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환 칼럼] 누가 이건희 회장의 신화를 이어갈 것인가
2020-10-25 17:06
권위 안깨면 일류 못간다
‘글로벌 500대 기업 순위 221위(1995년)에서 13위(2014년).’ 삼성전자가 미국의 경제잡지 포천(Fortune)이 선정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차지하는 순위의 상승이다. 1987년에 취임해 2014년까지 삼성그룹을 이끌어온 이건희 회장의 업적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1987년 순위(1995년부터 작성 시작)가 없어서 1995년도 순위로 대치한 것이다. 만약 1987년의 순위가 있었다면 200위권을 훨씬 벗어났을 가능성이 크므로 더 급격한 순위 상승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장이 경영을 맡은 27년 동안 삼성전자를 포함한 삼성그룹의 매출은 40배, 시가총액은 300배 이상 커졌다. 덩치만 커진 게 아니라 그 내용도 전 세계 어떤 기업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초일류 최첨단 기술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부친 이병철 회장의 별세 이후 2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세기말적 변화가 온다.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면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선대가 창업한 기업을 물려받은 후대가 가장 하기 쉬운 말이 ‘제2의 창업’이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진 임직원 강연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면서 보다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다. 흔히들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고들 부른다. 삼성그룹을 일본의 소니와 미쓰비시, 미국의 애플과 휴렛패커드 등 글로벌 대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새롭게 경영하겠다는 ‘ 신경영 선언’이었다. 이어서 신경영 10주년인 2003년에는 ‘천재 경영론’, 2010년에는 ‘위기론’, 취임 25주년인 2012년에는 ‘창조 경영’ 등을 주장했다.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취임 일성에 맞게 변화와 혁신을 현장에서 주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굴하고 키워낸 반도체와 스마트폰, 바이오 등의 신사업들은 세계적인 초일류기업들로 올라섰다.
이건희 회장은 대한민국의 경제와 정치에 대한 자신의 소신도 거침없이 밝혔다. 1995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가진 특파원들과의 오찬에서 “잘못된 행정 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으면 21세기에 한국은 일류 국가로 도약할 수 없다”면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했다. 당시 김영삼 정권은 이게 재벌총수가 할 수 있는 말이냐면서 발끈했고,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이를 진화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딱 들어맞는 말이라면서 박수를 쳤고 지금도 엇비슷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2009년 11월 25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기념비적인 날이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함으로써 원조를 받기만 하던 나라에서 후진국을 지원하는 ‘원조 선진국’으로 공식적으로 탈바꿈한 날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이 점령한 30여개 국가 또는 지역 중 일본과 독일,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식민지들이었다. 미국의 원조를 받던 이들 식민지 중 원조하는 나라로 올라선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한 사례이다. 이는 그만큼 한 나라가 가난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올라섰다는 점, 제2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식민지였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로 돌아섰다는 점, 그것도 유일한 사례라는 점은 세계 경제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차지할 수 있는 쾌거이다.
이 같은 대한민국의 쾌거를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중심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기업들을 키워내지 못했다면, 결코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올라설 수 없었을 것이다. 1945년 광복 이후 원조를 받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먹고사는 데 치중했다. 하지만 원조를 발판으로 곧바로 수출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삼성, 현대, SK, LG, 포스코와 같은 대기업들이 역경을 뚫고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고 중소기업들이 뒤따라 나갔다. 그러면서 우리 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업들로 받돋움하고 규모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초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선 것이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올라선 동력이 바로 삼성과 같은 우리 기업들이고, 이를 대표하는 선장이 이건희 회장인 것이다.
이 회장은 고비 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1995년 구미 소재 삼성 휴대폰 공장에서는 전 임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15만개의 휴대폰과 전화기, 팩스기 등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품질의 삼성이라는 ‘애니콜 신화’를 만들면서 1997년 IMF외환위기 당시 30대 그룹의 절반 이상이 망하거나 이름을 바꿔 다는 와중에서도 치고 나갈 수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오히려 그룹 구조조정의 기회로 삼았다. 자동차에서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선택과 집중’이라는 면에서 보면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에 버금가는 전략으로 글로벌 1등 삼성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이건희 회장의 신화를 이어갈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보다 살기 좋은 나라와 경제를 후세대들에게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희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 산업과 경제 전체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을 포함한 수많은 삼성인들을 넘어 대한민국 기업들과 경제가 떠안아야 할 과제이다.
최성환 고려대 경제학과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