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찢은 정치, 붙인 '트롯'
2020-12-27 17:51
겨울밤, 잘 익은 홍시를 보면 누군들 부모님 생각이 나지 않으랴.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유자 아니라도 품은 직도 하다마는/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글로 설워하노라’. 고교시절 외었던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조홍시가(早紅柹歌)도 떠오를 터. 문득 나훈아의 ‘홍시’도 듣고 싶어질 게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 생각이 난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코로나만 아니면 노래방으로 달려갔을 텐데…. 힘들었던 한 해를 그냥 보낼 수야 있나. 트로트 한 가락에라도 실어 보내야지. 그게 우리 시대, 세밑의 습속(習俗)이자 예의가 아닌가. 꺾어라, 그렇게 2020 트로트의 해가 저문다.
사람들은 왜 트로트에 끌릴까. 음악평론가 김철웅(전 경향신문 논설실장)은 2015년 트로트의 부활을 예견했던 것 같다. 그는 ‘노래가 위로다’라는 저서에서 “트로트는 한국사회의 음악적 집단체험이자 원체험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게 잠재돼 있다가 때가 되면 표출되는 것인데, 이를 흔히 ‘취향변화’라고 하지만, “취향변화는 원체험과 친숙해지는 것으로 고리타분해지는 게 아니다”고 했다. 그는 가수 한영애의 입을 빌려 트로트가 좋은 이유 세 가지를 들었다. “노랫말이 좋아 들으면 경건해지고, 노래를 통해서 슬픔을 이겨내려는 감성이 좋으며, 감정을 필터링해서 다음 감정을 드러내는 굉장히 정교하고 정갈한 노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트로트의 시대적, 정치사회적 함의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는 젊어서 포크와 록을 좋아했고, 트로트는 아예 경멸했던 ‘청년문화’세대가 중년이 돼 트로트에 빠지는 이유를 “현실의 삶에 대한 굴복” 탓으로 봤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나이 들어 결혼하고, 애 낳고, 버거운 삶의 무게로 비틀거릴 때, 무력감 속에서 트로트에 기대게 된다는 것이다.(이영미,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2011년) 그가 말하는 굴복은 순응, 또는 동화(同化)쯤으로 볼 수도 있겠다.
가요를 사회과학 조사방법론의 일환인 내용분석(content analysis) 기법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노랫말(가사)에 어떤 말(단어)이 가장 빈번하게 쓰였는가를 조사해서, 해당 가요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런 가요가 나온 시대적 배경을 유추하는 것이다. 김용학 교수(연세대 사회학)는 2015년 내용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학의 ‘연결망 분석기법’을 이용해 대중가요를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1960년대, 1980년대, 2000년대 별로 각각 대중가요를 100곡씩을 골라 노랫말에 어떤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며, 이 단어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김용학, ‘한국대중가요의 의미 연결망’, 2015년)
결론이 흥미롭다. 시대가 변해도 (가요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핵심어는 단연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중심으로 마음, 가슴, 말, 눈물 등이 등장하며 사랑을 애틋하고 아픈 마음의 상태로 묘사하는 것이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점”이라는 것. 60년대에는 고향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하여 전쟁과 피난, 도시화 등으로 인한 실향(失鄕)의 아픔과 연민이 표현되지만 80년대 이후에는 실향의 정서가 사라지고, 2000년대에는 ‘힘’내라는 표현이 부상하며, ‘술’에 취한 상태나 술을 마시는 장면을 노래하는 횟수가 급증한다고 했다. 이는 아무래도 90년대 후반의 IMF 위기와 2000년대 초반의 금융위기가 영향을 미친 탓으로 보인다.
공감은 기억의 공유(共有)에서 나온다
이런 흐름은 2020 트로트 열풍 속에서도 어떻게 변했을까. 트로트 오디션 프로의 기획자나 참가자들이라면 한번쯤 톺아봐야 할 듯싶다. 당장 선곡(選曲)과 경연에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트로트의 호소력은 역시 공감(共感)에 있다. 공감은 감정이입(empathy), 곧 노래를 듣는 사람이 부르는 사람의 처지와 정서를 자신의 그것으로 받아들일 때 생긴다. 트로트만큼 감정이입이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도 없다.
감정이입은 기억의 공유(共有)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공통의 기억들이 있기에 공감하는 것이다. 일제 침탈, 분단, 전쟁, 이산(離散), 가난, 독재, 발전,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좌절과 성취의 시간을 함께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나기에 눈물이 난다. 트로트는 기억-공감-눈물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셈이다. 나는 정치가 갈라놓은 한국사회를 트로트가 붙였다고 생각한다. 기억의 공유면적을 넓힘으로써 말이다. 정치가 할 일을 트로트가 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정치란 적(敵)은 줄이고 친구는 늘려가는 것이라고들 한다. ‘국민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국민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감의 폭을 부단히 넓혀가라는 얘기다. 이 정권이 과연 그러한가. 기억의 폭을 의도적으로 좁힘으로써 국민의 절반 이상을 적으로 돌리지나 않는지 의문일 때가 많다. 그래야 20년 집권이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기억을 왜곡해 국민을 나누는 정치는 트로트만도 못한 정치다.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들의 소중함
한국에 트로트풍의 노래가 들어온 것은 192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1916년 4월 24일 단성사에서 신파극단 ‘예성좌’가 일본의 번안곡 ‘카츄사의 노래’를 부른 게 최초의 대중가요였다는 설도 있다. 트로트 100년 역사에는 우리 삶의 흔적들이 그대로 녹아있다. 우리는 공유하고 공감할 게 너무 많은 민족이다. 물론 어찌 좋은 기억만 있겠는가. 나쁜 기억도 슬픈 기억도 있게 마련이다. 그 모든 기억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그게 우리의 정체성이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국민 통합과 화합에 있다. 위정자라면, 지도자라면, ‘다름’을 강조하기보다는 ‘같음’의 소중함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트로트에서 그걸 느끼듯이 말이다. 그래야 지긋지긋한 반목과 대립의 시간을 끝낼 수 있다. 특정된 기억만이 기억은 아니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TIME‧12월 21일-28일자)은 올해의 인물로 조 바이든 대통령당선자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당선자를 선정했다. 선정 이유는 “미국을 바꾸기 위해서, 분열(division)의 분노보다 공감(empathy)의 힘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해리스의 소감이 가슴에 울림을 준다. “당신이 어떤 인종이든 어떤 민족이든, 당신의 할머니가 무슨 언어를 썼든, 우리들의 절대 다수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보다 하나가 되게 하는 것들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앞으로 나아갑시다.”(let’s move forward knowing that the vast majority of us have more in common than what separates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