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3)] 십자가는 무엇인가

2020-10-12 10:35
죽음 앞둔 예수의 기도, 요한복음을 강의하는 류영모

[영화 'The King of Kings(왕중의 왕, 1927년작, 세실 데밀 감독)의 한 장면.]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의 기도엔 뭔가 있다

류영모는 1943년 성서조선 폐간호에 '예수의 기도'를 새로 풀어서 실었다. 그는 '결별의 기도'를 늘 새기는 사람이었다. 헬라어로 된 기도문을 스스로 번역해 자주 암송하였는데, 그 제목을 '옛다시 가온 보입'이라 했다. 있다시 온(하늘에서 본디의 '나'가 그대로 온) 이후에, 옛다시 가온(여기 있던 '나'가 그대로 돌아간) 예수가 하느님께 보이는 글이란 의미다.

조선인의 민족얼과 신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기어이 성서조선의 말문까지 막아버린 무렵에, 류영모는 왜 저 결연한 '죽음 앞의 기도문'을 실었을까. 이 세상의 폭력과 모순과 부조리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그의 신앙적 입장은 단호함을 넘어 오히려 고요했다. 삶의 목적을 신에게로 돌아가는 데 두었기에 예수가 담담히 그의 임종을 대하듯 류영모는 '임박한 절필' 앞에서 '천고(天告, 하느님께 드리는 말)'를 올린 것이다.

류영모가 '결별의 기도'를 늘 스스로의 말처럼 품었던 것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원래 기도는 이러해야 합니다. 무슨 감동을 주기 위해, 고개를 숙이게 하고 강연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판에 박은 듯한 기도와, 예수가 한 이 기도를 자세히 비교해 보십시오. 요한복음 17장을 수없이 읽어야 합니다. 거짓된 기도, 허식된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너무 괴로우니 빨리 데려가 달라는 기도는 하면 안됩니다.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3절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류영모는 과연 예수가 하느님에게 기도를 하며 자신을 이렇게 말했을까 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예수의 말이라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그의 보내신 성령을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하느님이 보내신 성령이 바로 자신인 예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굳이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 '하느님이 보내신 자'라고 강조하는 말로 바꾼 까닭은, 요한복음 기자(記者)나 교회의 주관이 개입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류영모는 예수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직접 칭하는 데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기독교를 믿는 이는 예수만이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입니다. 어떤 시대, 어떤 인물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산소가 공급되듯이 공급되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성령입니다."

1930년대 김교신은 서울 종로YMCA에서 열리는 류영모의 요한복음 강좌에 대한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요한복음 17장3절은 예수가 영생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는 구절입니다. 기도할 때 이 말을 언제나 외워야 합니다. 절대유일을 알고 거기에 붙잡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에 삶의 참맛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생한다고 하는 것은 피와 살과 뼈가 사는 게 아니고 성령인 말씀이 사는 것입니다."(다석어록)

'결별의 기도'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문이다. 류영모가 이 기도에 각별한 의미를 느꼈던 까닭은, 육신으로 살았던 '성령의 인간'이, 육신을 마침내 버리는 상황에서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며 맞이하는가를 보여주는, 위대한 스승의 전범(典範)을 대하는 심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죽었으며, 어떻게 깨달음을 완성하여 영생 속으로 들어갔는가. 그 키워드(KEY WORDS)가 그 안에 숨쉬고 있다.
 

[영화 'The King of Kings(왕중의 왕, 1927년작, 세실 데밀 감독)의 한 장면.]


그 죽음의 고통을 감정이입해본 적 있는가

예수의 죽음은, 낱낱이 공개되고 전시된 가장 참혹한 육체적 종말 중의 하나였다. 의학박사 트루먼 데이비스(Truman Davis)와 알렉산더 메드럴(Alexander Metherell)은 사형집행 과정에서 예수의 육신에 일어났던 고통에 대해 의학적인 소견을 밝혀놓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예수는 태형을 당했다. 가죽 채찍 끝은 39개의 가닥으로 되어 있으며 가닥마다 쇠구슬과 뼛조각이 들어 있었다. 뼛조각은 살을 찢었고 쇠구슬은 찢어진 근육조직을 크게 벌렸다. 어깨와 등, 엉덩이와 정강이에 채찍이 가해졌고 골격 근육이 찢어져 피범벅이 되었고 살점은 리본처럼 매달려 있었다.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십자가의 수직기둥은 땅에 고정되어 박혀 있었고, 가로들보(패티블룸(patibulum))는 땅에 놓인 채 예수를 못 박았다. 약 18㎝의 못을 손목에 박은 뒤 수직 기둥에 올려 고정했다. 못 박히는 고통은, 팔굽의 척골신경을 펜치로 비틀어 으깨는 정도의 통증이라고 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뒤 팔이 6인치 정도 늘어났고 어깨는 탈골 되었다. 십자가는 질식해서 죽이는 사형틀이다. 근육에 충격이 가해지고 횡경막이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고정되면서 질식한다. 예수의 몸을 90도 비틀어 나무에 묶고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팔목과 복숭아뼈 아래에 쇠못을 박았다. 이럴 경우 바로 호흡곤란이 오는데, 이때 나무망치로 무릎뼈를 쳐서 부러뜨려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도록 하고, 결국 기도가 막혀 죽음에 이른다.

예수는 짧은 숨을 한번이라도 쉬어보려고 몸을 위로 밀어올리는 사투를 한다. 격한 경련으로 몸을 밀어올려 숨을 내뿜으면서 산소를 한 모금 마시지만 뇌와 가슴에 피가 공급되지 않아 고통이 극한에 이른다. 본능적으로 예수는 발에 힘을 줘 피를 몸의 윗부분으로 돌게 한다. 이런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고통을 묵묵히 견디던 예수는 마지막에 절규를 내뱉는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5:46).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신에게 기도를 하면서 몹시 괴로워하는 장면이 성서에 등장한다. 이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마가복음 14:33~36).

예수가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독생자로 극한의 육체적 고통 앞에서, 결코 담담하거나 초연할 수 없었다는 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자(人子)조차도 육신을 끊고 하느님과 접속하는 일은 이리도 어려웠다. 고통을 못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고통을 느끼면서 마지막에는 언어도 없는 단말마(斷末魔)의 비명만을 남긴 채 임종했다는 것은 육체의 검질긴 저항이 어떠한 것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일대전환. 예수의 기도는 피와 뼈와 살을 이겨내는 기도였다. 
 

[다석 류영모(전미선 그림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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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가 우리말로 새롭게 번역한 '요한복음 17장']

# 예수 그 자신을 위한 기도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뚜렷하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살팽이에게 늘삶을 주게 하시려고 거느리는 지팽이를 저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늘삶은 곧 오직 하나이신 참한웃님과 그의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누리에서 뚜렷하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맨첨부터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뚜렷함으로써 이제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뚜렷하게 하옵소서.


기독교 사상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天父) 사상'이라고, 류영모는 생각했다. 예수를 스승으로 받든 까닭은, 그가 하느님 아버지에게 목숨까지 바치며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비유한 일은 동서양 종교사상에 드물지 않으나, 그 하느님 아버지를 일상 속에서 육친의 아버지를 부르듯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예수가 처음이 아닐까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간절히 부르는 이 모습만으로도, 그는 인류에 큰 공헌을 했다고 류영모는 말했다.

지상에 육신을 낳은 육친(肉親)이 있다면, 하늘에는 성령을 낳은 '영친(靈親)'이 있다. 그는 염천호부(念天呼父, 하느님을 생각하고 아버지를 부르는 일) 하는 것이 참믿음이요 참효도라고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부른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는 내 마음속에 있다. 생각은 내가 하지만 나만이 하는 게 아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도 생각하고 계신다. 그렇게 하여서 나도 있다"(류영모 '다석어록).

예수는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했다. 때는 무슨 때인가. 바로 예수 자신이 죽을 때를 말한다. 류영모는 이를 시자명야(時者命也, 시간을 타고난 인간은 죽음의 천명을 받는다)라고 했다. 그 천명(天命)은 바로 '죽을 때가 이르렀다'는 명령이다. "예수는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죽음을 위해 왔다고 했다. 죽으러 왔다. 예수는 죽음을 깨어남(覺)으로 본 듯하다. 나무가 불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죽을 때 죽어야 하고 죽을 터에서 죽어야 하고 죽을 람(이유)에 죽어야 한다. 새가 알맞은 때에 알을 까듯이 지금이 죽을 적시(適時)라고 생각했다"(류영모 '다석어록).

그는 '영광'을 '뚜렷하게'로 옮겼다. 아버지가 아들을 뚜렷하게 하는 것은 성령을 주는 것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몸의 생명보다 값진 얼의 생명이 뚜렷해지는 장면이다. 살팽이는 '이리저리 도는 살몸뚱이[肉身]'를 말한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

누리 가운데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 것이었는데 내게 맡기셨으며 저희는 아버지 말씀을 지니었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누리를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이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뚜렷함을 받았나이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누리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그득히 가지게 하려 함이나이다.
내가 아버지 말씀을 저희께 주었사오매 누리가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누리에 붙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누리에 붙지 아니한 탓이니이다.


류영모는 맹자에 나오는 '우기덕야(友其德也)'란 말을 강의에 인용하곤 했다. '벗이란, 벗이 지닌 참마음(성령)을 벗하는 것'이란 이 의미는, 동지(同志)나 지기(知己)가 가지고 있는 말뜻과 같다고 했다. 기독교 사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이 보낸 성령인 얼나로 사귄다는 뜻이다. 성령은 한 생명인지라 사람과 사람을 참으로 통하게 한다. 성령이 아니면 참으로 통할 수 없다. '내가 누리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그득히 가지게 하려 함이나이다'란 예수의 말이 바로 그, '우기덕야'의 마음이다.

예수는 죽음을 '기쁨'이라고 말했다. 고통 속의 죽음이 왜 기쁨이 되는가. 류영모는 임종에 다다라 일초도 더 늘일 수 없는 게 생명이며 그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몸으로는 누구나가 사형수이며 예수만이 십자가 사형수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가 내려져 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잡념과 욕망과 교만이 찾아온다. 예수의 죽음은, 죽음이 삶을 삼킨 게 아니라, 삶이 죽음을 삼킬 수 있었기에 얼삶의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섬김에 있다. 사람 본연의 모습은 섬김에 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참으로 하느님을 받들고 사람을 섬김에 으뜸가는 목숨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느님과 인류를 섬기는 것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다."(류영모 '다석어록') 예수가 제자들에게 드린 기도는, 제자들에게 '말씀의 이유(離乳)'를 시키는 절차라고 볼 수 있다. 믿음의 무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Counselor)라고 한다. 이 말씀의 젖떼기야 말로 보혜사 예수가 제자들을 성령으로 직접 나아가게 하는 사랑의 진면목이었다. 

#모두(우리)를 위한 기도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누리에서 데려가시기를 바람이 아니요 오직 못된 데 빠지지 않게 돌보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누리에 붙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누리에 붙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참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 말씀은 참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누리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보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참으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로 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누리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뚜렷함을 내가 저희께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는 모든 이들이 참(진리)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을 기도하고 있다. 십자가 보혈로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낸 참인 '성령'으로 하느님의 부림을 스스로 받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겨우 초발심(初發心)의 경계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그의 죽음이 깊은 영감(靈感)이 되어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는 것에 대해 돌이켜 보도록 하라는 얘기다. 하느님과 예수가 하나가 된 것 같이, 많은 이들에게도 '하나'가 될 그런 기회를 주도록 하라는 기도다. 

'아버지께서 나를 누리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보냈고'라는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하느님이 성령으로 예수를 이 상대세계 세상에 보낸 것처럼, 나 또한 절대세계로 가는 존재로 많은 사람들을 성령으로 상대세계 세상에 보낸다는 기원을 담은 것이다. 이 기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은혜와 축복의 말들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려함이니이다'로 이 기도를 맺고 있다.

류영모는 이런 시를 읊었다. 

父爾絶大中 不肖微小子 存存唯一在 孜孜代多仔
(부이절대중 불초미소자 존존유일재 자자대다자)

"아버지 당신은 절대세계 님입니다
저는 못나고 미약한 어린 아들입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저마다 오로지 '하나'로만 있는 것이옵고
아들(子)과 아버지(父)는 저마다 수많은 예수(人子, 하느님의 아들)를 대신할 것입니다


孜孜代多仔(자자대다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예수의 길을 따를 것이라는 류영모의 기도다. 자(子)와 부(父)를 합성한 글자(부지런할 자(孜), 보통의 부자관계)와, 인(人)과 자(子)를 합성한 글자(새끼 자(仔), 人子는 예수다)를 활용해, 수많은 '육친의 아들'이 결국 '하느님 영친(靈親)의 아들' 예수를 따를 것이라고 기도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