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우리가 이날을 잊어선 안되는 두 가지 이유
2020-11-17 07:20
을사늑약, 그리고 순국선열의 날
오호라. 개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니,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다...
-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에서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일본 특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참여했고, 회의장 밖은 일본군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회의라고 하기기엔 그 형식이 매우 이상했다. 회의는 이토가 대신들에게 조약에 대한 찬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묻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여기에 반대한 사람들은 곧바로 회의장 밖에 끌려나갔다. 이 와중에 다섯 명의 대신들이 찬성 의사를 밝히자 이토는 즉시 조약의 성립을 선포했다.
사실 을사늑약은 국제법에 어긋나는 조약이었다. 회의에 참여했던 대신들 가운데 황제로부터 조약 체결에 대한 권한을 위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동의'는 어떠한 당위도 명분도 없다. 또한 회의 결과에 대해 황제의 재가를 받지도 않았다. 벼슬아치 다섯 명이 그야말로 나라를 송두리째 팔아넘긴 것이다. 따라서 을사늑약은 두 국가 간의 조약이 아니라, 일제가 군사력을 등에 지고 불법적인 주권 강탈을 자행한 것이다.
이날 황성신문의 사장인 황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날은 어찌 목놓아 울지 않으리)'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하며 전 국민에게 일제의 만행과 조선 관료들의 무능함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장지연은 사전검열 없이 신문에 논설을 게재·배포했다는 이유로 일본 관헌에 체포, 투옥됐다.
그로부터 정확히 34년 뒤인 1939년 11월 21일,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池靑天)·차이석(車利錫) 등 6인의 제안에 따라 망국일(=을사늑약 체결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제정했다.
다른 날도 아닌 11월 17일로 제정한 것은 수치의 역사 위에 민족의 정기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었다. 즉 나라를 잃은 날이 곧 독립을 시작하는 날임을 의미했다. 순국선열의 날은 국권의 회복을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의 희생을 후세에 전하고, 그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이후 1935년부터 광복 전까지 임시정부 주관으로 행사를 거행했다. 1946년부터는 민간단체에서, 1962~1969년까지는 국가보훈처에서, 1970~1996년까지는 다시 민간단체 주관으로 현충일 추념식과 함께 했다. 이후 독립유공자 유족들의 오랜 요청에 따라 1997년 5월 9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면서 정부기념일로 복원, 그해 11월 17일부터 정부 주관 행사로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