. 이 '쉬' 말고 우주 모두는 조용하라는 그 '쉬'.
인생이 있긴 있었나 싶다
내가 한쪽으로 기우뚱, 할 때가 있다./부음을 듣는 순간 더러 그렇다./그에게 내가 지긋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가 갑자기/밑돌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지금/오랜 세월 낡은 읍성 같다./"조금 전, 오후 다섯시에 운명했습니다."/2007년 1월19일./그의 이마 쪽 초록 머리카락 한줌,/염색이 아니라 섣달/시린 바람 아래 웬 생풀 나부끼는 것 같은 날.
도대체, 인생이 어디 있나,/있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
나 허물어지는 중에 장난치듯
한 죽음이 오히려 생생할 때 그렇다.
'오후 다섯시 - 고 박찬시인 영전에'(문인수)
■ 나도 박찬 시인을 알고 있다. 대학원에서 시를 공부하던 시절, 장충동의 삐걱이는 나무의자 한쪽에 그는 앉아 묵직한 팔을 내 어깨에 올렸다. 언론에서 밥을 먹는 선배였던 사람으로, 말 안해도 나를 알겠다는 듯이, 내가 시를 쓴다는 일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월매네 주막에서 흘린 막걸리가 번지는 내 기자수첩을 만지면서 그는 깊이 입자위를 파며 웃었다. 그 오후 다섯시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나 또한 나를 눌렀던 깊은 왼쪽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아마도 그날 영전에서 읽었을, 문인수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며 뒤늦게 울컥 한다. 이마 쪽 초록 머리카락 한 줌, 섣달 시린 남산 바람 아래 웬 생풀 나부끼는 것 같던, 그 이마 아래서 싱거운 농담 한 자락에 소년처럼 파안(破顔)하던 사람. 침 튀는 식은 파전 속에 부추 두어 가닥이 핏줄처럼 돋아있던 풍경까지도 어제처럼 생생하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를 지나갔을 오후 다섯시, 젓가락으로 든 안주처럼 괜히 목이 메이는 시. 살아있는 일이 나도 문득 어리둥절하다.
타즈마할 궁전에 널린 빨래
야므나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 집 빨랫줄 위로 옛날옛적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분홍 엷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니다.(......)
-- '인도소풍, 빨래궁전'(문인수) 중에서
■ 프랑스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간간이 보이는 집들이 어찌 저리 아름답고 깨끗한가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삶의 궁상이 엿보이지 않는 저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그들은 속속 들이 멋진 풍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비닐 조각 하나 날리지 않고, 낡은 건물에서 생겨나는 균열이나 누추함 따위도 없단 말인가.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선진국' 혹은 '고도의 문명국가'라는 말 속에 넣어둔채 그 풍경들을 지나갔습니다. 시인 문인수는 인도에서 타즈마할 궁전 부근의 빨래들을 눈부시게 바라봅니다. 옛 궁전은 죽음이어서 오히려 가볍고, 빨래는 삶이어서 무겁고 고단한 것을 봅니다. 인도는 굳이 낡고 초라한 옷가지를 숨기지 않고 궁전의 풍경과 함께 동거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시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낯짝 없는 사내더러 여자가 말했다
- 거, 앉아보소.
늙은 여자가 강물 물 가까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가진 채 엉거주춤 돌아온 사내더러 한 번 말했다. 꺼질 듯 낮게 말했다. 키가 껑충한 그래서 그런 건지 낯짝 안 보이는,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건지 낯짝 없는, 낯짝 없는 사내더러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오랜 세월, 장터거리에서 혼자 국밥집을 해왔다. 저녁노을 그 아래 시뻘겋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러나 쿨럭쿨럭 뒤엉키는 물, 지금은 다만 긴 강.
'앉아보소, 이수동 53.0/45.5cm, 1992' (문인수)
■ 문인수는 1945년생이며 영남일보사에서 일했다. 대구 산다. 이 시를 만난 뒤로 나는 문인수의 팬이 되었다. 이수동의 그림은 아마도 이 시를 만나기 전에 만났을 것이다. 문인수는 그림 속에서 대하소설같이 면면히 흐르는 시를 읽었다. 예술의 다른 장르가 경계를 허물며 넘나든다. '앉아보소'란 제목은 시를 깨운 키워드였을 것이다.
앉아보소. 이 말은 어린 시절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귀에 익었던 말이다. 그 청유에는 뭐가 그리 급할 게 있느냐, 좀 천천히 얘기를 해보자,는 속내가 숨어있다. 앉으소,가 아니라 앉아보소,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무릎을 굽혀 앉은 신체적 동작일 뿐 아니라, 뭔가 심상찮은 일에 대한 긴장을 눅이려는 숨돌림이 포함되어 있다. 문인수는 이걸 읽어낸 것이다. 이 한 마디로도 한 살이의 강물이 대하소설로 흐른다. 문인수의 상상력은 전원일기의 한 장면처럼 질박한 자리에서 감동을 생산한다. 현실을 물어내는 생생함이다. 앉으소의 명령이 앉아보소의 청유로 되는 뉘앙스에는 명령을 받는 사람의 의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서려있다. 그러나 남자는 서있다. 어디론가 다시 떠나버릴 듯 불안하다.
심수봉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의 그 기조정서는 바로 이 유목적인 삶을 살아온 이 나라 사내들의 무책임에 대한 원망이다.
여자는 단지 말한다. 앉아보소.
나와 같이 살자고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앉아서 차근차근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한번 이야기나 해보자는 것이다. 여자는 털썩 먼저 주저앉았다. 하지만 여자는 오래 전에 사내가 훌쩍 떠나버렸을 때부터 이미 주저앉아 국밥집을 해온 것이다. 국밥의 붉은 국물의 이미지는 노을타는 긴 강과 고통으로 매운 시간을 겹으로 뒤세우고 있다. 낯짝 안보이는 사내는 부끄러워 하고 있는 중일까. 그래도 삶의 원점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준 여자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는 중일까. 얼굴이 안보이는 것을 문인수는 면목없음에 잇고 있지만, 이수동은 관계의 낯짝인 페르소나를 잃어버린 사내의 허깨비같은 정체성을 표현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얼굴이 없고, 또 말이 없다. 그저 허공에 매달려 떠돌았던 지난 삶처럼 아직도 허공에 덩그라니 떠있는 것이다. 앉아있는 여자의 눈으로 보면 말이다.
앉아보소,에는 그 단 한 마디의 '발화'가 주는 무게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국밥집 여자의 평생을 건 꿈은 저 앉아보소에 묵직하게 매달린다. 이 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이 시는 무엇을 꿈꾸는 중일까. 국밥집 여자가 떠나버린 한 남자에 대해 견지해온 마음의 결고움이, 이 퉁명스런 재회에서 툭 던져지는 저 한 마디에 배어나온 걸, 이수동이, 그리고 문인수의 감수성이 낚아챈 것이다. 한 삶을 건 순정의 무표정한 한 마디, 앉아보소. 그래서 이 시는 다시 읽어도 코끝이 찡해진다. 몸빼바지 내 어머니의 굳은 살 속에 숨은 기막한 사랑이 한 찰나 전율한다.
뿔의 발견, 문인수와 김준태
인간이 가끔 뿔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건, 자신의 이마 어느 부위엔가 돋아있었을 뿔에 대한 무의식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일까. 뿔은 기묘한 긴장감을 주는 말이다.
돌들은 단단하고도 뾰족하게 밟힌다.
유심히 내려다보이는 돌들의 이마에는
터질듯한 긴장감이 있다.
적의의 뿔일까.
돌들을 하나씩 뒤집어본다
그 뺨엔 마를 날 없는 날짜들이 깊이 젖어있다.
슬픔으로 된 뿌리인 것 같다.
'뿔의 뿌리는 슬프다'(문인수)
■ 문인수시인의 이 시는 맨발로 들판을 걷던 이윤기선생을 떠오르게 한다. 한 존재에게 다가와 부딪는 신성한 물상의 감촉들. 돌을 밟고난 뒤의 문인수 또한 조르바가 되었다. 아야. 마치 발을 공격하는 적개심을 느끼고, 도대체 이 존재는 정체가 뭐야? 하는 기분으로 땅에 박힌 칼돌 하나를 집어든 조르바. 그런데 돌의 이마에서 느껴지던 그 당돌한 기운이, 돌이 박혀있던 아래쪽에는 없었고 오히려 마를 날 없었을 물기들이 축축했다. 한몸으로 된 뿔과 뿌리를 함께 만난 시인. 이제야 돌 하나의 2행시를 읽은 셈이다.
누군가를 받아치기 위해서
머리 꼭대기에 솟아있는 것은
아니리 나무숲, 우리의 갈 길을
찾기 위해 두리번 두리번거리는
달팽이뿔, 오 고은 살 안테나!
'달팽이뿔'(김준태)
■ 김준태시인은 말수가 적으면서도 이리 부드럽다. 달팽이에게도 뿔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시는 충분하다. 뿔이 지니고 있었던 '관성적인' 의미들을 달팽이가 여지없이 깨주기 때문이다. 성나고 뿔나서 머리 꼭대기에 단단하게 돋아있는 무엇이 아니라, 뼈도 없이 연약하기만 한 저 뿔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많은 뿔들이 그렇게 들이받고 우격다짐으로 진격을 해나갈 때, 이 물렁뿔은 그저 제 높이를 돋워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성질의 첨병이 아니라 혜안의 안테나가 되는 반전이 시를 상승시킨다. '고은 살 안테나'라는 멋진 한 마디가, 삼성 갤s6를 꺼내들고 '올뉴'를 외치던 어느 사장의 컨셉트보다 더 힘있고 쌈빡하다.
이 시를 읽으면서 '두리번 두리번거리는'이란 말이 갑자기 낯설고 황홀하게 꽂혔다.
도대체 이 말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어원을 찾아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도리반 도리반거리다'라는 작은 말이 세트로 있는 것을 보면 의태어같은데, 그 말의 처음을 짐작해기는 몹시 어렵다. 고심 끝에 찾아낸 단서는 '도리도리'였다. 도리도리가 고개를 양쪽으로 흔들어 돌리는 행동이니, 두리번/도리번의 뉘앙스와 닮았다. 두리두리와 도리도리는 고개를 흔드는 모습인데, '번'은 뭘까.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돌린다는 뜻으로 두리두리로 빨리 돌려버리는 게 아니라, 이쪽으로 두리번 하면서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저쪽으로 두리번 하면서 뜸을 들이는, 그 망설임의 동작을 표현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두리번 두리번거리는 행동의 핵심은, 단순히 고개를 돌리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있는 점에 있다. 고개만 돌리는 게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대상을 찾고 있는 동작이다. 두리번두리번은 시야를 넓히기 위해 목을 활용하고 있는 장면이며, 두리번의 '번'은 그 탐색의 안테나를 집중가동하는 바로 그 타이밍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달팽이눈이 그 뿔에 붙은 것이 얼마나 신통한가. 두리번 두리번하면서 뿔을 좌우로 움직이는 달팽이는, 형상은 감지못하지만 빛의 명암은 파악해낼 수 있다는, 그 작은 달팽이눈으로 넓은 숲에서 제가 가야할 길을 찾아내는 것이리라. 내 이마에 돋는 뿔도, 가끔은 이런 고성능 안테나여야 할텐데 말이다.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뇌성마비 중증 지체 언어장애인 마흔두 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트렸다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
-- '이것이 날개다'(문인수)
■ 척추장애였던 외가쪽 이모가 스스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는 "그제야 평생 허리 쭉 펴고 날아가더라"고 말했다. 중학생이던 동갑내기 이모아들과 나는 상황도 모르고 낄낄거렸다.
대학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은 강의에서, 조선시대가 지금보다 더 장애인 차별이 적었다고 말해 놀란 적이 있다. 그땐 장애인이라고 사회에서 격리하지 않았으며, 공동체 속에서 따돌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장애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장애 자체에도 있지만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과 태도와 행동들에 있다는 걸 그는 내내 강조했다. 심봉사도 마을에서 쫓겨나진 않았으며, 심청이의 젖동냥을 저마다 자기 일처럼 받아줬다. '장애'의 고통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유지하기 어려운 자신을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는 원천적인 조건에도 있지만, 사회의 격리와 무관심과 냉대가 낳는 2차 피해에 더 큰 고통이 있다는 얘기다.
시인 문인수는 마흔 두 살 중증장애인의 '젊은 초상집' 풍경을 눈시린 외계어 두 마디로 노출시킨다. 죽은 라정식의 상가에 앉은, 살아있는 장애인 이정은이 자원봉사자에게 건넨 말.
#@%, 0%.$&%ㅒ#@!$#*?(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밥알이 튀고 국물건더기가 사방에 흩어지면서 했을 저 말. 저보다 간절한 시의 몸체가 어디 있는가.
닳은 부처 앞에 찍은 내 독사진
어딜 멀리 갔다가 되돌아가는 길인가 보다.
인각사 돌부처 한 분이 천년 비바람에 많이 닳았다.
거의, 한 덩어리 바위에 가깝다.
그 앞에 찍은 내 독사진이 있다.
왕복 어디쯤서 만나 잠시 겹친 것일까, 들여다보니
둘 다 미완이다, 지쳐
돌아가는 길이 함께 적적, 막막할 뿐이다.
'미완이다'(문인수)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돌아가는 길'(문정희)
■ 마치 두 사람이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듯 '미완'이니 '완성'이니 품평을 하고 계신다. 결국 같은 말이겠지만, 관점은 다른 기분을 부르기도 한다.
경북 군위의 낡은 절 인각사에 서있는 불상은 눈도 코도 희미하다. 부처를 바위에 새긴 마음은, 바위를 바라보는 유정(有情)함이 그 형상을 꺼낸 것이다. 하지만 바위는 바위고 부처는 부처다. 바위가 부처일 수 없고 부처가 바위일 수도 없다. 부처가 잠깐 바위 시늉을 하거나 그 반대일 뿐이다. 바위에 새긴 부처의 형상이 사라진다고 애석해할 것도 없는 것이, 그건 원래 바위였기 때문이다.
바위에 새긴 부처는 무슨 말을 하는가. 바위를 보지말고 부처를 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속에 들어있으며, 나는 형상이 아니라 그저 수행하는 길의 표지판일 뿐 문득 발길에 닿는 풀잎사귀처럼 이슬을 묻히는 깨달음일 뿐이다.
인간은 바위에 부처를 새겼지만, 부처는 바위에 새긴 자신을 지워 진짜 부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천년 시간이 간신히 이룬 한 챕터의 느린 강좌다.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같은 부처이며,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깨달음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지워진 인각사 부처도 그 설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뭉개지고 이지러지고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이 인간의 감관에 비감으로 걸릴 뿐이다. 두 시인은, 사라지지 못한 채 붙들고 있는 석불의 미완과, 막 사라지려고 하는 적막의 완성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빈섬이 어릴 적 어머니가 적을 올린 불무사(佛無寺)는 이 절에 아예 부처 따윈 없음을 공표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름이 그렇다는 것이지, 진짜 불상이 없는 곳은 아니다. 절간 안에도 있고 밖에도 큰 바위에 벽불(壁佛)이 가득 새겨져 이지러지고 있는 중이다. 이 절의 설법 또한, 부처를 지우는 강의로 부처를 보여주는 그 역설의 맛을 지니고 있지 않나 싶다. 허여(許與)가 된다면, 졸행을 추가하고 싶다.
불무사佛無寺에 갔다
푸른 그늘서 푸른 그늘로
귀에 걸린 새울음 한 소절
그의 집 고요하고 그는 어디 갔나
없어서 더욱 환해지는 게 있다
없어야 놀라 살아나는 게 있다
상사화
한 마음이 나가고 한 마음이 들오는
꽃대 위의
상여같은 절
배롱나무 눈들이
천년 엿보았으나 못본 꽃
바위가 앉아서 집나간 부처를 기다린다
바위도 오래 가부좌 틀면
반은 사람이다 생각 주저앉힐 차 한 잔
햇살이 젓는 한낮
허물어진 코끝에
일로향(一爐香) 감돈다 했더니
백일 채운 붉은 살점 하나
어슥한 물낯 위로
툭
부처는커녕
새소리도 없다
'없다'(이빈섬)
달력은 한국투자증권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였던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글자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헐어놓기만 하면 금세
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공백만 뚜렷하다. 이 하얗게 바닥 난 데가 결국,
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
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
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
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
'공백이 뚜렷하다'(문인수)
■ 정월이 되어 지난 해 달력을 뗐을 때, 달력 있던 자리가 네모반듯하게 흰 그늘을 남긴 걸 보았다. 모르는 사이에, 집안의 벽들이 시커매져 왔던 것이리라.
시인은 그 흰 자리가 마치 파스 붙였던 흔적 같다고 하지 않는가. 그 이미지가 쏙 들어오는데, 파스 밑에 눌려있었던 멍이나 통증 따위가 기억나면서 그 달력이 거기에 얹혀있던 1년이란 시간이 새롭다.
1년 전 처음 시작하던 때는 대패질한 송판 냄새처럼 깨끗했던가. 날짜를 기표하는 숫자와 글자들이 스물스물 기어나와 온 벽을 이토록 '황칠'했던가. 달력이 문득 보관하고 있던 1년의 타임캡슐 앞에서 그 속에 들어있는 숫자나 날짜 따위를 돌이켜 본다.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시간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작년은 더 그랬던 것 같다. 쌀 포대 풀어놓으면 금방 바닥이 비는 것처럼 슬금슬금 흩어져버린 날들이었다. 달력의 흰 그늘이 꼭 쌀 떨어진 바닥처럼 아쉽고 답답하다.
그 사각형을 한참 들여다보니, 그것이 벽 속에 뚫려있는 비밀의 문 같다. 사느라고, 혹은 산답시고, 부산을 떨며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사이, 달력은 슬그머니 뒷편에 비상구 하나를 만들어놓은 것이냐. 열고 나가면 어디냐? 문짝 쾅 닫고 드러눕는 관짝? 시간의 끝엔 늘 그런 생각이 감도는 게 탈이다.
기분을 진정시키려, 얼른 새 달력을 그 자리에 걸어 그 놈의 저승출구같은 곳을 막아놓는다. 달력 아래 붙은 이름도 좋다. 한국투자증권. 이 한국에서 내가 아직도 삶에 투자할 여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권리증같은 것? 문인수 시인은 정말 농담도 잘 하신다.
이상국 논설실장 · 시인(이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