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74)] 나는 얼나 제너레이션이다

2020-10-14 09:32
2만2천날 기념강연회와 하루살이 인생

世와 代, 한 사람의 삶과 '뿌리 이음'

세대(世代, generation)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세(世, 사람의 한평생)와 대(代, 대신해서 잇는 것)를 합친 말이다. 세대는 한 사람의 삶과 그 이후를 물려받는 다른 사람의 삶의 관계를 말한다.

세와 대는 가계(家系)체계를 구성하는 핵심개념이다. 자신의 뿌리가 되는 조상을 1세(世)로 할 때, 2세, 3세로 내려와 자기까지 세어 몇세손(世孫)이라고 말하게 된다. 족보는 대개 가문의 세계(世系, 세의 계통)를 밝히는 것으로 세보(世譜)라고 부른다.

대(代)는 자신을 빼고 계산하는 상하의 관계도이다. 위로 부모는 1대이며 조부모는 2대, 증조부모는 3대가 된다. 아래로는 자식은 1대, 손자손녀는 2대, 증손자증손녀는 3대가 된다. 세(世)는 혈족의 먼 근원을 밝히는 것이며 대(代)는 자기 위의 90년과 자기 아래의 90년을 밝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한 세대는 30년으로 잡는다. 30년은 수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대 교체가 일어나는 핵심시기를 말한다. 공자는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고 말했다. 30세(歲)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하늘 아래 이윽고 똑바로 서는 나이라고 본 것이다. 30세는 자식의 생산(生産)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때로 보기에, 세대가 바뀌는 삶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30세는 또한 육체적인 성장과 부모의 보육(保育) 행위가 완전히 끝나는 때이며, 또다른 세대를 보육하는 일을 경험하는 때라고 볼 수 있다. 몸의 성장이 멈추면서, 인간은 영(靈)의 성장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성장기'를 맞이한다. 영적인 성장은 인식의 성장이며 성찰의 진전을 낳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생각'이 고도화하면서 자신의 생명이 종료되는 죽음을 살피게 되는 때이다.

60세는 하느님 말씀 듣는 귀가 제대로 되는 때

류영모의 30세는 1919년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는다. 만세운동 거사 자금 6000원을 맡았던 류영모를 대신해 부친 류명근이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105일간 옥살이를 했다. 31세 때인 1921년 류영모는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한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의 사상을 기독교의 '비정통 신앙'으로 스스로 규정하며 자기 중심을 세웠다. 제자 함석헌을 만난 시기이기도 하다.

류영모의 60세는 그 이후 30년간의 영적 성장을 정리하는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40대 때 집중적으로 겪은 주변의 죽음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깨달아가기 시작했으며 북한산(은평면 구기리) 칩거로 주체적인 삶의 방식을 마련했다. YMCA 연경반 강의와 활발한 성서조선 기고 활동, 광주 동광원의 정신적 지도 활동 등으로 영적인 역량을 세상에 발휘해왔던 시기들을 지나, 주체적인 사유를 펼치는 '한 시대의 스승'으로 자리매김 했던 때이다.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춰가는 때이기도 했다. 1955년(65세)에 1년 뒤 죽음을 예고한 '사망예정일'을 선포하기도 한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다석일지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공자는 육십에 이순(耳順)이라고 하였다. 60살이 되면 영원한 존재의 소리를 듣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다. 사람은 짐승처럼 몸을 바치자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바치자는 것이다. 하느님은 고요히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印)치듯(도장을 찍는 듯이) 교훈하신다. 존재의 소리가 들려온다. 하느님의 말씀을 막을 길이 없다. 생각할 때, 기도할 때, 잠잘 때 꿈속에서도 말씀하신다. 존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존재의 소리가 나를 멸망에서 영생으로 구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공상이 아니다. 진실이다. 하늘에 비가 차도 그릇에 따라 받은 물이 다르듯이 사람은 마음의 진도에 따라서 존재의 소리를 듣는 내용이 다를지도 모른다"(류영모 '다석어록').

류영모는, 공자의 이립(而立)과 이순(耳順)을 신학적으로 읽어냈다. 30세는 믿음의 뜻을 세워 하느님 앞에 주체적으로 서기 시작한 때를 가리키며, 60세는 마침내 하늘을 향한 귀가 열려 존재의 소리를 듣는 때라고 본다. 1950년 3월 13일이 그의 60세(우리 나이로 61세) 환갑일이었다. 류영모는 환갑잔치를 벌이는 일을 불편해 했다. 음식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것은 죽은 이를 대접하는 방식이지 산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류영모가 나이를 기념하는 것에 대해 손사래를 친, 보다 근본적인 까닭은 그것이 육신에 대한 경배이기 때문이었다. 60년을 살아낸 몸뚱이의 생존을 과연 기념해야 할 일인가. 그는 인간의 뿌리를 찾는, 유교적인 세대 관념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류영모에게 '세(世)'는 오직 그 뿌리인 하느님이며, '대(代)'를 잇는 것은 혈육을 통해서가 아니고 정신의 계승과 영성의 공유를 통해서라고 생각했다. 류영모는 '하느님 세대'였고 오직 '얼나 제너레이션'이었다.
 

[다석 류영모]

2만2천일 기념강연이 열린 사연

환갑 전날인 12일 그는, '잔치'를 피하여 천안 광덕면 보산원리에 있는 개천(開天)골로 내려갔다. 이 땅은 일제말기에 구기동 농장에서 거둔 채소와 과일을 서울의 시장에 내다 팔아 은둔지로 사둔 광덕의 오지 땅이었다. 천안역을 내려 50리를 걷는 길이었다. 그곳 마을사람들이 류영모를 반기며 떡국을 대접했다. 주민 이형국의 집에서 하루 동안 떡국 한끼를 먹은 그는 "이만하면 환갑 땜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실을 늦게 알게된 서울YMCA 총무 현동완이 이 귀한 기념(류영모의 환갑일)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면서 강연 이벤트를 주선했다. 석달이 지난 셈인 6월 6일에 '류영모 탄생 2만2천일'을 기념하는 초청강좌가 열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9일 전이었다. 이후 전쟁으로 타버리게 되는 구YMCA건물 강당에는 전쟁의 포화가 아직 미치지 않았던 시절의 마지막 강의가 진행되었다.

현동완은 류영모에게 식탁과 중절모를 선물했다. 비중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생소한 '날짜' 기념식을 열자, 신문기자가 찾아와 저분이 누구냐고 묻기도 했다. 그만큼 류영모는 당시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이때 기념촬영한 사진이 남아있다. 맨 아랫줄 가운데에 수염이 긴 류영모는 한복을 입고 앉았으며 그 앞줄 왼쪽 넷째에는 비슷한 검은 수염을 한 함석헌이 앉아있다. 이 사진에는 김흥호, 염락준, 김우현, 배선표, 홍병선, 이정호, 이철우, 한인옥, 송후용, 전병호, 이동화 등 50명의 얼굴이 보인다.

 

[다석 류영모의 2만2천날 기념강연회 사진, 한가운데 맨앞줄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이가 류영모다.]

하루살이, 한끼살이, 하늘살이

나이는 '낳이' 혹은 '낳'에서 나온 말이다. 낳이는 나히가 되고 나이가 되었다. 그 뜻은 '낳음을 받아 살아온 햇수'를 말한다. 나이를 세는 단위가 '살'인 것은, 살이를 가리킨다. 조선 세종 때 나온 '석보상절'에 '내 나히 열힌 저긔(내 나이 열살인 적에)'라는 구절이 나온다. 옛 사람들은 나이를 '낳살'이라고 했다. 낳살 깨나 먹은 양반이 처신이 어찌 그러하냐고 질타하기도 했다.

'나이'가, 태어난 때를 강조한 까닭은 뭘까. 태어나 생존하는 일이 지금에 비해 훨씬 어려웠던 시대에는 생존을 지속하는 일이 큰 관심사였다. 굶주림과 질병과 전쟁과 위험한 상황들이 널려 있었기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낳)부터 얼마나 살아냈는지가 중요한 지표가 된 것이다. 육십 해를 살아낸 환갑(還甲, 육십 갑자가 한 바퀴 돌아왔다는 의미)을 축하한 까닭은, 그 어려운 수(壽, 오래 사는 일)를 누렸기 때문이었다.

류영모가 환갑 기념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건, 육신의 수(壽)가 그리 축하할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는 생명(生命)이란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시한을 하늘로부터 언명(言命)받는 것이라고 여겼고,살아낸 것을 축하할 일이 아니라 죽을 일을 기념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살이와 죽음을 환기하는 날을 연(年) 단위로 따질 게 아니라, 일(日) 단위로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산 날 수를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8세의 류영모는 성경 시편의 이 구절을 곰곰이 읽었다.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시편 90:12). 그날이 1월 13일이었다. 자신의 산 날수를 계산해보니 1만240일이었다. 그가 환갑을 지나 2만2천일을 기념하게 된 때에는, 20대 때 처음 날수를 헤아리기 시작한 때부터 1만1천760일을 더 산 때였다.

그는 '하나'로 관통하는 성스러운 원칙을 세운 바 있다. 하루를 끝날처럼 사는 '하루살이', 하루 속에서 최소한의 곡기로만 겸허하고도 가난하게 살아가는 '한끼살이', 그리고 매일매일의 수행 속에서 날마다 나아가는 '하늘살이'가 그것이다. 토머스 칼라일은 '오늘이 삼만 번 모여 일생이 된다'고 노래했다. 3만날을 살면 82세가 된다. 삶은 3만개의 모래알을 쥐었다 놓는 것이다. 지금 그대도 한번 세어보라. 그대가 살아온 날수. 그리고 그대가 먹고 있는 끼니의 횟수. 그리고 그대가 하늘을 향해 마음을 둔 뜻의 크기를.

사는 걸 기뻐하지도 죽는 걸 싫어하지도 않네

류영모는 마흔이 넘어서 '장자(莊子)'를 깊이 읽었다. 읽으면서 마음이 드는 구절을 직접 우리말로 풀이하는 것을 즐겼다. 그런 구절 중에 '옛 참사람(古之眞人)'이 있다.

古之真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고지진인 부지열생 부지오사
(옛날의 참사람은 살어 좋음 모르고 죽어 싫음을 몰라)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기출불흔 기입불거 소연이왕 소연이래이이의
(그 나온 것을 깃다 않고 그 들길 싫다 않고 프르르 갔다가 프르로 왔다가 할 뿐)
不忘其所始 不求其所終
불망기소시 불구기소종
(그 비롯은 걸 잊지 않고 그 미칠 바를 찾잖고)
受而喜之 忘而復之 是之謂不以心捐道 不以人助天
수이희지 망이복지 시지위 불이심연도 불이인조천
(받고 희희 잊고 감 이 일러 맘으로 길을 덜잖고 사람으로 하늘을 돕잖기다 - 괄호안은 류영모의 한글 풀이)


[필자 풀이] 옛날 참사람은 사는 걸 기뻐하지도 죽는 걸 싫어하지도 않았네
세상에 난 것을 좋아하지도 세상을 뜨는 걸 거부하지도 않았네
허허롭게 떠나고 허허롭게 올 따름이네
그 태어난 것을 잊지도 않지만 그 죽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네
목숨 얻을 때 기꺼이 받고 그걸 잃을 때 기꺼이 돌려주나니
이를 가리켜, 마음이 진리를 내치지 않고
사람이 하늘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 하네

진선미를 줬건만, 탐진치를 찾는 육신

육신은 짐승일 뿐이다. 류영모는 '민신불인(民身不仁, 사람들의 몸은 하느님과 상관없다)'이란 5언절구 한시를 남겼다.

鼻突擊眼窓(비돌격안창)
明眸釀暗洟(명모양암이)
企待眞善美(기대진선미)
副産貪瞋痴(부산탐진치)

코는 솟았으나 눈망울을 가렸고
밝은 눈동자는 어두운 눈물을 빚네
뜻하고 기다린 건 바름-좋음-고움인데
곁다리로 나온 건 식탐-분노-색욕이네

불인(不仁)이란 말은 노자 도덕경 5장에 등장한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생성화육(生成化肉)하는데, 어느 대상을 편애하여 더 어진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고 차가운 자연의 법칙에 맡길 뿐이라는 말이다. 불인(不仁)은 '어질지 않음'이지만 천하의 대의(大義)를 위해선 견지해야 할 원칙이다.

그런 것처럼, 인간의 육신 또한 우뚝한 코와 아름다운 눈동자를 주었으나, 그것이 반드시 어질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코는 제 욕심과 자존심을 세워 제대로 봐야할 일을 못보도록 가리고, 눈은 부질없는 탐욕에 헛된 눈물을 만들어낸다. 인간육신이 어질지 못한 것은, 하늘이 공평하지 못함이 아니라 하늘이 성령의 진선미와 육신의 탐진치를 그 생각 속에 모두 부여하고 인간에게 그 선택을 맡겼기 때문이다. 눈과 코를 자랑할 일인가, 아니면 그 눈과 코가 짐승을 벗는 어진 승화(昇華)를 추구할 일인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