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8)] 류영모는 왜 노자를 펼쳐 기독교를 강의했나

2020-09-21 08:35
육체와 상대세계를 벗어나라, 신은 거기에 있다

[다석 류영모 [그림 = 전미선]]



상대세계의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

노자 도덕경은, 춘추전국의 난세에 등장해 '치세(治世)'의 길을 일깨워주는 리더십 바이블로 자주 읽혀왔다. 이 경전에 대한 이 같은 이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자는 그 시대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파격적인 '신의 리더십'을 거론하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가 지도자의 도(道)와 덕(德)을 말하면서, 그 벤치마킹할 대상을 '신(神)'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독창적이다.

그 신은 고대에 유행했던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의 신이 아니었고, 초인적인 인격신(人格神)도 아니었다. 노자의 신은, 만물을 일궈낸 우주의 허공이었다. 그 허공은 절대세계에 속해 있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상대세계에 속해 있어서, '도(道)'를 통하지 않으면 허공의 뜻을 알 수 없다고 보았다. 류영모는 허공을 뜻하는 현(玄)이 '검'과 같은 말이며, 우리말로 표현하면 하느님이라고 했다. 

"선조들은 하느님을 검이라고 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도 검의 뜻이다. 가락국을 세웠다는 금수로왕도 검의 자손이란 말이다. 우리가 말하고 듣고 하는 것도 이 속에 있는 검이 알리니까 그런 것이다. 검이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 (다석 류영모 어록)

노자는 천지만물을 만들어낸 허공의 뜻이야 말로 인간 세상 최고의 리더십이라고 밝혔다. 상대세계에 사는 인간이, 절대세계의 허공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노자가 접근하는 방식은 간명했다. 상대세계에 사는 인간이 자신이 상대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으면, 상대세계의 모순과 한계를 읽어내고 그것을 극복하여 절대세계 허공의 뜻을 따라갈 수 있다고 믿었다. 도덕경은 그걸 말하는 책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도덕경 2장에는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세상의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알지만 사실은 추한 것일 수 있다. 모두가 '선한 것이 선한 것'이라고 알지만 사실은 선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등장하면 그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한 것일 수 있다. 신데렐라가 등장하자 그의 새엄마가 추녀로 여겨지는 게 바로 그것이다. 어떤 아름다움도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추해질 수 있다. 세월을 이기는 아름다움은 없다고 우린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인간은 한때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것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는 모두가 상대적이고 잠정적이고 주관적인 것일 뿐이다. 미(美)만 그렇겠는가. 선(善)도 마찬가지다. 류영모는 말했다. "이 세상에는 흔히 이만하면 미(美)지, 선(善)이지 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선미가 없다."

노자는 1장에서 도(道, 진리)조차도 상대적인 세상인 인간세계에선 한결같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명칭들 또한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衆, 사물)의 세계와 묘(妙, 우주허공)의 세계를 나눠 말했다. 앞은 상대세계고 뒤는 절대세계다. 노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진(眞, 도라고 표현했다)과 선(善)과 미(美)가 모두 상대세계에서 말하는 상대적인 진선미일 뿐이며, 변하지 않는 것, 절대적으로 그대로인 것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말한 뒤에 노자는 상대세계의 상대적인 잣대들을 제시한다. 어렵고 쉬운 것, 길고 짧은 것, 높고 낮은 것, 사물의 소리와 동물의 소리, 앞과 뒤. 이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 빈곤'이 갈등을 부른다

도덕경 제3장에선 '상대적 빈곤'을 없애는, 신의 리더십을 귀띔해준다.

不尙賢 使民不爭(불상현 사민부쟁)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똑똑함'은 좋은 가치로 보이지만,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을 표현하는 상대적 잣대일 뿐이다. 똑똑한 것을 높이 치면, 서로 똑똑하다고 주장하는 분쟁이 일어나고 서로에 질시가 생겨나 사회의 안녕을 해치게 된다. 또 재화는 좋은 가치로 보이지만, 재화를 귀히 여기면 그 재화를 훔치는 도둑이 생겨나 사회의 갈등을 만들어낸다.


사회의 안녕을 해치게 되는 원인은, 백성(씨알)에게 함부로 욕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지식과 재화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노자는 상대세계에서 생겨나는 이런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이 공동체의 평화로움을 깬다는 점을 갈파했다. 그가 꿈꾼 세상은 '원시공산주의 사회'의 평화나, 혹은 동물들의 공생 및 동거와 비슷했다. 상대적인 가치를 자극하는 일은, 그 가치가 비록 좋은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불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상대세계 인간의 마음상태는 짐승이다. 깜짝 정신을 못 차리면 내 속에 있는 하느님 아들을 내쫓고 이 죄악의 몸뚱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노자가 말한 지식과 재화는 죄악의 몸뚱이가 만들어낸 '가치'이다.

노자가 사회의 가치를 보는 관점을 철저히 '절대세계'의 시선으로 하는 까닭은, 상대세계의 상대적인 관점들을 충격적으로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재물은, 절대세계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상대세계에서 그것을 중히 여겨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논점이다.
 

[노자]



아무리 써도 남는 것이 하느님이다

도덕경은 상대세계 문제의 본질을 파헤친 뒤 바로, 절대세계를 그려보인다. 그게 도덕경 제4장이다.

道冲而用之 或不盈(도충이용지 혹불영)
淵兮 似萬物之宗(연혜 사만물지종)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도(道, 진리)는 비어있어서 아무리 퍼 담아도 가득 차지는 않는다. (비어있음. 이것이 노자가 처음으로 언급한 절대세계의 모양이며, 그것이 상대세계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도는 깊어서 만물을 낳았다. 너무나 맑아서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 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날카로운 것을 부드럽게 하고 얽힌 것을 풀고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을 뭉치게 한다(挫銳解紛 和光同塵). (이런 현상을 어디서 보았는가. 자연에서 우리가 보지 않았는가.) 


"도는 허공이다. 천지만물을 낳을 만큼 깊고, 있는지도 아리송할 만큼 맑은 허공이다." 이것이 노자가 한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허공의 아들이라 허공을 바라야 한다. 우주는 허공 안에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과 허공을 동일시했다.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노자의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했다. 그러나 노자의 하느님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개념의 '인격신(人格神)'이 아니다. 노자의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한 절대세계의 '허공'이다.  노자의 행간을 살피면, 하느님은 텅빈 골짜기로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 같다. 첫 생명은 무(無)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무(無)의 자식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은 생명을 일일이 창조하지 않았고, 생명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자율방식 혹은 위탁방식으로 생태계가 유지되게 했다.

노자는 이렇게 형성된 생태계의 법칙이, 절대세계에서 파견보낸 '하느님의 뜻'이라는 점을 거듭 밝혔다. 인간은 그 하느님의 뜻을 받아내어 스스로의 삶에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자의 하느님은 사람같이 생긴 존재도 아니고, 초인도 아니며, 오로지 저 자연으로 드러나는 생멸과 순환의 이치 속에 들어있으며, 자연 속에 '진리'로 존재하는 것들의 원천(源泉)이라고 생각했다. 자연 속에 법칙과 진리로 존재하는 것들은, '최고의 인격(人格)'이라 할 만한 높고 깊은 도를 지니고 있다.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은 '자신'과 닮은 존재를 구상했으며, 그것이 도(道)로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노자의 신 또한 인격신이라 할 수 있다.

노자는 인간의 급(級)을 매겨놓았다. 가장 아래의 급은 '신'을 무시하는 사람들(侮之)이다. 그 위의 급은 겁내는 것(畏之)이다. 또 그 위의 급은 좋아하고 우러르는 사람들(親而譽之)이다. 가장 높은 급은, 그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不知有之)이다.(도덕경 17장) 가장 오묘한 것은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의 인격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인격성과 인간의 인격성이 같아졌기에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워진 상태를 말한다. 즉 신이 가르칠 필요가 없는 인간. 신성을 이룬 '신격인(神格人)'이야말로 인격신이 강림하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신격인이 바로 성인이다. 

인간 육신을 벗지 못한 신

기독교의 하느님은 어떤가. 신에 대한 기독교의 상상력은, 고대의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상상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신화적 신은, 육체가 있으며 감정도 있으며 인간과 같은 실수와 죄도 저지르는 '인간을 닮은 신'이었다. 구약에 등장하는 신은, 그리스의 신과 비슷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후 기독교의 신은 육체를 벗어났지만, 노자의 표현처럼 아무런 실체가 없는 '빈 것'으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인간을 닮은 형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이 형상없는 '숨은 신'이 되는 것은 예수의 시대 이후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본떠서 창조되었으나, 그 '형상'은 육체적이고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적 특질'을 본떠서 창조되었다고 본다. 하느님은 절대세계에 있고 인간은 상대세계에 있기에, 상대세계의 형상이나 경험으로 하느님을 접할 수 없다. 이런 완전한 단절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믿음'뿐이며, 믿음으로 강화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동질성'의 힘뿐이다. 이 동질성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뜻'이 바로 성령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많은 기독교도들에게 완전하게 공유되거나 동의된 것은 아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하느님의 '육체적 형상'을 이미지로 그리고 있으며, 육체적 특질로 다가오는 하느님이 인간과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대 전통의 상상을 기반으로 한 '육체적 인격신'이야 말로 매우 강력하고 뿌리깊은 믿음의 바탕이며 근거가 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우주의 근본 원인이나 도덕의 근원, 미의 근원을 하느님으로 보는 인격신의 관점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엔가 인간의 익숙한 신관(神觀)은 물질세계의 형상을 빌린 하느님을 떠올리기 쉽다.

신은, 육체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문제다

류영모는 '육신'에 대한 서구의 집착이, 기독교를 왜곡시켜 놓은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성령 잉태나 부활, 기적 같은 것들은 모두 육신으로 보여준 이적(異蹟)이다. 류영모는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육신을 받은 독자(獨子)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독생자(獨生子)임을 강조한다. 모든 기적은 성령에 있으며, 부활이나 영생 또한 성령의 문제라고 말한다. 부활은 몸이 되살아난 게 아니며 영생은 몸이 영원토록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육신은 하느님에게 소용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몸뚱이는 혈육의 짐승이다. 질척질척 지저분하게 먹고 싸기만 하는 짐승이다. 한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몸나에서 얼나로 솟날 때 비로소 사람이 회복된다. 예수가 말한 인자(人子)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회복된 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로고스적 관점이 거듭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까닭은, 신을 물질세계의 존재로 소환하려 하기 때문이다. 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려 상대세계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신일 수 없다. 신이 물질세계에서 권능을 발휘하며 무엇인가를 초자연적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믿는 모든 믿음은, 기복적(祈福的) 사유의 결과다. 약한 인간이 상상의 무엇에 의지하려는 욕망에 부응하는 지점에 등장하는 '물신(物神)'일 뿐이다.

류영모는 말한다. "하느님이 계시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절대)를 그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류영모는 노자를 통해, 기독교의 신관(神觀)을 일신했다. '빈탕'(空)이 세상 창조의 원천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갈파했다. 노자는 빈탕의 리더십으로 세상을 깨우치려 했지만, 류영모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빈탕'의 절대세계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세웠다. 과감히 육체 중시의 기복적인 면모를 혁신하고, 몸나를 이겨 오직 얼나(성령)로 나아가는 영적 수행을 실천해 나갔다. 도덕경은, 류영모를 만남으로써, 21세기 인간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고차 인격(高次人格)을 지닌 하느님을 자율적으로 접속하는 참된 도(道)를 드러내게 됐다. 류영모가 놀라운 사상가인 건 여기에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