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 꺼내든 文] ②‘톱다운’도 ‘다자주의’도 한계 봉착…북·미에 ‘좌지우지’

2020-09-23 07:59
흔들리는 남북미 비핵화 원칙…대선 전 시간 촉박
다음달 10일 北 ‘쌍십절’ 변수…新무기 공개 전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오하이오주 스완턴에서 열린 대선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미국 현지시간 22일) 제75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밝힌 한반도 ‘종전선언’과 관련해 그동안의 남·북·미 간 비핵화 로드맵 원칙을 깼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비핵화 없는 종전선언이 과연 실효성이 있느냐’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실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를 맞아 “북한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를 향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 당국자들은 FFVD라는 단어를 수시로 사용해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명의로 된 자료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특히 북한은 다음 달 10일, 이른바 ‘쌍십절’로 불리는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앞두고 있다. 북한은 이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새로운 전략무기를 공개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우리가 종전선언을 제안했는데 갑자기 북한이 쌍십절에 미사일을 쏘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진다”면서 “수십년 간의 전례를 봤을 때 남북관계는 어느 한쪽의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오히려 북한은 핵 억제력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6·25전쟁 휴전 67주년을 맞아 ‘자위적 핵 억제력’을 언급하며 국방력 강화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종전선언은 그동안 북한의 비핵화 행동에 대한 ‘상응조치’로 거론돼 왔다는 점도 실현 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7월 27일 ’조국해방전쟁 승리의 날‘ 67주년을 맞아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회 전국노병대회 연설에서 “우리의 믿음직하고 효과적인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하여 이 땅에 더는 전쟁이라는 말은 없을 것이며 우리 국가의 안전과 미래는 영원히 굳건하게 담보될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대선을 40여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물리적인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다시 종전선언 카드를 꺼낸 것은 자신의 남은 임기와 북한 내부 상황, 국제정세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절박함도 담겨 있는 것으로 읽힌다.

실제 문 대통령은 기자협회보 지령 2000호를 맞아 진행된 서면 인터뷰에서 취임 후 3년 4개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과 기뻤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취임 이후 2017년 하반기까지 높아졌던 전쟁의 위기를 해소하고 대화국면으로 전환시켜낸 것이었다”고 답했다.

문 대통령은 “지금 남북과 북·미 대화가 중단돼 매우 안타깝다. 평화는 단지 무력충돌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며 협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뤄진다고 믿는다”며 남북관계 복원에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금은 미국의 대선이 어떻게 되는지, 미국을 비롯해 중국과 북한이 모두 기다리는 타이밍”이라며 “오히려 (대선 전에) 자꾸 남북관계 얘기를 하게 되면 미국과 북한의 역반응이 나오게 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이 이번에 강조한 ‘다자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 대통령은 이번에 유엔 회원국 중 다섯 번째로 믹타(MIKTA)의 의장국 정상자격으로 대표연설을 했다. 2013년 9월 제68차 유엔총회를 계기로 출범한 믹타는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로 구성된 중견국 협의체다. 문 대통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로 인해 다자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믹타 5개국 각각이 △우호그룹 출범 △유엔총회 결의 채택 △WHO(세계보건기구) 세계보건총회 결의 주도 등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소개했다.

청와대는 믹타 출범 이후 국제무대에서 의장국 정상이 대표로 발언한 최초의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장은 “믹타의 구성국들의 특성상 서로 간의 구체적인 목표와 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공감대가 크진 않다”면서 “사실 지금 믹타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미·중 전략 경쟁에서 우리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해법이 나올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다자외교라는 것이 취지는 좋지만 제한된 재원과 시간, 에너지를 가진 한국 같은 나라에서 들여야 할 공에 비해 효과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 전문가도 “믹타는 원래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선진국들’과 한국을 묶자는 개념이었는데 지난 정부를 거쳐 국력이 ‘고만고만’한 나라의 협의체가 됐다”면서 “글로벌 강대국들 사이에서 큰 힘을 보여주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