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라고 만든게 아닌데..." 국제적 망신, 세계 속의 우리말 낙서

2020-10-09 00:02
어째서 창피함은 다른 사람들 몫일까요?

일본의 대표적인 고사찰인 나라(奈良)의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지난 2017년 한글 낙서가 발견됐다. 8세기에 세워진 도다이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일본 국보 사찰 ‘도다이지’ 난간에 폭이 40cm에 달하는 크기의 낙서가 발견됐다. 예리한 도구로 긁어 새긴듯한 글씨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한글'이었다. 현지 경찰은 폐쇄회로(CCTV) 화면과 목격자 진술 등을 통해 낙서를 한 사람을 찾아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처벌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별안간 한글이 국제적 망신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만리장성에 새겨진 우리말 낙서. [사진=차이나데일리]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만리장성에서도 한글을 볼 수 있다. 위 사진은 중국 관영 언론인 차이나데일리가 여러 언어의 낙서 중 한글 낙서를 주요 사진으로 소개하는 등 일부 언론이 비중있게 다루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본격적으로 회자되었고, 네티즌들은 한국에 대한 비난을 강도높게 쏟아냈다.

 

피렌체 성당 종탑에 설치된 태블릿PC는 가상 낙서를 적어 온라인으로 전송할 수 있다. [사진=오페라 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으로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피렌체 대성당은 관광객들의 낙서에 골머리를 앓다못해 아예 태블릿을 설치해 낙서를 온라인으로 이동시키려는 시도까지 나왔다. 물론 여기에도 한글낙서는 빠지지 않았다. 낙서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엄마의 바람대로 이렇게 세상 반대편에 홀로 당당히 설 줄 아는 여성으로 성장했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엄마가 참 흐뭇해 하시겠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두오모 성당 낙서 제거 작업을 맡았던 건축가 베아트리스 아고스티니는 당시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이 낙서가 눈에 거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기념물에 진정으로 해가 된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인들의 ‘인증’과 ‘흔적 남기기’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다. 특히 이름난 관광지나 유적에 가면 벽면이나 기둥 등에 “ OO 다녀감” “ㅁㅁ아 사랑해~” 와 같은 한글 낙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 이런 탓에 아예 ‘낙서 금지’ 경고 문구를 한글로 쓴 곳이 있는가 하면, 경고판의 낙서 사진에 ‘한글’이 담겨 있는 경우도 많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학생감옥의 낙서금지 경고문은 아예 한글로 작성되어 있다. 실로 부끄러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어글리 코리안’은 그 역사만 해도 벌써 30년 가까이 된 유구한 멸칭이다. 1989년 여행 자유화가 전면 시행되면서 해외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비행기에서 양말바람으로 돌아다니고 큰소리로 떠들며 아무데서나 김치를 꺼내 먹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세련된 세계인으로 거듭나자는 의미에서 탄생한 말이다.

그러나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어글리 코리안’의 위상은 건재하다. 우리의 인식이 나아졌다 한들 이미 세계 각처에 새겨진 우리말 낙서는 좀처럼 지워질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인 관광객 유입이 대폭 줄어든 것을 다행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해외만 거론할 일도 아니다. 밖에서 새는 바가지는 집에서도 샌다. 이미 우리나라 관광지, 유적지에도 낙서는 곳곳에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다. 

자기 이름 석자를 자랑스러워 하는만큼 우리말에 대한 자부심도 생각해야 할 때다. 세종대왕의 고백처럼, 이는 우리를 어여삐 여겨 만든 글자다. 적어도 이렇게 쓰라고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9일)은 한글이 574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날이다.
 

담양 죽녹원의 대나무에 새겨진 낙서들. 이런 경우는 복구도 불가능하다. [제공=KBS]


[그림=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