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 칼럼] 합리적 중도주의자가 설 길은 없는 것을까
2021-04-11 15:00
이명건·이쾌대 형제의 삶을 보며
최종현·김창희가 같이 지은 책 <오래된 서울>을 보면 서울 인왕산 밑 서촌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지고 있다. 멀리는 조선 초기 이곳 준수방 잠저에서 태어난 세종부터 가까이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시인 김광규의 삶이 담겨있다. 책을 읽다 보면 조선 중기 이곳에서 송석원 시사(詩社) 등을 결성하고 자신들의 문학적 욕구를 분출하던 중인들, 일제가 내린 남작 작위를 내팽개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탈출한 동농 김가진, 해방 공간에서 거센 역사의 파도에 실종된 여인들(김수임·엘리스 현) 등 눈에 띄는 인물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명건(1901~?)·이쾌대(1913~1965) 형제의 삶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명건은 본명보다는 '여성'이라는 호로 더 많이 알려졌다. 여성이란 호는 1918년 친구 김두전·김원봉과 같이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김원봉 고모부이자 나중에 의열단 단장이 되는 황상규가 지어주었다. 황상규는 이명건에게는 별과 같이 되라고 여성(如星), 김두전에게는 물과 같이 되라고 약수(若水), 김원봉에게는 산과 같이 되라고 약산(若山)이라는 호를 지어준다.
그 후 이명건은 3·1운동 직후 귀국해 대구에서 학생비밀결사 혜성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검거돼 3년형을 복역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가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북성회와 일월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귀국해서는 동아일보 기자를 하면서 총독부 통계자료 등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숫자조선연구>라는 책자를 시리즈로 내고, 화가로도 창작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엄밀한 고증을 거쳐 역사풍속화 제작에 몰두했으며, 그러다 보니 우리 고유의 복식사(服飾史)도 정리할 수 있었다.
광복 후 남한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몸살을 앓는다. 이럴 때 해방 전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이명건은 남조선노동당에 참여하지 않고, 몽양 여운형을 따른다. 몽양과 함께 어떻게 하든 대립하는 좌우가 합작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좌우가 대립하는데, 그 한 가운데를 가며 좌우를 끌어들이려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몽양은 극우파 한지근에 암살당하고, 그 후 이명건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했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몽양이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파인 이명건이 남한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도 이명건 자리는 없었다. <조선미술사개요>, <조선건축미술의 연구>를 내며 척박한 북한 미술사학계에 토대를 놓은 이명건은 1950년대 말 이후로 북한의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연안파 숙청의 피바람을 피해 가지 못했던 것 같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쾌대는 어머님 병환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인공 치하에서 재건된 조선미술동맹에도 강압된 분위기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이쾌대는 북으로 가다가 국군에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1953년 휴전이 성립하면서 포로들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선택할 때에 그는 북쪽을 선택했다. 당연히 남한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들은 빨갱이 가족으로 냉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가 왜 가족이 있는 남한을 택하지 않고 북으로 갔는지는 2010년에서야 밝혀졌다. 포로수용소에서 이쾌대에게 미술 지도를 받은 화가 이주영이 2008년 작고한 후 그의 아들들이 그간 숨겨둔 진실을 밝힌 것이다. 그동안 고이 보관하고 있던 이쾌대의 스케치화와 나무조각상(수용소에서 아내 유갑봉을 그리워하며 조각한 것) 등과 함께.
이쾌대는 자진해 북행길에 오른 것이 아니고 끌려간 것이다. 그리고 끌려가다가 국군에 체포되었을 때는 의용군으로 오인대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것이고.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로 나뉘어 살벌한 대립이 벌어지던 곳이다. 포로 석방 무렵 이쾌대는 반공포로들에 의해 제거 대상으로 찍혔다고 한다. 이쾌대는 남쪽을 선택할 경우 풀려나기도 전에 죽을 것을 우려해 북한행을 선택했다. 즉 이념이 아닌 생존을 위해 북을 택한 것이다.
이명건·이쾌대 형제는 서로 간 불신과 증오만 으르렁거리는 대립의 세계에서 따뜻한 인간 세계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몽양은 물론 백범 김구도 좌우로 갈라지는 조국을 어떻게 하든 하나로 합쳐보려다가 암살당하지 않았는가.
소설의 세계이지만 최인훈의 <광장> 주인공 이명준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올 때 남과 북 어느 쪽도 택하지 못하고 제3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3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삶을 마감한다. 좌우익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살벌한 이념의 구호만 난무하는 곳에서는 따뜻한 인간 냄새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설 자리가 없는 것인가.
어디 이명건·이쾌대 형제뿐인가. 이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희생이 되었던가. 원래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이념은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선 유달리 극렬하게 대립했을까. 당시 세계가 냉전체제로 들어가면서 공산주의 맹주 소련을 등에 업은 북한과 자본주의 맹주 미국을 등에 업은 남한이 이데올로기 선봉에서 맞닥뜨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는 우남 이승만에게도 있다. 미국에서 돌아와 국내 기반이 없던 우남이 정권을 잡기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은 것이다. 우남은 친일파를 자기 손발로 하기 위해 반민족특위도 무력화시켰다. 그리하여 친일파는 자기 과오를 덮기 위해서라도 공산주의 타도에 앞장서면서 좌우 대립이 더욱 격화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6·25 동족상잔을 거치고 반공을 국시로 하는 정권이 오래가면서 이데올로기는 굳어질 대로 굳어져 하나의 종교처럼 돼버렸다. 그러나 도대체 성스러운 이데올로기에 대해 다른 생각을 품는 것을 누르면 누를수록 반동도 커지는 법.
지금은 다양성이 인정되는 민주화 시대이지만 긴 세월 화석처럼 굳어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 눈엔 다양성이 보장되는 요즈음 시대가 당장이라도 빨갱이 세상이 될까 봐 걱정이 태산일 것이다. 또 이들에 대항하다 역시 화석화된 좌빨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이런 사람이 판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낄 것이다.
이런 화석화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요즈음 어찌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에도 이명건·이쾌대 형제 같은 이들은 설 땅이 없는 것인가. 나라가 건강해지려면 좌우로 사고가 경직된 이들보다는 합리적 중도주의자의 건강한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책 <오래된 서울>에서 이명건·이쾌대 형제의 삶을 보다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이데올로기 질곡이 한심스러워 한마디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