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노벨문학상 루이즈 글릭과 '언니의 악몽'이 키운 시
2021-05-31 10:50
수상 8개월만에, 시집 국내출판 움직임…코로나시대 영혼의 위로
낯선 노벨문학상 시인, 당황한 언론과 출판
지난해 10월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Louise Glück, 1943년생, 78세)은 국내에 번역된 시집이 한 권도 없을 만큼 몰이해의 그늘에 숨겨 있던 사람이다. 갑작스런 수상 소식에 그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이른 아침에 통보를 받고, "커피를 마셔야 하는 시간인데..."라고 말했고, 수상 수감을 말해달라는 요청에 "2분 정도면 되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판권 계약에 시간이 걸렸고 번역작업 또한 생각보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어 자체는 영어인데다 일상 용어나 노래 가사처럼 쉬운 표현이 많지만, 말과 말 사이에 깃든 미묘한 의미와 상징, 문맥을 흔드는 낯선 변주들이 우리말로 풀어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 침묵이나 적막이 품고 있는 묘한 서정이 기계적이거나 서툰 번역을 통과하면 허물어지거나 깨지기 쉬울 수밖에 없다. 영혼과 죽음을 끝없이 건드리고 있지만, 영성이나 초월의 시선으로 시인이 올라서 있지 않다. 섣불리 맥락을 빠져나가지 않고 당면한 비극적 현실에 버티고 서 있다고 해야 할까. 그는 스스로의 경험을 '동사적(動詞的)'으로 풀어가며, 시 속에서 함께 움직이며 반응하고 있다. 이런 시가 국내 독자들에겐 생경(生硬)할 수밖에 없다.
근 8개월이 지나가는 지금에야, 몇몇 출판사들이 글릭 시집의 번역작업에 나섰고, 출판시점을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이 발표되었을 때, 소나기처럼 언론들이 그에 관한 기사들로 한 차례 훑고 지나갔지만 시를 제대로 접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던 만큼 글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의 시가 마침내 상륙하는 즈음에 그의 삶과 시를 일별하고 차분히 음미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루이즈 글릭은 미국 뉴욕에서 헝가리 계통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특별한 이력이 하나 보인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다니던 중 갑자기 중퇴를 하는 사건이다. 10대 시절 그는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다고 한다. 식욕이 마비되었고 심각한 거식증(拒食症)을 앓았다. 이 때문에 학교공부를 멈춰야 했고, 7년 동안 상담치료를 받았다. 학업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그를 괴롭힌 것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졌던 일에 대한 악몽 때문이었다.
글릭에게는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직전에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감정에 시달렸다. 언니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 또한 언니처럼 예고도 없고 이유도 없이 죽게 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린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언니처럼 언젠가 죽게 되겠죠. 하지만 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공포와 생의(生意)가 뒤엉킨 그의 시들의 비밀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언니는 시 속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글릭은 한 인터뷰에서 이 악몽의 시간을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경험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1968년, 그의 나이 25세 때 첫 시집 '퍼스트본(Firstborn, 맏이)'을 낸다. 10대 때부터 이미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투고할 만큼, 문학에 열정을 보였던 그였다. 시집을 처음 냈을 때는, 여전히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시집은 분노로 가득한 1인칭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고, 극도의 소외감과 고독이 말들의 지문에서 묻어나온다. 시집이 나왔을 때 비평가들과 독자들 중에서는 걸러지지 않은 거친 말투와 지나치게 어두운 세계관 같은 것이 불편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익숙한 운율을 활용하면서 구어체가 주는 말맛으로 생동감을 자아내는 특유의 방식을 높이 평가하는 독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집은, 언니와의 착종(錯綜, 뒤엉켜 헝클어짐)이라는 내면상황을 시로 변환한 공식적인 첫 발화(發話)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맨처음 낳은(Firstborn) 아이는 언니였지만, 자신에게 생을 인계하듯 죽음을 맞은 뒤, 자신이 다시 맨처음 낳은 아이가 되었다. 언니와 자신은 자매로서 선후(先後)의 서열을 지닌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정체성이 언니와 혼동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언니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언니의 죽음이 자신의 것으로 뒤엉키기도 했을 것이다. 언니로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자신이 동시에 해야 하는 이른바 '퍼스트본(맏이) 콤플렉스'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평단(評壇)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의 기준에 맞추는 성실한 방식을 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무나 강박에서 자유로운 자아를 익숙한 일상어로 밀어올렸다. 그의 과거는 과거 속에 묻혀 기억으로 소환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순간이동 하여 함께 움직이며 발언하는 현재로 바뀐다. 그의 시는 세상의 시들이 가지 않던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해체하며, 부서진 풍경의 맥락 속에 영성이나 깨달음과도 비슷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불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유행하던 '고백파(告白派)'의 그것과는 뚜렷이 달랐던 것으로 평가된다. 글릭의 시는 당시 유행하던 지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들을 구사하지 않았고, 익숙한 육성(肉聲)으로 순간적으로 깊은 지각(知覺)을 소환하는 비범한 고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체득된 세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식적인 관념들을 허물어뜨렸다. 그리고 텅 빈 자리에 들어차는 낯선 풍경들을 비판적으로 마주하고자 했다. 단순하고 쉬운 말들로 심오함에 단도직입적으로 진입하는 순수시라는 평가는 거기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고백시'라는 평가에 대해, 노벨위원회 위원장 안데르스 올손은 "자전적 요소가 있다 해도 고백시인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는 시인"이라고 선을 긋는다. "글릭은 인류의 보편적 실재를 추구하면서 신화와 고전에서 영감을 얻고 있고, 이런 특징이 작품 전반에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올손은 시집 '아베르노'(2006)에 실린 시들을 높이 평가한다. '아베르노(지하세계의 입구를 상징하는 호수)'는 유럽의 신화적 사유를 바탕으로 현대의 죽음 문제를 돌이키고,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겪는 노인의 내면과 삶의 실체를 탐구하고 있다. 양균원 교수는 "사적이지만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혼돈 속에서 나오는 모든 목소리를 활용해 시대의 목소리로 나아가는 쉽지 않은 작업을 해온 시인"이라고 평가한다.
글릭은 사라로렌스대학과 콜럼비아대학에서 수강을 한 바 있지만 정규학위를 따지는 못했다. 현재 예일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12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코로나 시대에 유난히 마음을 건드리는 시
코로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저질러놓은 무절제와 과잉의 역습인가. 재수없이 우리 시대에 닥친 순환적인 재앙인가. 혹은 우리가 닿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신의 시험적인 손길인가. 그 손길이 우리를 테스트하는 중인가. 아직도 끝이 열려 있는 상태의 진행형인 이 역병(疫病)은, 우리의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의식을 넘어 무의식까지 침투해 있다. 이 바이러스가 일깨우는 문제는 죽음이며, 죽음의 확률을 치명적으로 높이는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 관한 주의와 경고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죽음을 질문하며, 죽음의 경계에 놓이거나 인접한 삶을 심문한다. 우리가 의미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많은 가치들의 무게를 되묻고, 그 가치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에 대해 발견하도록 한다.
루이스 글릭이 쓴 시들은, 코로나19라는 당면한 역병을 염두에 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 고립과 거리두기, 접근과 섞임의 금지, 마스크의 방어와 복면, 생명(백신)이기주의 등 코로나가 빚어내는 당대의 기이한 풍경들은, 루이스가 자신의 생을 통해서 느리게 소환했던 문제의 장면들을 빨리감기로 보여주는 듯 생생하다. 필자가 직접 번역을 해본 글릭시 몇 편을 중심으로 그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매장의 공포 - 이 시는 시신(屍身)의 입장에서 그 주위를 바라보는 풍경화이다. 우리는 최근 인도에서 무덤도 없이 강물에 흘려보내는 시신들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장면을 뉴스에서 접했다. 또 날마다 경신되는 TV의 사망자 숫자를 자신으로 감정이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코로나 시신이 자신이라면? 글릭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해보렴 그 시신의 외로움을. 밤에 삭막한 들판을 따라가는 그것의 그림자를. 꽁꽁 묶인 온몸을. 그토록 긴 여행을."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어제까지 먹던) 빵과 우유, 테이블 위에 묵직하니 놓인" 그 집 앞을 주검이 되어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을 환기시킨다.
천상의 음악 - 글릭은 '아직 천국을 믿는 친구'의 행동을 소개한다. 흙 속에서 죽어가는 애벌레를 먹으려는 개미를 말리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냥 놔두는 것이 옳은가. 화자인 글릭은, 개미의 행동을 제지했고 친구는 그건 신의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옳고 그름에 대해 우리는 본질적인 것과 상황적인 것에 늘 갈등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막차 버스에 오르는 늙은 노인을 내쫓는 것이 옳은가. 형편을 살펴 오르게 하는 것이 옳은가. 친구는 가혹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쫓는 게 옳다고 말하고 그게 윤리의 방향이며 신의 뜻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가 보는 신은 사실상 천상의 음악처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왜 신의 뜻보다 아래에 있는 거냐고 글릭은 시를 통해 항의한다.
날카로운 침묵 - 한편의 우화나 마법 같은 이야기다. 연애를 끝낸 뒤 공원을 산책하다가 과거 혹은 미래의 자신을 만난다. 그것은 돌아간 언니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다. 산책이라는 물리적인 행위가, 시간을 도는 행위이기도 하고 회전공간을 도는 행위이기도 한 순환여행이다. 이 은밀하고 미스터리한 산책의 회로를 설계한 까닭은, 그보다 앞서서 갔던 사람들이 예리하게 침묵으로 말했던 것을 찾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글릭은 그것을 찾을 수 없었고, 여전히 반짝이는 손잡이가 달린 문이 정원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 속에 존재했던 관계와 시간과 공간을 찾아 헤매는 마음을 풀어놓은 이 시는, 전염병으로 자폐 상태를 수시로 겪어야 하는 우리에겐 몽환의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 장치 같다. 집콕이란 단순히 집 안에 정지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집이란 공간을 가상현실처럼 확장하여 끝없이 환상을 펼치는 '움직임 없는 여행'이며, 주위의 정적이 마치 큰 소리로 말을 건네는 것처럼 귀에 들어앉는 환청의 여행이기도 하다.
물속의 아이들 - 아이들이 한겨울 양털스카프를 한 채 연못 속으로 익사한 장면을 거의 동요없이 관찰하듯 그려내는 시인은, 두 아이가 떨어진 것을 보고 죽음이 서로 다르게 왔던 것 같다고 수사관처럼 말하기도 한다. 또 아이들에겐 신의 심판 같은 게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 아이들이 연못 위에서 미끼처럼 미끄러져 내려오는 자기 이름을 듣고 있다는 상상은 정교하여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이 시에는 모든 감정적 반응이 정지된 한 여성의 내면에서 오직 하나의 문장으로 발신하는 신호음들이 흐른다. 집으로 와, 집으로 와, 못 찾겠어. 저 아이의 죽음은 자신의 가족 경험에 대한 변주이거나, 자신의 삶 전부를 익사로 읽어내는 전도된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연못 - 연못 속에서 죽은 아이와 연못 밖에서 화강암 돌덮개 속에 묻힌 아이. 언니와 글릭의 모습일까. 아니면 함께했던 동무의 모습일까. 그 두 아이가 대화하는 듯한 이 시는, 지척에 누워있어도 함께할 수 없는 아이를 향한 깊은 궁금증과 갈증을 드러낸다. 어떤 생에서는 우리가 같은 핏줄이었을 거라고도 말한다. 죽음과 삶이 서로를 비추고 기억과 현재가 서로를 질문하며, 분열된 자아를 통해 상처를 들여다보는 이 시는, 이 지상의 수많은 생사의 이별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내가 죽고 하나의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그 연민과 공포와 슬픔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죽음과 고통의 양이 아니라, 연민과 공포와 슬픔을 작동케하는 저 시의 공진(共振) 같은 것이 아닐까.
아베르노 - 코로나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하는 점이 있다. 특히 노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애도의 크기를 줄이고 있지 않은가 돌아보기도 한다. 글릭은 노인의 몸 속에 있는 정신이 먼저 죽어가는 상황을 통렬하게 부각시킨다. '의자'라는 말을 기억해내지 못한 정신의 끔찍함. 한 낱말에 대한 기억 상실은, 그 낱말이 이루고 있던 세계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것이 홀로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독거하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고립되는 상태이다. 희화적이면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그의 문체와 심오한 질문의 경계까지 독자를 끌어가는 힘은, 현대의 다른 시인들에게서 찾기 어려운 영성적 높이와 깊이를 성취한 작품이라는 명성에 걸맞다는 느낌을 준다. 이 시는 현대가 복원해 새롭게 생명을 부여한 '가장 생생한 고전'의 격을 갖추고 있다는 호평을 받기도 한다. 노인의 마음속에 있는 '하데스 하계(下界)의 경계와, 페르세포네의 공포와 불안과 슬픔과 고립의 너울대는 감정들'을 시 속에서 실감할 수 있다.
노벨문학상, 한국에겐 왜 높은 문턱인가
노벨문학상은 1901년부터 2020년까지 116명의 작가에게 돌아갔다. 노벨 문학상을 배출한 국가는 41개국이다. 아시아에선 일본이 2차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1994년 오예 겐자브로) 받았고 중국도 두 번(2000년 가오싱젠, 2012년 모옌) 받은 바 있다. 인도는 아시아 최초로 1913년 타고르가 받았다. 영어권에서 29명이 받았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각각 14명이다. 이 상은 물론 작가의 역량과 작품성이 고려되지만, 작품 외적인 요소도 살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엔 주로 반정부 인사들의 저항문학에 대해 후한 평가가 내려졌다. 톨스토이는 스웨덴과 불편한 입장에 있었던 러시아의 작가였던 점이 고려되어 상을 받지 못했다. 남미의 보르헤스는 독재정권을 지지했다는 점 때문에 제외되었고 나보코프는 베트남전을 옹호했다는 점이 부정적으로 작용해 수상에서 빠진 바 있다.
미국은 그동안 노벨문학상과는 인연이 적었다. 마크 트웨인은 후보에 여러 차례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고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핀천도 수상에선 번번이 빠졌다.1993년 여성 소설가 토니 모리슨 이후 23년 만에 받은 사람이 2016년 밥 딜런이다. 그리고 4년 뒤에 루이즈 글릭이 받은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1980년대 스웨덴 한림원의 요청을 받아 몇 차례 작가들을 추천한 바 있다. 특히 1982년 김동리의 '을화'가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후 서정주가 1990년과 1994년, 최인훈이 1992년 추천되었다. 북한에서는 이기영이 '두만강'으로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한때는 시인 고은이 꾸준히 후보로 언급되기도 했다.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타고르는 그의 탁월한 문학성을 어떻게 당시 스웨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103편의 산문서정시로 이뤄진 영어판 '기탄잘리'의 힘이었다. 타고르는 벵골어로 된 방대한 시집 속에서 글로벌한 감수성을 고려하여 자신의 시를 직접 영어로 바꾸어 썼다. 그리고 그는 당시 저명한 영국 시인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서문을 받아 싣는다. 노벨상위원회는 영국 시인의 이런 말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수밖에 없다.
"나는 여러 날 동안 이 번역된 원고 뭉치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차 안에서도 버스에서도 혹은 식당에서도 읽었으며, 또 낯선 사람이 내가 얼마나 감동하고 있는지 눈치챌까 두려워 가끔 그 원고를 덮어두어야 했다. 인도 친구가 내게 들려준 말에 의하면 원래의 이 서정시들은 다른 언어로 옮겨놓을 수 없는 오묘한 빛깔과 섬세한 리듬, 또 음률적이며 창조적 재능이 넘친다고 한다." 예이츠는 시를 인용하며 예찬의 극을 보여준다. "이것이 성자(聖者)의 이야기가 아니라고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다른 신앙에 대해 이런 갈채를 보낸 일은, 한림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다.
기탄잘리보다 뛰어나고 깊고 높은 문학은 한국에도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타고르의 시를 읽어본 뒤 다시 이 나라의 성자(聖者) 다석 류영모(1890~1981)의 시편들을 살펴보노라면 분한 생각이 절로 든다. 예이츠(1865~1939) 같은 시인이 영역(英譯)으로 한국의 명상시를 제대로 읽었다면, 최소한 10배는 더 놀랐을 것이란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영성(靈性)이 가득한 시성(詩聖) 다석의 면모는, 뜻밖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루이즈 글릭의 시적 높이와 깊이를 무색하게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요컨대, 한국의 빛나는 문학이 21세기 글로벌 무대에서 제대로 각광을 받으려면, 최고의 시적인 영감을 갖춘 번역가 시인들을 키워 소통의 영토를 확장하는 길 밖에 없다. 타고르처럼.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