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착해서 기부한다고? 아니, 기부해서 착하다

2021-05-03 06:00
삼성과 한국의 기부 문화

[이병종 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필자가 외신기자로 근무하던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의 개혁 정책을 취재하기 위해 청와대에서 한 수석 비서관을 인터뷰하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사무실을 둘러보니 ‘삼성 신경영’이란 책이 수십권 쌓여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정부의 개혁 정책의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비서실 직원들에게 이 책을 일독하라고 나눠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 책은 이건희 삼성 그룹 당시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 빼놓고 다 바꾸라”는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계기로 그룹에서 출판한 책이었다. 정치권은 당시 우리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비판한 이 회장을 미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그의 비전을 따라가고 있었다.

작년 타계한 이 회장의 가족들이 지난 주 발표한 사회 기부 계획을 보면 여전히 우리 정치권은 이 회장의 그늘을 쫓는다는 느낌이 든다. 12조에 달하는 상속세 납부에 이어 1조원의 의료계 지원, 감정가로 3조원으로 추산되는 문화, 예술품 기증 계획은 생전 이 회장의 의중이 담겨 있다고 한다. 항상 “반도체와 병원 생각 뿐”이었던 그에게 수익을 위한 사업 만큼 중요한 것은 그 수익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의료계와 예술계에 대한 기부와 지원은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분야이다. 팬더믹의 확산으로 의료 기술이 더욱 중요해졌고 경제 침체 와중에서 뒷 전으로 밀리는 예술, 문화계의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 어찌 보면 정부가 챙겨야 할 일을 이 회장은 미리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부 계획 발표 이후 역시 정부는 여기 편승하여 생색내기 바빴다. 미술품 기부 계획은 이 회장 가족이 아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TV 생중계를 통해 발표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될 작품들을 영상으로 보여 주면서 까지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 만큼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계에는 경사스러운 소식이었다. 양 박물관과 미술관의 연간 작품 구입 예산이 각각 40억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해가 될 일이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한 기업과 기업가가 담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물론 이번 이 회장 가족의 통근 기부 계획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론과 완전히 떼어놓고 평가하긴 힘들다. 이 부회장이 구속 중 재판을 받고 있고 향후 가족의 경영권 확보에도 여러 가지 변수가 많은 점을 보면 가능한 국민 여론의 도움을 받고 그로 인해 정부로 부터도 유리한 태도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한국의 재벌가의 사회 환원 계획은 대부분 부정 행위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여론과 법정의 심판을 받는 와중에 이루어졌다. 과거 삼성과 현대 그룹의 대주주 가족들과 회사들이 각각 거의 1조원에 육박하는 기부 계획을 발표할 때에도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부 계획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부 계획에 대해서 새롭게 평가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향후 한국의 기부 문화를 정착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사실 선진국의 자본주의 발달 역사를 보면 한국도 이제는 기업의 기부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점에 있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초 대기업은 산업화로 인해 엄청나게 성장했지만 동시에 국민들로 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노조 운동을 방해하고 노조를 파괴하며 독과점 행위로 중소 경쟁사를 말살하는 탐욕스러운 경영을 일삼았다. 자동차의 포드(Ford)나, 석유의 록펠러(Rockefeller), 철강의 카네기(Carnegie) 가문 등은 노동자와 중소기업의 착취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부정적 여론을 타개하기 위해 이들 가문들은 엄청난 금액으로 포드재단, 록펠러재단, 카네기재단 등을 설립했다. 록펠러 가족은 5억3천만불을 기부해 의약, 교육, 과학 연구에 공헌했고 포드 가족은 도심개발, 공영방송, 예술, 대학원 교육 등을 지원했다. 이로 인해 이들 기업에 대한 여론을 크게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가진 자와 대기업의 기부 문화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맹점인 빈익빈, 부익부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과세 정책 등으로는 한계가 있고 부자들의 자발적인 기부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를 통해 모두 자각하게 된 것이다. 지난 2019년 미국 사회의 전체 기부 규모는 4500억 달러, 약 500조원에 달한다. 이 중 개인 기부가 3100억 달러, 약 70퍼센트에 달한다.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의 경우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야 기부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점에 도달했다. 대기업이 그간 빠른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 사회의 여타 분야의 희생을 초래했고 이를 해소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더구나 팬더믹의 확산으로 중소기업이나 노동자의 삶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이는 더욱 절실해졌다. 사실 이제까지 한국의 대기업에게 이러한 점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미국과 같은 기부 문화가 정착되지도 않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수용해 효과적으로 운용할 사회적, 정치적 제도도 완비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부 행위가 자체 그룹 내 재단 설립의 형태로 이루어져 진정성이 의심되었고 투명성이나 신뢰성도 담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삼성의 기부의 경우 모호한 재단을 통한 형태가 아니라 직접 목적과 목표를 설정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기부가 오늘날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일반적이다. 전 세계의 최대 기부자로 알려진 워렌 버펫(Warren Buffett)은 평생 430억 달러를 기부했는데 주로 빈곤과 질병 퇴치라는 목적에 사용되었다. 두 번째 통 큰 기부자인 빌 게이츠(Bill Gates)와 부인 멜린다(Melinda)는 모두 120억 달러 정도를 기부했는데 역시 말라리아 등 질병 퇴치와 저개발국 빈곤 퇴치를 위해 쓰여졌다. 흥미로운 것은 버펫은 기부금의 상당 부분을 게이츠 부부의 재단에 위탁하여 보다 투명성있고 효과적으로 사용되도록 하였다.

전 세계 세 번째 기부자로 알려진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평생 동안 86억 달러 정도를 기부했는데 특이하게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이라는 목표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 자신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고 지금도 권위주의 색채가 짙어지는 헝가리 이민자 출신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러한 정치, 이념적인 목적의 기부를 즐겨한다. 네 번째 기부자는 과거 뉴욕 시장이며 미디어 재벌인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인데 그가 역점을 둔 분야는 비만과 환경이다. 과거 뉴욕 시장 시절 빈민층의 비만 문제의 중요성을 느꼈고 환경은 특히 석탄 발전소의 공해 문제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도 평소 그가 중요하다고 느꼈던 분야에 기부가 결정되었다. 의료의 경우 삼성병원을 세우는 등 그간 의료 산업과 기술의 발전을 중요시했던 그였다. 이번에도 7000억원을 감염병 극복, 3000억원은 소아암 등 희귀 질환 환아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또한 문화, 예술의 경우 자신이 평생 애지중지하던 분야이다. 선대인 이병철 회장 때부터 내려온 가족의 전통으로 귀중한 예술품을 소장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던 가족이었다. 총 23,000 미술품 가운데 국보가 14건, 보물이 46건에 달한다. 이 중에는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등 한국의 유명 화가, 모네, 고갱, 르누아르, 파사로, 샤갈, 달리 등 외국의 유명 화가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삼성 이 회장 가족의 이번 기부를 계기로 한국에도 이제는 본격적인 기부 문화가 열릴 전망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오래된 재벌가 뿐 아니라 젊은 신생 기업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얼마전 카카오그룹의 김범수 회장은 자신의 재산 10조원 중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그룹 회장은 3,000억원의 기금으로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특히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은 500억원으로 카이스트의 인공 지능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는데 특정 목적을 조건으로 하는 기부이기에 더욱 효과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타계한 이건희 회장은 여러 면에서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다. 아무도 크게 눈여겨 보지 않았던 반도체 산업을 위해 일찍부터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성공했다. 휴대폰 산업에 있어서는 경쟁국 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끊임없는 품질 개선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이번의 기부 계획을 보면 그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 데 대해서도 나름대로 식견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한국의 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이병종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 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