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내가 죽던 날' 나의 삶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된다
2020-11-13 00:00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다들 웃고 있는데 나만 볼품없이 울고 있는 하루가, 누구에게나 온다>
연정 작가의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떡하나요'의 일부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온다. 사무치게 괴롭지만 홀로 견뎌야 하는 시간들 말이다. 스스로 '어른'이라 여겨 본 적은 없는데 가끔 이런 시간을 견디고 나면 조금쯤 자란 기분도 들었다. 즐겁지는 않았다.
올해 나 외에도 많은 이가 이런 시간을 견뎌왔을 것이다. 타인에게 전염시키지 않으려 홀로 앓고 있는 긴 시간을. 위로가 필요하지만 모두 외면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날씨가 추워지고, 밤이 길어지는 데다가 연말이 되니 이런 '하루'가 빠른 주기로 찾아오곤 했다.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은 그런 하루를 견디는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영화다. 다행인 점은 섣부르게 위로하거나 거창한 말로 보태려 하지 않고 묵묵하게 옆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위로' '힐링'을 앞세워 관객들에게 딴소리만 늘어놓던 영화들과는 다른 지점이다.
사정은 하루 만에도 달라질 수 있다. 완벽한 삶을 살던 형사 현수(김혜수 분)처럼 말이다. 그는 전남편의 배신과 모함으로 일도 그만두고 홀로 고립되어왔다. 하지만 많은 이의 도움으로 복직을 준비하고 한 소녀의 죽음과 관련한 사건을 맡는다.
사망한 아버지가 연루된 범죄의 주요 증인인 소녀 세진(노정의 분)이 태풍이 몰아치던 날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 현수의 상사는 "종결된 사건이니 보고서만 작성하면 된다"라고 말하지만, 현수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세진은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섬마을로 보내진다. 아버지가 범죄 사건에 연루되었고 그의 주요 증인으로 세진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그를 보호하겠다며 섬마을로 보내지만, 실상은 그곳에 갇힌 신세. 세진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CCTV가 설치돼있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곳도 없어 보인다.
현수는 세진의 행적을 좇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사건을 조사할수록 현수는 세진에게서 저의 상처를 본다. 이제까지 외면해왔던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 그는 사건을 마무리하려 애쓰고 유일한 목격자인 순천댁(이정은 분)은 자꾸만 무언가를 감추려 한다.
'소녀의 죽음을 파헤치는 형사와 사건 이면에 숨은 진실'이라고 하여 '범죄 영화' '스릴러' 장르의 무드를 기대한다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영화다. '내가 죽던 날'은 그것들과 정반대에 서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주 느린 호흡과 언어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처한 상황과 고통을 관객들이 시나브로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은 영화 전반에 걸쳐 진행된다. 인물들의 입을 통해 명료하게 밝힐 수도 있지만, 박지완 감독은 그런 쉬운 선택을 피했다. 위로란 그런 것이다. 묵묵하고 지긋하며 흔들림 없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 어떤 '마음'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것 말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내가 죽던 날'의 두 장면이 남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 게 오래 마음에 남을 듯했다.
한 장면은 영화 말미 순천댁이 세진에게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길 바라며 충고하는 신이다.
상처받은 세진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동생 내외를 떠나보내고 중풍에 걸린 조카를 돌보는 순천댁은 홀로 후회와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세진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그에게서 과거의 자신과 가족들의 모습을 발견해서다.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은 희망도 목적도 잃은 세진이 자신과는 다른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그가 어렵게 한 글자씩 토해낸 말들은 세진 외에도 많은 이들을 위로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극장을 나서며 한 번쯤 언급할 만한 장면이다. 이정은이 아닌 '순천댁'이 이 장면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공감'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배우다.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한 번쯤은 꺼내 볼 수 있는 장면이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장면이 또 하나 있다. 매사 무기력했던 현수가 전 남편과 대면하게 되는 신이다. 현수는 세진의 사건을 조사하며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맞닥뜨리게 된다. 전 남편과 이혼 소송 중이었던 그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고 피하려 했지만, 세진으로 하여금 맞서 싸울 용기를 얻는다. 결국, 세진과 순천댁 그리고 현수는 스스로 상처를 극복해내고 그 모습으로 상대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셈이다.
박지완 감독 역시 그 점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번 영화로 데뷔하게 된 그는 "아무 상관 없는 타인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나의 삶이 누군가에게 변화를 줄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담담한 어조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응원을 전한다.
배우들의 연기와 호흡도 훌륭하다. 배우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는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완벽에 가깝게 표현했다. 현수 역의 김혜수는 그의 내면이 단단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고, 순천댁 역의 이정은은 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증명했다. 신예 노정의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도 인상 깊다. 12일 개봉. 러닝타임은 116분, 관람등급은 12세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