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北김일성 위협속 진행된 '첫 한·소 정상회담'
2021-03-29 10:28
한ㆍ소 정상회담 암호명 태백산...北반발에 극비리 진행
김일성, 소련에 '한국과 관계정상화시 사절단 철수' 위협
김일성, 소련에 '한국과 관계정상화시 사절단 철수' 위협
1980년대 노태우 정부가 김일성 북한 주석의 반발에도 '태백산'이란 암호명 아래 극비리 한·소 정상회담을 추진한 것이 확인됐다.
외교부는 30년이 지나 기밀이 해제된 1990년도 외교문서 2090권(33만 쪽 분량)을 원문해제 요약본과 함께 29일 일반에 공개했다.
문서에는 소련과의 정상회담, 한·소 국교수립 과정, 북한 반발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과 관련된 이슈들이 담겨 있다.
문서에 따르면, 첫 한·소 정상회담은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23층 타워룸에서 1시간 5분간 진행됐다.
당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방·개혁 노선이 맞물리면서 회담이 추진됐지만, 북측의 강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89년 1월26일 쌍용건설의 초정으로 3박4일간 일정으로 방한한 미카엘 스테클로브(michael steklov) 소련 연방사의 고문은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 측과 면담하면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김 주석이 1988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에게 "소련이 헝가리식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면 모스크바주재 대사관 이외 공식 사절단의 전원 철수하겠다"며 위협했다는 것이다. 1989년 헝가리와 수교를 맺은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의 수교를 염두에 두고 1990년 한·소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이에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어떠한 형태의 정부 접촉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단 소련 연방상의와 코트라간 협력차원의 공식관계 유지와 전면적인 경제규류는 공식적으로 공개리에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는 귀국 후 북측의 입장을 소련에 전달하고 "당분간 한국 정부 당국과 일체 접촉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련 방문(1989년 1월7일) 시 경제부서 장관의 면담도 주선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노태우 정권은 포기하지 않고 막후채널을 통해 소련 측에 거듭 '제3국에서의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소련 측은 5월 중순 '6월 4일 회동하자'고 동의했다.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해 한·소 정상회담 관련 사항은 '태백산'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며 5월 31일 대외 공식발표 전까지 누설이 안 되도록 보안을 강화했다.
한·소 정상회담 후 주소련 북한대사대리는 소련 외무성을 항의 방문해 "이 회담이 한반도에서의 사태를 악화시키고 남북 간 첨예한 대립을 조장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의 반발에도 한국과 소련은 정상회담을 하고 넉 달도 안 된 그해 9월 30일 국교를 수립했다.
최호중 당시 외무부 장관은 국교수립을 위한 공동성명을 제안하며 "떳떳하고 올바른 일을 할 때는 그것을 주저하거나 늦출 필요가 없다"며 "우리가 처음 회담을 갖는 날 바로 수교하게 되면 더욱 뜻깊은 것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30년이 지나 기밀이 해제된 1990년도 외교문서 2090권(33만 쪽 분량)을 원문해제 요약본과 함께 29일 일반에 공개했다.
문서에는 소련과의 정상회담, 한·소 국교수립 과정, 북한 반발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과 관련된 이슈들이 담겨 있다.
문서에 따르면, 첫 한·소 정상회담은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23층 타워룸에서 1시간 5분간 진행됐다.
당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방·개혁 노선이 맞물리면서 회담이 추진됐지만, 북측의 강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89년 1월26일 쌍용건설의 초정으로 3박4일간 일정으로 방한한 미카엘 스테클로브(michael steklov) 소련 연방사의 고문은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 측과 면담하면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김 주석이 1988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에게 "소련이 헝가리식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면 모스크바주재 대사관 이외 공식 사절단의 전원 철수하겠다"며 위협했다는 것이다. 1989년 헝가리와 수교를 맺은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의 수교를 염두에 두고 1990년 한·소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이에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어떠한 형태의 정부 접촉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단 소련 연방상의와 코트라간 협력차원의 공식관계 유지와 전면적인 경제규류는 공식적으로 공개리에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는 귀국 후 북측의 입장을 소련에 전달하고 "당분간 한국 정부 당국과 일체 접촉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련 방문(1989년 1월7일) 시 경제부서 장관의 면담도 주선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노태우 정권은 포기하지 않고 막후채널을 통해 소련 측에 거듭 '제3국에서의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소련 측은 5월 중순 '6월 4일 회동하자'고 동의했다.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해 한·소 정상회담 관련 사항은 '태백산'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며 5월 31일 대외 공식발표 전까지 누설이 안 되도록 보안을 강화했다.
한·소 정상회담 후 주소련 북한대사대리는 소련 외무성을 항의 방문해 "이 회담이 한반도에서의 사태를 악화시키고 남북 간 첨예한 대립을 조장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의 반발에도 한국과 소련은 정상회담을 하고 넉 달도 안 된 그해 9월 30일 국교를 수립했다.
최호중 당시 외무부 장관은 국교수립을 위한 공동성명을 제안하며 "떳떳하고 올바른 일을 할 때는 그것을 주저하거나 늦출 필요가 없다"며 "우리가 처음 회담을 갖는 날 바로 수교하게 되면 더욱 뜻깊은 것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