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홍정욱이 밝힌 19대 총선 불출마 사유

2020-12-14 17:59
“국가와 국민 대신 당파와 지지층 위해 일하는 곳에서 감동 찾기 어려웠다”

[사진=홍정욱 전 의원 블로그]


홍정욱 전 한나라당 의원이 14일 본인의 19대 총선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홍 전 의원은 이날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5번째 에세이에서 “비전으로 시작해 성과로 끝나는 경영과 달리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곳, 국가와 국민 대신 당파와 지지층을 위해 일하는 곳에서 소명의 감동을 찾긴 어려웠다”고 밝혔다.

홍 전 의원은 당시 스티브 잡스의 별세 소식을 접한 뒤 “갑자기 그가 남긴 말 한 마디가 뇌리를 스쳤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도 지금하던 일을 계속 할 것인가’ 국회의원직에 대한 고민은 이미 당선 직후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사회가 양분되고 국회가 공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시작했었다”고 했다.

홍 전 의원은 “그 후 끊임없는 정쟁과 반복되는 몸싸움 속에서 초선 의원의 미약한 날갯짓을 계속하며 내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며 “결국 그날 나는 잡스의 질문에 마침내 ‘아니다’라고 명확히 답할 수 있었다. 한 달 뒤 나는 제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회의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홍 전 의원의 에세이 글 전문.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입양됐고, 대학을 중퇴했으며,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세상을 바꿨다. 오늘 나의 변명은 무엇인가?’ (트위터)

봄과 가을은 지역구 국회의원에게는 곤혹스런 시기였다. 국회 일이 고되어서가 아니라 연일 이어지는 지역의 운동회, 친목회, 동창회 등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회만 해도 대부분의 올림픽 종목과 민속 종목은 물론 닭싸움까지 있었다. 주말이면 하루 10여 개의 행사를 돌았다. 주민들과의 교류는 민원을 듣고 민심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그러나 이같은 행사는 소통은 커녕 대부분 10분 남짓 머물며 악수를 나누고 축사 한마디 한 뒤 자리를 뜨는 일정이었다. 심지어 가는 곳마다 같은 사람들과 마주치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분들이 누구였고 왜 대회마다 계셨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축사도 어색했다. 주인공인 선수들은 정렬해 서 있는데 의원이랍시고 단상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했다. 또 비서관이 건네준 VIP 명단을 호명하고 인사말을 한 뒤 “화이팅!”이라고 주먹을 불끈 쥘 때마다 얼굴이 붉어졌다. 국회의원은 법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행사를 도는 사람이라는 동료 의원의 한탄이 떠올랐다. 다만 모두 이를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다들 발가벗고 있으면 나도 벗어야 하는 압박을 느끼듯, 경쟁자들이 다 하니 나 또한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가을도 나는 새벽에 일어나 보좌관과 함께 다양한 행사들을 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비서관으로부터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간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상실감에 휩싸였다. 나는 차를 멈춰 세웠다. 차 속에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만나본 적도 없고 내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 그토록 큰 충격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내게 가슴의 소리를 따른다는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영웅이었다.

갑자기 그가 남긴 말 한마디가 뇌리를 스쳤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도 지금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인가?” 국회의원직에 대한 고민은 이미 당선 직후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사회가 양분되고 국회가 공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시작했었다. 그 후 끊임없는 정쟁과 반복되는 몸싸움 속에서 초선 의원의 미약한 날갯짓을 계속하며 내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비전으로 시작해 성과로 끝나는 경영과 달리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곳, 국가와 국민 대신 당파와 지지층을 위해 일하는 곳에서 소명의 감동을 찾기는 힘들었다. 결국 그날 나는 잡스의 질문에 마침내 ‘아니다’라고 명확히 답할 수 있었다. 한 달 뒤 나는 제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회의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진정한 성공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안 해도 되는 삶이다.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을 안 해도 되는 삶, 즉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없는 삶이다. 물론 누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삶의 90퍼센트가 그칠 날 없는 싸움과 기다림, 의미 없는 행사와 목적 없는 모임으로 채워져 있다면 이는 재고할 가치가 없는 삶이었다. 부족한 나를 믿고 응원해 준 상계동 주민들과 당원들이 끝까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맹자는 “벼슬을 하는 자는 직분을 다 못하면 떠나고, 꾸짖음을 맡은 자는 말이 안 통하면 떠나야 한다”고 했다. 나는 오로지 내 역량의 부족을 꾸짖으며 국회를 떠났다.

몇 년 후 어느 봄날, 나는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며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올렸다: '때로 만나본 적도 없지만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동시대를 살았음을 기쁨으로 여기며.'

'三揖一辭(삼읍일사), 세 번 읍하며 어렵게 나아가고, 지체없이 한 번에 물러나는 것이 벼슬길. 경박하게 나서고 고집스레 버티는 공직 후보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트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