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다섯 가지 욕망을 다 버린 큰 사람 (上)
2021-04-16 05:49
[광주의 인물] ① 무등산의 聖者 오방 최흥종
광주의 참 정신을 알려면 이 사람을 보라
광주의 참 정신을 알려면 이 사람을 보라
[다시 빅시리즈를 열며] 아주경제는 1년4개월간 '정신가치 빅시리즈 시즌1 -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100회를 연재한 바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시즌2 - 지역혼의 재발견'을 시작합니다. 21세기 한국의 정신가치를 새롭게 가다듬는 프로젝트로, 이 나라 방방곡곡에 살아있는 정신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국가에너지로 살려내려는 작업입니다. 첫 지역은 민주화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광주와 그 일대를 다룹니다. 이 지역의 '불의에 대한 치열한 저항'을 낳은 근본인, 영성(靈性)의 빛을 주목하려 합니다. 이른바 무한포용과 자기희생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성자들이 일궈놓은, 진정한 '광주정신'을 다시 새깁니다. 1부에선 무등산의 성자(聖者)로 불렸던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를 비롯해 △한창기(뿌리깊은나무 발행인 1936~1997) △정율성(중국 인민군 군가 작곡자 1914~1976) △허백련(동양화가 1891~1977) △오지호(서양화가 1905~1982) △ 박용철(시인 1904~1938) △김현(문학평론가 1942~1990) △박동실 (판소리 명창 1897~1968) △김우진(연극인 1897~1926) △박선홍(무등산 지킴이 1926~2017) △김수형(전남대 AI융합대학장 1964~ ) △제이홉(본명 정호석 방탄소년단 BTS 멤버 1994~ )이 매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인물 선정에는 이종범(전 한국학호남진흥원장) 김덕진(광주교육대 교수) 장안영(전 광주일보 논설실장) 남성숙(광주관광재단 대표이사) 등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계곡을 따라 춘설헌(春雪軒)에 오른다. 남종화의 대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2∽1977) 선생의 묵향, 벌써 짙다. 선생이 20여년간 기거했던 이 작은 벽돌집에서 광주의 얘기는 시작된다.
춘설헌의 원래 주인은 석아(石啞) 최원순(崔元淳 1896∽1936). 선생은 1919년 와세다대 유학 중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로 항일의 필봉을 휘두르던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병을 얻어 낙향, 지금의 춘설헌 자리에 석아정(石啞亭)을 짓고 요양하다 세상을 뜬다. 석아정은 무등산의 성자(聖者)로 불린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에게 넘겨진다. 최흥종은 택호를 오방정으로 바꾼다. 석아정-오방정-춘설헌으로 이어지는 이 작은 집에서 광주의 정신과 가치가 잉태됐다. 맨 먼저 오방을 만나보자.
광주 최초의 장로이자 목사였던 오방은 다섯 가지를 버린 사람이다. 자신의 소명(召命)에 충실하기 위해서 명예욕, 물욕, 성욕, 식욕, 생명욕을 버렸다. 그래서 오방(五放)이다. 대표적 오방 연구자인 차종순 전 호남신학대학교 총장은 오방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이룬 사람, 잃음으로써 잃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물”이라고 했다.
“모든 걸 버림으로써 모든 걸 이룬 사람”
고 김천배 광주 YMCA총무는 생전에 “오방은 성자요, 독립투사요, 기독교전도자요, 사회운동가였다. 한 사람의 인격 안에 모든 가지의 상충하는 가치가 묶여져 있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驚異)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광주시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날(5월 18일), 시내 술집과 요정들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 철시했다. 일반 상가도 문을 닫은 집이 많았다. 장례식장인 광주공원엔 수많은 학생, 시민, 나환자, 걸인들이 모였다. 선생이 일구신 나주(羅州) 음성나환자 자활촌(호혜원)의 총무 최일담 씨가 예정에 없던 추도사를 하게 됐다. “아버지, 어찌하여 우리만 남겨두고 가신단 말입니까.…아버지께서 영영 가셔버리면 누가 우리를 돌봐줍니까. 추운 겨울 누가 옷을 입혀주며 굶주릴 때 누가 밥을 먹여줍니까. 우리는 어찌 살라하고 무정하게 가신단 말입니까!”
목이 메는 추도사에 2백여 명의 음성나환자들은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장내가 울음바다가 됐다. 여기저기서 몰려온 걸인들까지도 목 놓아 울었다. 이들은 무등산 장지까지 따라와 해가 설핏 기울도록 무덤 앞에 주저앉아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다. (문순태 <성자의 지팡이-영원한 자유인>, 2000년)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울부짖다
광주 얘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취재팀은 고민했다. 누구라야 광주의 정신과 가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100여명의 후보를 놓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했다. 압도적 다수가 오방을 첫 번째로 꼽았다. 오방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두 번 놀랐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처럼 정의롭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런 인물이 왜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광주 출신 출향인사들만 해도 오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행히 근래 광주의 지식인사회와 종교계가 오방 재조명에 팔을 걷고 나섰다. (사)오방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오방로(五放路)가 지정됐으며, 오방아카데미와 오방학교도 문을 열었다. 작년 10월엔 남구 양림동에 오방기념관도 세워졌다. 오방의 삶을 파고 들수록 오방의 품에 깃든 광주는 축복받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방은 1880년 광주 불로동에서 광주의 호족이었던 탐진 최씨, 최학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잃고, 19세 때 아버지까지 잃어, 어려서는 거칠고 난폭했다. 그는 20대 초반까지도 광주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쇠망치’라고 불렀다.
오방은 24세 때인 1904년 독실한 기독교인 김윤수와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을 만나면서 바뀐다. 이 무렵 그는 기독교에 빠져들지만, 생계를 위해 대한제국 광주경무청의 순검(순사) 일을 해야 했다. 순검으로서 그는 항일의병들을 잡아들여야 했으나 앞에서 잡고 뒤로 풀어주기 일쑤였다. 1907년 평소 오방을 의심해온 일본인 상사로부터 광주국채보상운동본부에 걸려 있는 간판을 떼어오라는 지시를 받고 끝내 사직한다. 그해 봄, 그는 세례를 받고 이름을 영종(泳琮)에서 ‘흥종’으로 바꾼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나환자의 피 묻은 지팡이를 집어주고
미국인 선교사 윌슨(Robert Wilson)의 한국어 선생을 하면서, 의료도 배우고 성경공부도 하던 1909년 초여름, 오방은 광주예수교병원(현 광주기독병원)에서 목포(木浦) 선교부의 포사이트(William Forsythe) 선교사와 마주치게 된다. 포사이트는 광주로 오던 중 길가에 쓰러져 있던 여자 나환자 한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의 말에 태우고 병원으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다음은 오방의 회고다. “나환자가 그때 마침 오른손에 들고 있는 참대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포사이트가 나를 보고 ‘형님, 저 지팡이 좀 집어주시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주저했다. 지팡이에는 고름인가 핏물인가 더러운 진물이 묻어 있었고, 환자는 흡사 썩은 송장이요, 두 가락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은 그나마도 헐어서 목불인견이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뜨거운 감동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 그 지팡이를 주워서 환자에게 쥐어줬다.…내 동포 중에서 생겨난 환자를 내가 꺼려하고 천만리 이역에서 온 외국인이 오히려 따뜻한 손길을 펴주고 있으니 예수님의 박애정신은 고사하고 동포애조차 결여된 인간으로서 무슨 신앙이냐는 자책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방 최흥종 「구라사업 50년사 개요」, 1960년 3월 17일 호남일보)
이 순간을 뒷날 김천배는 “한 변신(變身)이 이룩되는 찰나”라고 했고, 차종순은 “오방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축적인 변화(axial change)가 일어난” 순간이라고 했다. 차종순의 말은 이어진다. “오방은 자신을 용서하였다. 용서는 자신을 짓누르던 ‘잃음, 상실’이라는 한(恨)의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예수님을 위하여(때문에) 내버리는(잃는) 것이다. 오방은 잃어버림을 통하여 생긴 빈(空) 자리에 나(自己)를 채움으로써 더욱 더 자유로워졌다.” 오방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하편에서 계속.)
이재호 논설고문 ‧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