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6)] 류영모 집에 인민군이 총을 겨눴다
2020-10-21 08:23
죽음을 연마하는 이에게 '삶의 광기'가 들이닥친, 6.25의 기록
기억과의 전쟁, 망각과의 전쟁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다. 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이 70년 전으로 밀려났다는 의미다. 그해에 태어났던 아기는 70세가 되었다. 전쟁에 참여했을 20대는 이제 90대가 되었고, 부모의 손을 잡고 피란을 떠났던 10대도 80대가 되었다. 이렇게 전쟁 시절에 있었던 이들의 나이를 떠올려 보는 까닭은, 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한국 역사 최대의 비극을 상기(想起)하자는 차원에서가 아니다. 전쟁의 체감지수(體感指數)가 확 낮아지고 기억들조차 역사 속으로 들어가 묻히고 있는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억'의 경계를 넘어가버린 전쟁, '기록'의 건조한 맥락 속으로 들어가버린 전쟁. 이제부터 우리는 기억과의 전쟁, 망각과의 전쟁을 펼쳐야 하는 때로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류영모는 전쟁이 일어났던 그 해 환갑을 맞았다. 식민지가 되기 직전의 나라에서 태어나,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에 30대가 됐고, 갈수록 악화되던 일제 말기를 지나 해방을 맞으면서 숨을 돌리려던 시절에 살육의 포화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태어나는 시기도 제 맘대로 할 수 없거니와, 수시로 닥치는 삶의 조건들 또한 인간의 뜻대로 조절하기 어렵다. 류영모의 60년을 둘러싼 환경은 절망과 고통과 위험이 파상적으로 닥쳐드는 너울의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구한 경험들이, 그의 뜻을 담금질했고 그의 생을 오히려 고요하게 했다면 역설(逆說)일까. 그의 시간 속을 헤매노라면, 문득 그런 '단단한 적막(寂寞)'을 느끼게 된다. 그가 겪은 전쟁의 기록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곳으로 소환된 것처럼 생생하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류영모는 서울 궁정동에 있었다. 경찰대 교수였던 최원극(崔元克)의 집에서 아침 7시부터 '일요강좌'를 진행하고 있었다. 김흥호, 염낙준, 이철우, 전병호, 이동화 등 십여명이 앉아 강의를 들었다. 물론 새벽에 북한군의 남침이 이뤄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강의 도중 최원극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38선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강의는 11시쯤에야 끝났다.
류영모 강의 중에 전쟁 발발
그들은 궁정동에서 효자동으로 걸어나왔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가두방송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입구에서는 경찰들이 검문을 했다. 이제까지 없던 일이었다. 일행은 효자동에서 헤어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울을 덮친 것 같은 음산한 공기가 곳곳을 휘젓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육성(肉聲) 방송을 내보냈다. "우리는 서울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사수(死守)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그 말은 당시 이 나라의 뒤에 버티고 있는 미국을 믿고 한 말일 뿐이었다. 국가는 자체 방어 능력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대통령의 약속이 허공에 황망하게 흩어지듯, 북한 인민군은 서울에 들이닥쳤고 곧 도시를 장악해버렸다.
류영모의 집에도 급박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류의상(류영모의 장남)이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징발됐다. 전쟁 발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류의상은 미군들이 인정할 만큼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전시 공문 번역과 우리말 미군방송을 맡았다. 이후 그는 휴전회담 때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한 바 있다.
류의상이 일본으로 간 뒤, 류영모의 집에는 어머니(김완전), 부인(김효정), 둘째 아들(류자상), 딸(류월상)이 있었다. 그들은 피난을 가지 못했다. 강의를 듣던 염낙준이, 스승이 걱정되어 구기동을 잠시 들렀다 갔다. 그도 피란에 나서지 못한 처지였다. 류영모는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경계를 넘었기에 오히려 초연했지만, 31세의 젊은 류자상이 걱정이었다.
고심 끝에 류자상은 병자(病者) 행세를 하기로 했다. 전쟁이 석달째 진행되던 9월 무렵에 그는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따서 하루 두개씩만 먹었다. 다른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몸무게가 줄고 얼굴은 수척해졌다. 그런 모습으로 골방에 누워지냈다. 그 무렵 북한군들이 총을 들고 들이닥쳤다. 의용군으로 쓸 장정을 찾는 중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거의 초주검 상태로 보이는 류자상을 툭툭 건드리며 일으켜 보더니 혀를 차며 나갔다.
총부리를 막아 선, 아버지 류영모
밤마다 몰래 라디오 단파방송으로 유엔군 방송을 들었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서울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몰래 환호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을 수복하고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경인가도로 진격하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자, 류자상은 죽을 좀 끓여달라고 했다. 어머니 김효정은 미음을 끓였고, 그는 기운을 차렸다.
9·28 서울수복 직전이었다. 류영모 집의 앞뜰 감나무에는 감이 붉은 노을색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기력을 얻은 류자상이, 감이 먹고 싶어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고 있을 때였다. 북한군 세 명이 다가와 류자상을 보고 소리쳤다.
"동무, 양식을 좀 내놓으시오."
류자상은 기겁을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북한군은 말했다. "양식이 없어서 그러니 좀 꿔주시오." 류자상은 쭈뼛한 기분을 느끼며 감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보리쌀을 퍼서 가져다 줬다. 군인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아마도 정상보급이 끊긴지라 약탈 같은 구걸에 나선 것 같았다.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듯 영수증을 써주면서 다음에 올 때 꼭 갚아주겠다고 했다. 그들이 떠나가자, 저승사자를 돌려보낸 듯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이튿날 새벽에 북한군 장교 복장을 한 사람이 권총을 뽑아들고 대문 안으로 들이닥쳤다. "다 알고 왔으니 악질 반동경찰은 나와!" 그가 소리쳤다. 잠깐 공포의 침묵이 흘렀다. 류자상이 겁을 먹은 채 마당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는 경찰이 아니오!"
"거짓말 말라우, 이 새끼. 밖으로 나갓!"
그러면서 장교는 권총을 그의 가슴에 겨눴다.
류자상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교는 그가 버티자 반격하려는 줄 알고 권총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그들은 퇴각 준비를 막 끝낸 참이었는데, 어제 보리쌀을 얻어온 군인들에게서 경찰을 봤다는 얘기를 듣고 떠나기 전에 즉결처분하려고 장교가 달려온 것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멈춰서 있는 류자상. 이제 막 사격을 하려는 인민군 장교. 그때 수염이 날리는 깡마른 노인 하나가 비호같이 뛰어들었다. 아버지 류영모였다. 자신을 쏘라는 듯 아들 앞을 가로막았다. 장교는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류영모가 말했다. "자상아, 나가자면 나가면 되지. 자, 같이 나가자." 주춤거리는 채로 부자(父子)가 함께 엉켜 대문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북한 병사 두 명이 장총을 들고 안으로 겨누고 있었다. 여차하면 지원사격을 할 요량이었던 것 같았다. 장교는 권총을 내리고 류자상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세검정초등학교 교사요.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소."
"마을에 경찰이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소. 난 당신인 줄 알았소. 미안하오."
그들이 물러갔다. 아버지의 용감한 행동 때문에 목숨을 건진 류자상은 눈물을 흘렸다. "그때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난 이 세상에 살아있지도 못할 겁니다." 류영모는 이날의 일에 대해 이후에 별 말이 없었다. 전란 속에서 이런 일을 겪은 것이, 육신이 전부인 줄 알고 광기에 내몰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일 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삶과 죽음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 마음속의 거룩한 생각을 돋우는 일이라고 여긴 류영모의 사생관(死生觀)을 그 참혹의 아수라장 속을 헤매는 군인들이 이해할 리도 없었다. 다만 인민군들은 죽음 앞에서 차분하고 태연했던 노인의 굳센 인상만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갔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이광수, 정인보, 윤기섭, 현상윤 등 이른바 이름이 났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게 납치됐다. 그러나 류영모는 그 무명(無名)으로 하여 관심을 받지 않았고 강제로 끌려가는 일도 겪지 않았다. 사람들은 평생토록 '이름'을 날리고 그것을 남에게 기억시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 전쟁통에 묶여간 것은 바로 그 '이름'이었다. 공명(功名)의 역설을 여기서도 보았던가. 장자가 말한 '성인무명(聖人無名, 천하의 큰 사람은 이름이 필요없다)'이란 말도 떠오른다.
1·4후퇴 때 부산행 열차를 타다
1950년 9월 28일.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파죽지세로 북위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선봉대는 압록강에 다다라 푸른 강물을 손으로 움켜 마셨다. 이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만주 벌판을 채웠다는 뉴스가 들어왔다. 1950년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중국공산군이 그야말로 '사람바다'의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1951년 1월 4일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되찾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남쪽으로 밀려간 날이다. 이것이 1·4후퇴다. 지난번 피란사태 때 미처 떠나지 못해 악몽을 겪었던 많은 이들이 이번엔 모두 짐을 꾸려 서울을 떠났다.
제자 최원극(崔元克)이 찾아와, 류영모에게 피란을 떠날 것을 권했다. 스승을 위해 기차편과 머무를 곳까지 주선했다. 부산에 도착한 류영모 가족은 수정동 언덕 마루에 있는 옥(玉)씨 집에 셋방을 든다. 류영모는 1955년부터 '다석일지'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 기록 속에 '1951년 6월 23일 부산 수정동 옥씨 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 나온다. 전쟁이 끝난 뒤, 그때의 일을 기억하여 정리해둔 귀한 기록이다.
"70살, 60살, 50살, 30살, 20살 안팎 되는 여인들이 일곱 여덟 사람이 있었는데 단추를 맺을 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알던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89살 되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맺을 줄 알 뿐이신가. 단추를 야물게 맺으시는 솜씨다. 그러나 귀가 어두우시므로 이런 말썽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계시다가 집의 딸이 할머니께 여쭈어 본 뒤에야 '옳지 알겠다' 하면서 단추를 맺고 있다. '나도 어려서 어머니께 한번 배웠는데 이제는 잊어버린 축에 들게 되었나' 하고 솜씨를 잇는 뜻을 다시 배웠다."
단추 다는 솜씨를 보여준 어머니 김완전은 이런 일이 있은 뒤 넉달이 되지 않아 생을 마친다. 1951년 10월 10일 전쟁통에 피란지 부산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이때 화장(火葬)을 했기에 천안 풍산공원 묘지에는 아버지 류명근의 묘는 있으나 어머니의 묘는 없다. 류영모는 3·1운동 이후 아버지의 옥살이를 기억하면서, 일본 형사 앞에서 자신 대신 모든 책임을 덮어쓰고자 한 아버지의 눈빛을 기억했다. 아버지의 눈빛을 기억하던 류영모는 문득 어머니를 바라보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눈길을 늘 상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눈길을 생각하면 한없이 평화로운 감정이 들었으며 삶의 온기를 느꼈다.
피란지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그에게 어머니는 묵묵히 가정을 지켜온, 꺼지지 않던 화롯불 같은 존재였다. 부친을 여읜 뒤, 일제 말기와 해방을 함께 넘었던 어머니는 전쟁의 피란길까지만 동행한 셈이다. 류영모는 이 영별(永別)을 "혈육의 근본은 흙"이라고 덤덤하게 표현해놓았지만, 그의 일기에는 그 날을 헤아리는 기록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육신의 이별은 거기까지였다. 화장을 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서울 YMCA총무 현동완(玄東完)은, 피란지 부산에서도 바쁘게 움직였다. 곳곳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정부 지원 양곡으로 죽을 쑤어 굶주린 피란민들을 구호했다. 그는 광복동의 YMCA 회관에서 류영모의 공개강연을 여러 번 열었다. 고봉수(高鳳壽)라는 사람은, 류영모 선생 강의를 듣고 삶의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여기엔 2만2천일 기념 류영모 서울강연을 들었던 염낙준도 찾아왔다. 그러나, 강의 내용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이때 류영모가 들고다니던 작은 노트에 '맹자초(抄), 장자초'란 말이 보인다. 맹자와 장자를 인용해, 진리를 잃어버린 전쟁의 광기와 어리석음을 질타했던 것 같다.
그는 전쟁과 관련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1955년 강의). "공산주의 천하가 되면 먹고 사는데 많은 발전이 된다고 합니다. 밥 이상의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뜻이 있어요. 진리가 그것이고 하느님이 그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아무리 좋은 이상을 내걸어도 죽이기를 좋아하고 거짓말을 떡 먹듯이 한다면 그것은 악마의 짓입니다. 사람은 이해타산으로 싸우기를 좋아하는데, 진짜 싸울 대상은 나이지 남이 아닙니다. 세상에 예수처럼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이는 없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겠다는 놈만 가득찼으니 우리가 다 김일성이지 무엇입니까?"
류영모는 일요일에는 현동완의 단칸방으로 출근했다. 현 총무는 그를 모시고 '일요강좌'를 열었다. 방이 하나 밖에 없는지라, 강의 시간에 그의 아내 권봉겸(權奉謙)은 밖에서 내내 서성이며 끝나기를 기다렸다.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현동완의 피란지 구호사업을 높이 평가해 보사부장관 자리를 맡기려 했다. 하지만 현동완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