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물리학자는 왜 日 연구소를 찾나?
2020-11-29 18:25
한국도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만들 때가 되었다.
고에너지물리학자들은 연구소를 바라고 천체물리학자는 중성미자 천문학 시설을 요구한다.
고에너지물리학자들은 연구소를 바라고 천체물리학자는 중성미자 천문학 시설을 요구한다.
[최준석, 과학의 시선] 일본에 KEK와 J-PARC라는, 가속기를 갖춘 국립 연구소가 있다. 두 기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한국 물리학자들을 취재하면서다. 그들이 물리학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의 연구 궤적은 어땠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KEK와 J-PARC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균관대 박일흥 교수, 서울대 김선기, 양운기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의 김영기 교수가 그곳에서 석사나 박사 학위를 할 때 일본에서 일했던 사람 중 일부다. 그들 말고도 한국의 입자물리학자와 핵물리학자들은 두 일본 국립물리학연구소의 문지방이 닳을 정도로 다녔고, 다니고 있다. KEK는 ‘일본고(高)에너지물리기구‘이고, J-PARC는 ’일본양성자가속기연구단지‘다.
나는 가보지 못했으니, 이들 기관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사진을 찾아봤다. ‘구글 지도‘ 사이트의 ‘스트리트 뷰’ 서비스를 통해서는, KEK의 거리 풍경을 동네 산책하듯이 구경하기도 했다. KEK가 J-PARC보다 도쿄에서 지리적으로 가깝다. KEK는 도쿄만 건너편의 쓰쿠바에 있다. J-PARC는 도쿄에서 해안선을 따라 조금 올라간 도카이무라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쿼크’와 ‘물질-반물질’이란 단어가 좀 낯설지 모르겠다. 쿼크는 원자핵 안에 있는 양성자나 중성자를 이루는 물질이라고 하면, 거의 다 설명한 게 된다. 쿼크는 양성자나 중성자 안에 세개씩 들어있다.
‘물질과 반물질’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전하만 다르고 나머지 물리적 특징은 똑같다. 예컨대 전자라는 물질이 있다. 이 전자와 물리적 특징은 똑같고 전하의 부호만 다른 입자가 있다. 이 입자가 전자의 반물질이다. 이 입자는 ‘양전자’라고 부른다. 전자와 양전자를 갖고 한 실험이 바로 벨 실험이다. 벨 실험이나, 벨의 후속실험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벨2실험에 쓰는 입자가속기가 바로, 전자와 양전자 충돌기 방식이다.
벨 실험에 참여한 한국 물리학자는 많다. 그중에서 나는 권영준 연세대 교수를 만나 취재한 바 있다. 그는 1996년 연세대 교수가 된 뒤부터 일본의 KEK실험에 참여했고, 올해 초까지 지난 2년간은 벨 실험 대표(Spokesperson)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 고에너지물리학 연구의 다른 중심지는 J-PARC이다. J-PARC 이름은 많이 들어봤으나, 개인적으로 내용을 잘 몰랐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J-PARC의 물리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 물리학자 몇 사람 이름을 알았다. 특히 김수봉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성균관대 기초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가 J-PARC의 실험 하나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수봉 교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성미자 실험 연구자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래서 김 교수와 통화를 하고, J-PARC와 그가 참여하고 있는 실험에 관해 물었다.
J-PARC는 KEK와 일본원자력연구소(JAERI)가 공동으로 설립키로 하고, 2001년 첫 삽을 떴다. J-PARC가 자랑하는 장비는 양성자가속기다. 양성자는 원자핵 안에 들어있는 입자이고, J-PARC에는 세개의 입자가속기가 있어, 양성자 빔을 만들고, 이 빔을 가속시키고, 더 빨리 가속시킨다. 그런 다음 양성자 빔을 표적에 충돌시킨다. 그러면 중성자와 중성미자 다발을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나오는 중성자에 관심을 가진 쪽은 일본원자력연구소다. 이들은 원자로에서 핵분열이 일어날 때 중성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더 정확히 알고 싶어 하고, 그래서 중성자가 필요하다. 일본원자력연구소가 J-PARC 설립에 참여한 건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양성자가속기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산물인 중성미자 다발을 갖고 J-PARC는 뭘 하는가? 그 용도 중 하나는 약 300㎞ 떨어진 지하 1000m에 있는 실험장으로 쏘아 중성미자의 성질을 알아보는 실험을 하는 것이다. 이 실험은 T2K(Tokai to Kamiokande)라고 한다. 도카이무라(T)의 J-PARC에서 보낸 중성미자 다발을 받아 보는 곳은 슈퍼-가미오칸데(K)실험장이다. 중성미자는 땅속을 그냥 거침없이 지나가므로 터널과 같은 걸 만들 필요도 없다. 일본 서부 기후현에 있는 슈퍼-가미오칸데 실험은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만 있으면 된다. 도쿄대학 우주선 연구소가 운영하는 이 실험시설은 물 5만t(톤)이 담긴 거대한 수조와, 중성미자가 물 원자와 반응할 때 나오는 신호를 검출하기 위한 광(光)증배관 1만3000개를 갖추고 있다.
슈퍼-가미오칸데 실험은 일본에 노벨물리학상을 안겨준 또 다른 실험이다. 실험을 이끈 도쿄대 우주선연구소의 가지타 다카아키 교수가 2015년 노벨상을 받았다. 공적은 중성미자 진동 확인이다. 질량이 없는 입자인 줄 알았던 중성미자가 질량을 가진다는 걸 이 실험을 통해 확인하였다.
J-PARC는 슈퍼-가미오칸데로 보내는 중성미자 말고, 이보다 좀 낮은 에너지를 가진 중성미자 빔도 만들어낸다. 김수봉 교수는 이 중성미자 다발을 갖고 하는 실험(JSNS^2)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임기 4년의 이 실험 공동대표(Co-spokesperson)로 선임됐다. JSNS^2 실험은 ‘비활성중성미자’(Sterile Neutrino)라는 입자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게 목표다. 비활성중성미자가 “있다” “없다” 하는 혼란스런 실험 결과들이 여러 실험에서 나왔는데, 보다 우수한 검출기를 만들어 이 논란을 종결 지으려 한다. 비활성중성미자의 존재가 확인되면, 우주의 또 다른 미지의 물질인 암흑물질의 정체를 규명하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김수봉 교수가 일본에 가서 실험을 하는 이유는 비활성중성미자의 존재 확인을 위해 필요한, 중성자 소스를 만들어내는 곳이 한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3년 전 J-PARC의 JSNS^2실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이전에는 전남 영광의 한빛 원전 인근의 지하에서 ‘르노 실험’(Reactor Experiment for Neutrino Oscillations, 줄여서 RENO)을 한 바 있다. 중성미자의 질량을 알아내기 위해 필요한 측정(중성미자의 세 번째 변환상수 측정)을 하는 게 르노 실험의 목표였으며, 김 교수 그룹은 2013년 큰 성과를 올렸다. 그런데 르노 실험이 종료되고 있고, 한국에서 후속 실험은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J-PARC의 연구 그룹이 손짓을 해오자 김수종 교수는 일본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으로 보였다.
김 교수에 따르면 J-PARC의 실험에는 기존 르노 그룹을 더 보강해서 대거 참여했다. J-PARC의 이 실험은 큰 규모는 아니나, 어쨌든 전체 그룹 50명 중에서 한국 그룹이 규모 25명 이상으로 일본 그룹보다 더 크다. 성균관대학의 유인태, 카르스텐 로트 교수를 포함해 10개 대학 교수가 참여하고 있다.
J-PARC에는 다른 물리실험이 있고, 이곳에는 한국의 다른 물리학자가 참여하고 있다. 김수봉 교수에 따르면 안정근 고려대 교수가 고토(KOTO)실험을 하고 있다. 안정근 교수는 핵물리학자이며, 일본 최초의 양성자가속기 KEK-PS 프로그램에서 공부한 바 있다. 고토 실험은 케이온이라는 입자의 희귀 붕괴 현상을 관측해서 새로운 물리학을 찾는 게 목적이라고 한다.
한국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이 일본(KEK나 J-PARC), 스위스 제네바(CERN, 유럽입자물리연구소), 미국(시카고 외곽의 국립 페르미가속기연구소 등), 독일(함부르크 소재 DESY연구소 등)에 가는 건 한국에는 고에너지 물리실험을 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고에너지 물리를 하기에 부합하는 높은 에너지 준위의 입자가속기가 한반도에는 없다. 한국의 대전, 포항, 경주에 있는 가속기들은 고에너지 물리학을 하는 도구가 아니다. 중에너지나 저에너지 물리를 하는 장비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고에너지 물리학자는 해외의 실험시설만 바라보고 있다.
최근 한국의 고에너지 물리학(입자, 핵물리학, 천체물리학) 연구자들을 만나보면 뭔가 요구하는 게 있다. 고에너지 물리학연구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게 아니면 고에너지물리연구 센터라도 세워달라고 한다. 현재 IBS(기초과학연구원)가 대전에 만들고 있는 중이온가속기 시설 부지에 공간을 일부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한국의 입자-핵-천체물리학의 현 주소는 노벨상을 기대할 수 있는 여건과는 천지 차이다. 그 길로 가기는 가야하는데, 첫걸음으로 일단 사무실 한 동을 희망하고 있다. 간절하게 들린다.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중성미자 천문학 시설을 만들자는 계획이다.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십여 명이 달라붙어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KNO(Korea Neutrino Observatory)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중성미자는 핫한 분야이고, 최근 노벨상은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연달아 나오고 있으니 주목받을 만한 연구가 아닐 수 없다. KNO는 일본 J-PARC가 만드는 중성미자 빔을 한반도 남쪽 대구 인근에서 받아볼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기반한다. 고에너지물리센터는 얼마 안 드는 구상이고, KNO프로젝트는 성사되는 데 5000억원 정도가 예상된다. 사이언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도 인류의 지식 창출에 기여하고, 또 그를 통해 노벨상 수상도 희망한다면, 물리학 커뮤니티의 간절한 두 가지 소망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성원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