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애비규환' 클리셰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2020-11-11 00:01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지난 3일은 영화 '애비규환'(감독 최하나)의 시사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후 2시에는 언론·배급 시사회, 오후 7시 30분에는 일반 시사회가 있었다. 보통 기자들은 언론·배급 시사회에 참석하는데 이날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저녁에 진행된 일반 시사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선호하지 않는 상황이다. '퇴근이 눈앞에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개봉 전 진행되는 시사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기자들과 영화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언론·배급 시사회, 감독을 비롯해 배우, 스태프들의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을 초대하는 가족 시사회, 이벤트·추첨 등을 통해 일반 관객에게 영화를 공개하는 일반 시사회다. 개봉 전 영화를 공개한다는 건 똑같지만 세 시사회는 매우 다른 분위기다. 영화를 관람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배우, 감독이 인터뷰에서 "시사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보통 언론·배급 시사회에 참석한 경우다. 아무래도 영화를 '일'로 관람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즉각적인 반응은 기대하기 힘들다. '일'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여러 가지를 분석하기도 하고 또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소리 내 웃거나 우는 것도 자제하는 편이다.
그런 이유로 일반 관객과 영화를 관람하면 더 개인적인 소감들이 남는다. 일반 관객들은 누구보다 솔직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인과관계다. 재밌으면 웃고, 슬프면 울고! 솔직하고 자유로운 관객들과 영화를 보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모두 영화에 진심이니까.
이날 만난 영화 '애비규환'은 더 솔직하고, 적나라한 감정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소리 내 웃기도 하고, 함께 한탄하기도 하면서. '추가 근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영화 '애비규환'은 대학생 토일(정수정 분)이 연하 남자친구인 호훈(신재휘 분)과 '불꽃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갖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토일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계획' 속에 사는 아이다. 출산 후 5개년 계획까지 준비하며 결혼을 선언했지만 토일의 부모님은 탐탁지 않은 반응. 부모님의 반응에 서운함을 느낀 토일은 "누굴 닮았는지 직접 확인하겠다"라며 친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고향인 대구에서 여러 인물과 만나며 한 뼘 성장한 토일. 그는 우연한 기회로 마주한 친아버지(이해영 분)의 모습에 실망하고, 별다른 소득 없이 서울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비 아빠' 호훈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토일의 '계획'에는 없는 일이다.
영화의 제목은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라는 의미의 사자성어, '아비규환'에서 시작됐다. 관객들도 이미 눈치챘겠지만, '아비규환' '첩첩산중' 가족사를 다루고 있는 작품. 그중에서도 '아버지'와 '부성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5년을 함께 살았지만, 아직도 어색한 '현재' 아빠와, 철없는 친아빠, 믿음직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는 예비 아빠까지. 토일을 중심으로 또 시점으로 여러 아버지와 대면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대담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발랄한 단편영화 '고슴도치 고슴'(2012)로 이름을 알린 최하나 감독은 재기 발랄한 톤의 '애비규환'으로 확고하게 대중 앞에 섰다. 그의 작품 속 '애비'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동시에 조신한 '남편'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 영화적으로, 사회적으로도 흥미로운 구간을 만들어낸다. 최 감독은 으레 가족 영화가 다루고 있는 불편한 요소들을 미리 제거했고, '성 역할'의 고착이나 '시댁'과 '며느리'의 관계 등을 비틀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해 관객들을 설득한다. 그의 무심한 태도는 관객들에게도 아무렇지 않은 투로 읽히고 그 세계를 받아들이게 돼 흥미롭다.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배제하고 오로지 '토일'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셈이다.
최 감독은 가부장제, 이혼, 재혼, 혼전 임신 등을 다루면서도 어떤 편견에도 반응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무심한 화법은 때로 거칠고 투박하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젊은 감독의 첫 메시지가 여느 때보다 강력한 메시지와 울림을 선사하는 경우다.
영화의 흐름, 전개 방향, 만듦새 등을 꼬투리 잡으려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 모든 것을 '그럴 수 있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작품이 가진 사랑스러움 덕이다. 최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제작진이 만들어 낸 사랑스러운 세계 속, 낯설지 않은 '감정'은 영화를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마법을 가졌다.
배우들의 호흡도 인상 깊다. 영화 '기생충'으로 글로벌한 반응을 얻고 있는 장혜진을 비롯해 최덕문, 남문철, 강말금, 이해영 등 베테랑 배우들이 영화의 중심을 잡아준다. 주연 배우인 정수정은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 그 자체. 아이돌 출신 등 모든 편견을 뒤집고 토일의 대담하고 천연덕스러운 면모를 잘 살려냈다. 그의 사랑스러운 남편 호훈 역의 신재휘 역시 주목해야 할 배우다. 오는 12일 개봉. 러닝타임은 107분 38초. 관람 등급은 12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