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미얀마는 동화속의 나라가 아니다

2021-03-02 11:16

 

[사진=AP·연합뉴스]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한 달 넘게 구금상태인 아웅 산 수치 국가고문(75)의 인생역정은 가시밭길 미얀마(버마) 민주화 역사 그 자체이다. 서방세계는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 산 장군의 외동딸로 태어나 살벌한 군사정권 아래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수치 고문에 대한 막연한 환상(fantasy)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때론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상상 속의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보는 양 환호하기도 했다. 미얀마 군부통치 종식과 민주화 과정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환상 때문일까? 2015년 고대했던 문민정부가 출범했지만 권력을 분점한 군부의 영향력은 그대로였다. 군부가 서방세계의 인기를 한몸으로 받고 있던 수치 고문을 사실상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결과이다. 수치 고문은 군부의 소수민족 인권탄압을 방조하거나 묵인하면서 서방세계는 그에 대한 환상을 지우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수치 고문의 민주민족동맹(NLD)이 대승을 거두며 2기 문민정부 출범을 눈앞에 두었지만 이번 쿠데타와 이어지는 유혈사태로 미얀마 민주정치는 다시 뒤죽박죽이다. 동화에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다. 복잡하게 얽힌 미얀마 사태를 바라보는 전 세계의 시각은 그리 단순치만은 않다.

수치 고문의 아버지 아웅 산 장군은 미얀마에서 민족, 종교, 이념을 초월해 범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1947년 7월 19일 영국 식민지이던 미얀마의 완전 독립을 앞두고 참모들과 회의 도중 정적이 보낸 자객들에게 암살당했다. 수치가 겨우 2살 때였다. 국부가 사라진 미얀마에 연방이 수립되고 의원내각제 형태의 서구식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뿌리 깊은 민족간 갈등과 경제적 대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국가는 내전상태로 돌입한다. 1960년대 초반 군부 세력의 쿠데타로 민주정치는 중단이 된다. 국내에서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하던 어머니(킨치)가 1960년 인도대사로 임명되어 사실상 국외로 축출될 당시 수치는 15살이었다. 그는 뉴델리 외교단지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영국에서 유학을 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 정치, 경제학을 공부했고 SOAS 런던대 석사학위를 수료한 뒤 UN 사무처에서 3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1972년 27세의 수치는 유학 때 알게된 영국의 티벳학자 마이클 에리어스와 결혼했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남편을 내조하는 그저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아갔다. 그러나 군부독재 정권의 폭정에 신음하는 조국의 암울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 독립영웅의 딸은 안락한 가정까지 포기하고 험난한 민주화 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가족도 포기한 민주화의 아이콘

198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병간호하기 위해 거의 3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수치. 당시 미얀마는 1962년의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 네 윈과 그를 둘러싼 군부의 오랜 폭압정치와 경제파탄으로 민심이 폭발하고 있었다. 1988년 8월 8일 8시 당시 수도 양곤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불교승려와 시민들이 대거참여한 '8888항쟁'은 미얀마 현대 정치사의 최대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네 윈은 26년 만에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으나 국방장관 소우 마웅은 '친위 쿠데타'로 다시 권력을 잡는다. 군부의 무자비한 총과 칼에 수천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조국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수치는 시위대의 시신이 안치된 양곤의 종합병원 앞에서 군중을 향해 민주화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다. 그는 시위대 요청으로 영국행을 포기하고 어린 두 아들과도 생이별을 하게 된다. 평범한 주부에서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다시 태어난 수치의 굴곡 많은 인생 2막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때 나이 43세였다.

잔혹한 시위진압을 규탄하는 국제사회 압력과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에 주춤한 군부는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다당제 정치와 선거를 통해 민간으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약속한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수치가 민주민족동맹(NLD)을 창설하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국민적 지지를 얻어가자 신군부는 수치를 가택 연금시킨다. 군부가 국제적 압력에 의해 실시한 1990년 총선에서 NLD는 82%의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했으나 군부는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수백명의 정치인을 투옥했다. 기대했던 '미얀마의 봄'은 결국 오지 않았다. 가택연금 된 상태에서 수치는 단식도 하였고 국제적인 청원도 하였지만 군부 세력은 요지부동이었다. 수치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수상식엔 남편과 두 아들이 수치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1995년 국제사회 압력으로 가택연금이 6년 만에 해제되었지만, 1999년 암투병 끝에 사망한 남편의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 외국으로 나가면 조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군부의 협박 때문이었다.


2007년 군정이 예고없이 기름값을 5배나 올리자 미얀마 승려들이 시민들과 함께한 대규모 반정부시위(샤프란 혁명)가 발생한다. 수백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까지 번진 후 미얀마 군부는 헌법을 개정하고 자체적인 민주화 일정을 내놓는다. 외부적으로 미얀마는 자유선거를 보장하는 헌법이 제정되고 민간정부 주도로 민주화와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군부는 국가의 통수권을 실제적으로 장악하고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헌법에 따라 내무·국방·경비 등 치안·안보 핵심장관은 군이 장악하며, 미얀마군의 통수권도 대통령이 아닌 군 최고사령관이 가지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군에게 협조를 요청할 권리만 있을 뿐 군이 이를 거부할 경우 그 어떤 제재방법도 없다. 개헌을 하려면 헌법상 75%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헌법상 군부가 25% 상하원 의석을 지명을 하는 현실은 사실상 개헌이 불가능하다.


비록 피상적이지만 미얀마 군부가 민주화와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하게된 배경을 살펴보자. 미얀마 군부는 초조했다. 수십년간 이어온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미얀마를 다른 아시아국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크게 낙후된 상태로 남게 했다. 그동안 중국의 투자에 크게 의존했던 미얀마는 경제발전을 위해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서방세계의 투자가 절실했다. 이때부터 미국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2011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방문 이후, 미얀마 정부는 정치범을 추가 석방하는 등 유화 제스처를 보내기도 한다. 2012년 11월 재선에서 승리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한다. 오바마는 당시 세인 대통령에게 민주개혁을 요구하고 경제지원도 약속한다. 수치 여사의 자택을 방문해 면담을 하기도 했다. 오바마의 방문은 당시 인권주의자들의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정권에게 아직 불완전하고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는 미얀마의 민주주의 체제를 미국이 어느 정도 인정해준 셈이다. 미얀마 군부는 서방으로부터 투자 유치를 위해 선거를 통한 수치 여사와의 권력분점이라는 묘안을 찾아낸다. 당시 미국의 오바마 정권이 미얀마 군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고안된 정치체제를 너무 성급하게 인정했다는 비난도 크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최대 관심은 오랫동안 미얀마 군부를 지원하며 지역 내 영향력을 키우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새로운 동맹국으로 미얀마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수치의 NLD는 2015년 11월 총선에서 압승한다. 이후 그는 외교부장관과 대통령실 장관을 겸임하는 국가고문으로 사실상 미얀마 정부를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로 등극한다.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군부 독재가 마침내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은 2016년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도 완전 해제한다. NLD는 지난해 11월 열린 총선에서도 전체 선출 의석의 83.2%를 석권하며 승리했다. 그러나 지난달 1일 문민정부 2기를 시작하는 첫 단추인 의회 개원 당일 새벽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쿠데타로 수치 고문을 포함해 윈민 대통령 등 정부 고위 인사들이 구금됐다.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은 입법·사법·행정 전권을 장악했다. 내부적으로 이번 쿠데타는 수치 집권 이후 지속된 미얀마의 불안한 이중권력체제 한계를 보여준다. 군부는 부정선거를 쿠데타 이유로 들지만 헌법에 의해 보장된 군부 권력과 수치 고문이 이끄는 선출권력의 봉합이 지난해 선거 압승으로 사실상 힘들게 되었고 자신들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 것을 우려한 군부가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회 대응의 한계

미얀마의 정국은 갈수록 짙은 안개 속으로 향하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을 비롯한 전국에서 펼쳐진 쿠데타 반대시위에서 군경의 무력사용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국제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 등 서방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이 미얀마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쿠데타를 되돌린다는 것도 현재로선 쉽지않아 보인다. 인권문제를 중시하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흘라잉 최고사령관을 포함해 미얀마 군부 인사들에게 자산 동결 등 제재를 부과하고 추가제재 검토에 들어갔다. 하지만 미국은 미얀마가 중국의 궤도(영향권)에 더욱 깊숙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입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미국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 효과의 미얀마 제재카드 정도이다. 광범위한 제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얀마 국민들의 생활을 힘들게 할 수 있고 주변국가로의 대규모 난민사태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내 여론도 미얀마에 대해 자유주의나 인권의 가치를 너무 강조하지 말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좀더 현실적인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과거 오바마 정권이 미얀마에 대해 과도하다 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미국이 의도했던 만큼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 때문인 듯하다.


중국은 미얀마 쿠데타와 관련 암암리에 미얀마 군부지원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얀마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핵심 국가이고 무역규모도 미국의 10배에 달하고 있다. 미국이 유엔에서 미얀마 제재복구에 나선다면 중국은 반대표를 던질 것이 확실하다. 미국 입장에서 미얀마는 인도양과 접한 전략적 요충지로 인도·태평양전략 실현의 핵심 지역이다. 수치 고문의 실권으로 미얀마 군부 세력이 앞으로 중국에 밀착할 것이라는 우려는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처럼 미얀마는 체질적으로 거대한 이웃국가인 중국의 압력이나 간섭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중국으로서도 이웃나라인 미얀마의 정국이 하루속히 안정되는 것이 자국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쿠데타로 인한 장기적 경제 대혼란과 난민 발생은 이웃 중국 입장에서는 반길 일이 아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미얀마의 복잡한 정국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국가는 아닌 것이다. 태국과 캄보디아 필리핀 등이 '내정불간섭' 원칙을 밝히면서 아세안 차원의 공동대응을 논의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미얀마 사태를 풀 수 있는 해법 마련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는 미·중의 복잡한 속내와 지정학적 갈등만이 아니다. 수치 여사가 민주화 투쟁의 길로 나선 지가 벌서 33년이 됐다. 과거 열정에 찬 민주화 투사의 모습과 거리가 있는 어딘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노회한 정치인 이미지는 막연한 불안감을 던져주고 있다. 2015년 그는 군부와 사실상 권력을 분점해왔다. 미얀마는 여러 부족으로 이뤄진 다양성의 나라이다. 미얀마는 전체국민 대다수가 불교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한 종교와 민족을 수용하고 관용을 베풀던 나라이다. 수치 여사는 집권 이후 이슬람 소수민족인 로힝야족(族)에 대한 군부의 인종청소에 침묵 또는 두둔하면서 수십년간 쌓아온 민주인권 투사 이미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의 집권 이후 국내외에서 기대했던 만큼 역동적인 경제발전도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5년의 집권기간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군부와 지나치게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도 들었다. 수치 고문의 집권은 미얀마 국민의 민주적 선택이었지만, 그가 개헌을 통해 군부의 권력을 줄이고, 불안한 권력분점을 끝내주길 원하는 당과 시민사회의 요구에 적극 나서지 못한 점은 쿠데타를 다시 발생하게 만든 단초가 된 셈이다. 지금의 상황은 수치가 평범한 가정주부 생활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조국을 위해 40대 초반의 나이에 민주투사의 길로 나섰던 1988년과 국내외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미얀마는 동화 속의 나라가 아니다.
 

수치 여사 석방 요구하는 미얀마 엔지니어 시위대 (네피도 AFP=연합뉴스) 미얀마의 수도 네피도에서 2월 15일 엔지니어들이 군부에 구금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석방을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