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 과학의 시선] “노벨상 예고편' 賞부터 챙겨라
2021-01-25 06:00
우물가에서 숭늉찾는 한국 노벨과학상
서울대 현택환 교수(화학생명공학부)는 지난해 10월 7일 아이돌 그룹 BTS의 ‘Not Today’라는 곡을 강의 시간에 들려줬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그는 연구실에 앉아 비대면 수업을 했다. 이날 “오늘은 아니야”라는 뜻의 음악을 튼 건 노벨화학상 발표가 오후 6시 45분에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대 제2공학관(302동) 8층에 있는 현 교수 연구실 앞에는 기자들 20여명이 진 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현 교수 이름이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재단의 발표에서 나올까 해서다.
지난해 10월 노벨상 과학부문 수상자 이름이 연일 나올 때 현택환 교수가 한국에서 혼자 주목받았다. 미국의 학술정보 분석 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현 교수가 2020년 노벨 화학상 수상이 유력한 과학자 3명 중 한 명이라고 발표한 게 원인이었다. 현 교수는 나노화학자이며, 나노입자를 균일하게 대량 합성하는 법을 개발했다. 지난 1월 11일 서울대에서 만났을 때 현 교수는 내게 “우리는 세계 정상급이 아니라, 세계 정상이라고 학생들에게 나는 말한다”라며 “그러나 지난해 노벨화학상은 내 차례가 아니었다. 상은 화학의 여러 분야를 돌아가면서 준다. 나의 분야인 나노화학은 순서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현택환 서울대 교수에게 노벨상에 앞서 받아야 할 상이 있다고 하던데, 어떤 상이냐 라고 질문했다. 현 교수는 울프상(Wolf Prize)과 래스커 상(Lasker Award)을 얘기했다. 현 교수는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 중에는 울프상 수상자가 특히 많다”며 “노벨화학상을 받으려면 울프상을 받는 게 유리하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지난해 12월 초 포항공대 화학자 김기문 교수를 만났을 때도 노벨상으로 가는 상이 어떤 게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김 교수는 자신이 받은 ‘아이잣-크리스텐슨 상’ 상패를 보여줬다. 아이잣-크리스텐슨 상(Izatt-Christensen Award)은 초분자화학-거대고리화학 분야에 권위 있는 상이다. 2016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이 상을 받았다. 장 피에르 소바주 교수(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는 1991년, 프레이저 스토더트(영국 노팅엄대학) 교수가 1993년에 수상했다. 김기문 교수는 “이분들의 추천으로 나는 2012년에 수상했다. 그건 이 분야에 내가 그들보다 늦게 들어왔기 때문이다”면서 “노벨상, 노벨상 하는데, 그에 앞서 한국 연구자들이 받아야 할 상들이 있다. 한국인은 그것도 거의 못 받고 있다. 그것부터 받아야 한다. 노벨상은 그 다음이다”라고 말했다.
과학부문 노벨상에 대한 한국인의 갈증은 심하다. 그래서 정부는 돈을 들여 연구 보고서를 낸 바 있다. 한국연구재단이 2019년 10월에 만든 ‘노벨과학상 종합분석 보고서: 수상 현황과 트렌드를 중심으로’라는 보고서가 그중의 하나다. 이 보고서도 김기문 교수나 현택환 교수와 같은 얘기를 한다. 보고서는 “노벨과학상 수상 전에 수상 징조를 알리는 현상도 다수 존재한다”면서 “울프상, 래스커상, 게이드너상,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상, 카블리상 수상이 이에 속하며 피인용 수를 바탕으로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예측하기도 한다”라고 말한다.
한국 과학자는 울프상, 래스커상, 게이드너상,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상, 카블리상을 받고 있을까? 노벨과학상으로 가는 길이기도 한 이들 상을 수상한 사람이 있을까? 그게 궁금해서 이들 관련 자료와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확인해 봤다.
먼저, 울프상 관련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이스라엘의 울프 재단이 1978년 만들었고, 설립자는 독일 출생의 이스라엘 발명가 리카르도 울프(1887–1981)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의회(크네셋)에서 매년 5월 시상식을 연다. 시상 분야는 과학과 예술이며, 과학의 경우 의학, 농업, 수학, 화학, 물리학 5개 부문을 대상으로 한다. 예술 분야는 건축, 음악, 회화, 조각 부문을 돌아가며 매년 1명의 수상자를 선정한다. 상금은 10만 달러. 지금까지 345명이 수상했다. 생긴 지 43년 된 울프상이 국제적으로 권위를 어떻게 해서 그리 얻었는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울프상 사이트는 역대 수상자를 찾는 한 방법으로, 국가별 검색이 가능하다. 한국(Korea, Republic of)을 검색해 보았다. 울프상을 받은 한국인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없음”(Nothing)이라고 나왔다. 역시나였다. 이럴 때 그 다음 검색하는 건 이웃나라다. 일본 수상자는 몇 명이나 있을까 궁금하다. 일본인 10명의 얼굴 사진과 이름이 화면에 떴다. 물리학자 1명, 화학자 2명, 의학자 3명, 수학자 3명, 그리고 건축가 1명이다. 한 부분에 쏠리지 않고, 과학의 모든 분야에 고루 수상자를 일본은 배출했다. 역시 과학 강국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일본이 꾸준히 내는 저력을 다시 확인한다.
중국인 수상자는 몇 명이나 있는지 찾아봤다. 중국인 수상자는 1명(농업 부문)이다. ‘하이브리드 쌀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위안룽핑(袁隆平)씨가 2004년에 받았다. 물리학과 화학 부문 중국인 수상자는 없다.
울프상 수상이 노벨상 수상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일본 물리학자 고시바 마사토시(중성미자 연구자)는 200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에 앞서 2년 전에 울프상을 받았다.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인 야마나카 신야(교토대학의 줄기세포 연구자)는 바로 전해에 의학부문 울프상을 수상했다.
노벨생리의학 부문 수상자의 예고편에 해당한다는 ‘래스커 상’(Lasker Award) 사이트에 가봤다. 래스커 상은 미국의 래스커 재단이 주관, 1945년 이후 매년 의학자를 대상으로 시상한다. 재단은 미국 사업가인 앨버트 래스커와 그의 부인이자 건강 활동가(health activist)이었던 메리 래스커가 함께 설립했다. 래스커상은 의학부문의 경우 3개 분야(기초의학연구상, 임상의학연구상, 특별상)를 대상으로 하며, 상금은 25만 달러. 3개 분야 중 기초의학 연구상 수상자가 노벨생리의학상을 줄줄이 받는 걸로 명성이 높다. 2016년 래스커상(기초의학) 수상자 세 명이 3년 뒤 그대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게 최근의 좋은 사례다.
역대 래스커 수상자에 한국인 이름이 있나 해서 찾았다.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인은 세 사람, 중국인은 두 사람이 보인다. 일본인 세 사람 중 두 사람(1989년 수상자 니시즈카 야스토미 고베의대 교수, 2009년 수상자 야마니카 신야 교토대학 교수)이 기초의학분야 수상자이고, 다른 한 사람(2008년 엔도 아키라, ㈜바이오팜 연구소)은 임상의학 분야 수상자다.
게이드너 상은 캐나다에 있는 게이드너 재단이 주관한다. 게이드너 상 역시 노벨상으로 가는 통로다. 사이트에 보면 게이드너 상을 받은 사람 중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눈에 띄게 표시해놓았다. 세어 보니, 역대 수상자 중 102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한국연구재단 보고서는 “게이드너 상 수상자의 25%정도가 의학 관련 노벨상을 수상했다“라고 말한다. 1959년 이후 수상자를 살펴보았다. 일본인은 적지 않게 보이나, 한국인 수상자는 없는 듯하다.
한국연구재단의 보고서는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 상’과 ‘카블리 상’도 유력한 노벨과학상의 사전 징후라고 했다. 이 두 상을 받은 한국인이 있을까? 찰스 스타크 드레이퍼상을 시상한 1989년 이후 한국인은 한 명도 없다. 일본인 이름은 세 명 보았다. 카블리상은 카블리재단과 노르웨이 과학아카데미가 주관한다. 상금은 무려 100만 달러. 천체물리학, 나노과학, 신경과학 세 분야의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며 2008년 첫 수상자를 냈다. 검색해 보았으나, 한국인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약간은 지루할 정도로 권위 있는, 노벨상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얘기되는 상 네 개를 살펴보았다. 한국인 수상자는 한 명도 없음을 확인했다. 한국 과학자는 노벨상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했다. 한국의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계 정상과 거리가 있는 것이다. 매년 10월 스톡홀름의 노벨재단 발표에서 한국인 이름이 나오길 귀를 세우고 듣는 건 지금으로서는 허망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인에게 노벨상 수상이라는 기대를 품 게 해준 건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의 예측이다. 이건 논문이 얼마나 인용되는지를 기준으로 한다. 여기에 이름이 들어간 한국인 연구자는 현택환 서울대 화학자 외에도 몇 명 있었다. 유룡 카이스트 교수(2014년), 박남규 성균관대 교수(2017년)가 그들이다.
유룡, 박남규, 현택환 교수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혹시 눈치 채셨는지? 이들은 모두 화학자다. 노벨 과학상 수상으로 가는 길에는 화학자가 한국에서는 다른 과학 분야보다 앞서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노벨상’ 보고서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보고서 내의 ‘노벨과학상 수상자의 연구 업적에 근접한 한국 연구자 목록’에 오른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분야 연구자는 17명이다. 이 중 화학자가 9명으로 가장 많다. 생리의학 부문 연구자는 5명, 물리학자는 3명이다.
노벨상을 받고 싶다면, 한국의 기초과학을 키워야 할 것이다. 그러면 뭘 할 것인가?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 그중의 하나는 좋은 과학상을 만드는 것이다. ‘호암상’ ‘포스코청암상’과 같은 좋은 상이 있으나, 국내용이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갖지 않는다. 일본에는 교토상이라는 권위있는 국제상이 있다. 과학과 예술가를 대상으로 한다. 또 자료를 뒤지다 보니 ‘나고야 유기화학 메달’이라는 상이 있다. 나고야 대학의 노벨화학상 수상자(2001년)인 노요리 료지 교수가 제안해 1995년부터 매년 시상하며, 시상자는 일본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이 상이 얼마나 지명도를 갖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이 이 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 화학이 잘하고 있으니, 화학 분야에 좋은 국제적인 상을 만드는 것이다. 권위 있는 상 제정은 한국 화학을 응원하는 전략적인 접근일 수 있다. ‘서울 평화상’ 같은 데 돈 낭비하는 대신, 과학 상에 투자하는 게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