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68, 풀버전)] 육체와 상대세계를 벗어나라, 류영모의 '노자신학'

2020-09-18 17:14
노자와 다석(2) 도덕경을 품은 류영모, 기독교의 본질로 들어가다

[다석 류영모 [그림=박상덕 화백]]



상대세계의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

노자의 도덕경은, 춘추전국의 난세에 등장해 '치세(治世)'의 길을 일깨워주는 리더십 바이블로 자주 읽혀왔다. 이 경전에 대한 이같은 이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자는 그 시대로선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파격적인 '신의 리더십'을 거론하고 있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가 지도자의 도(道)와 덕(德)을 말하면서, 그 벤치마킹할 대상을 '신(神)'으로 삼고있다는 점은 독창적이다.

그 신은 고대에 유행했던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의 신이 아니었고, 초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격신(人格神)도 아니었다.  노자의 신은, 만물을 일궈낸 우주의 허공이었다. 그것을 현(玄, 아주 멀고 어두워 알 수 없는 검은 무엇)이라고 불렀다. 멀리 갈수록 더욱 알 수 없기에 현지우현(玄之又玄)이라고 했다. 이 허공은 절대세계에 속해 있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상대세계에 속해 있어서, 도(道)를 통하지 않으면 허공의 뜻을 알 수 없다고 보았다. 노자에겐 허공(玄)이 신이었다. 류영모는 허공을 뜻하는 현(玄)이 '검'과 같은 말이며, 우리말로 표현한 하느님이라고 했다. 얼나와 같은 의미로도 썼다.

"선조들은 하느님을 검이라고 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도 검의 뜻이다. 단군이 곰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란 뜻이다. 가락국을 세웠다는 금수로왕도 검의 자손이란 말이다. 우리가 말하고 듣고 하는 것도 이 속에 있는 검이 알리니까 그런 것이다. 검이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몸나는 그림자일지 모르지만 말씀하는 얼나(검)는 있다." (다석 류영모 어록)

노자는 천지만물을 만들어낸 허공의 뜻이야 말로 인간 세상 최고의 리더십이라고 밝혔다. 상대세계에 사는 인간이, 절대세계의 허공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노자가 접근하는 방식은 간명했다. 상대세계에 사는 인간이 자신이 상대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으면, 상대세계의 모순과 한계를 읽어내고 그것을 극복하여 절대세계 허공의 뜻을 따라갈 수 있다고 믿었다. 도덕경은 그걸 말하는 책이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도덕경 2장에는 흥미로운 얘기가 나온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세상의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알지만 사실은 추한 것일 수 있다. 모두가 '선한 것이 선한 것'라고 알지만 사실은 선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등장하면 그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한 것일 수 있다. 신데렐라가 등장하자 그의 새엄마가 추녀로 여겨지는 게 바로 그것이다. 어떤 아름다움도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추해질 수 있다. 세월을 이기는 아름다움은 없다고 우린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인간은 한때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것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는 모두가 상대적이고 잠정적이고 주관적인 것일 뿐이다. 미(美)만 그렇겠는가. 선(善)도 마찬가지다. 류영모는 말했다. "이 세상에는 흔히 이만하면 미(美)지, 선(善)이지 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선미가 없다."

노자는 1장에서 도(道, 진리)조차도 상대적인 세상인 인간세계에선 한결같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명칭들 또한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衆, 사물)의 세계와 묘(妙, 우주허공)의 세계를 나눠 말했다. 앞은 상대세계고 뒤는 절대세계다. 노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진(眞, 도라고 표현했다)과 선(善)과 미(美)가 모두 상대세계에서 말하는 상대적인 진선미일 뿐이며, 변하지 않는 것, 절대적으로 그대로인 것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말한 뒤에 노자는 상대세계의 상대적인 잣대들을 제시한다. 어렵고 쉬운 것, 길고 짧은 것, 높고 낮은 것, 사물의 소리와 동물의 소리, 앞과 뒤. 이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이다.

도덕경엔 성인(聖人)이란 말이 나온다. '허공의 뜻과 통한 사람'이다. 그 성인은 스스로 나서지 않는 일을 하고 말로 표현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고 말한다. 나서지도 않고 말로도 하지 않으면 그게 일이 되며 가르침이 되는가. 된다. 만물이 지어지는 것을 말리지 않으면(무위, 無爲) 된다. '허공 조물주'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자는 혼탁한 세상에 전쟁을 일으키고 백성을 수탈하는 폭력적인 리더들이 제발 그 의욕을 뒤로 물려 허공의 조물주처럼 가만히 백성의 자율과 자유와 자의에 맡겨 내버려두라는 충고를 했다.  인간의 많은 고통은, 상대세계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발생한다. 노자는 절대세계의 조물주 시선으로, 그것을 설명해나간다. 
 

[노자]

'상대적 빈곤'이 갈등을 부른다

도덕경 제3장에선 '상대적 빈곤'을 없애는, 신의 리더십을 귀띔해준다. 

닦아남을 좋이지 말아서 씨알이 다투지 않게 不尙賢 使民不爭(불상현 사민부쟁)
쓸몬이 흔찮은 건 높쓰지 말아서 씨알이 훔침질을 않게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하고잡 만한 건 보이지 말아서 맘이 어지렵지 않게 하여야 不見可欲 使民心不亂(불현가욕 사민심불란)
이래서 씻어난 이의 다스림은 그 맘이 비고 그 배가 든든하고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시이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그 뜻은 무르고 그 뼈는 세어야 弱其志 強其骨(약기지 강기골)
그 씨알이 앎이 없게 하고잡이 없게 하이금 常使民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그저 아는 이도 구태여 하지 않게끔 하여야 使夫知者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함없이 하매 못 다스림이 없으리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 즉무불치)

                         - 류영모 도덕경 제3장 한글풀이


'똑똑함'은 좋은 가치로 보이지만,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을 표현하는 상대적 잣대일 뿐이다. 똑똑한 것을 높이 치면, 서로 똑똑하다고 주장하는 분쟁이 일어나고 서로에 질시가 생겨나 사회의 안녕을 해치게 된다. 또 재화는 좋은 가치로 보이지만, 재화를 귀히 여기면 그 재화를 훔치는 도둑이 생겨나 사회의 갈등을 만들어낸다.

사회의 안녕을 해치게 되는 원인은, 백성(씨알)에게 함부로 욕망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식과 재화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노자는 상대세계에서 생겨나는 이런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이 공동체의 평화로움을 깬다는 점을 갈파했다. 그가 꿈꾼 세상은 '원시공산주의 사회'의 평화나, 혹은 동물들의 공생 및 동거와 비슷했다. 상대적인 가치를 자극하는 일은, 그 가치가 비록 좋은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불화를 낳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노자가 사회의 가치를 보는 관점을 철저히 '절대세계'의 시선으로 하는 까닭은, 상대세계의 상대적인 관점들을 충격적으로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재물은, 절대세계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상대세계에서 그것을 중히 여겨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논점이다.

아무리 써도 남는 것이 하느님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건(상대세계 인간의 마음상태) 짐승이다. 깜짝 정신을 못 차리면 내 속에 있는 하느님 아들을 내쫓고 이 죄악의 몸뚱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노자가 말한 지식과 재화는 죄악의 몸뚱이가 만들어낸 '가치'이다. 도덕경은 상대세계 문제의 본질을 파헤친 뒤 바로, 절대세계를 그려보인다. 그게 도덕경 제4장이다.

길은 골루 뚤렷해 쓰이고 아마 채우지 못할지라 道冲而用之 或不盈(도충이용지 혹불영)
깊음이여 잘몬의 마루 같구나 淵兮 似萬物之宗(연혜 사만물지종)
그 날카로움 무디고 그 얽힘 풀리고 그 빛에 타번지고 그 티끌에 한데 드니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맑음이여 아마 있을지라 湛兮 似或存(담혜 사혹존)
나는 기 누구 아들인 줄 몰라 하느님 계 먼저 그려짐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 류영모 도덕경 제4장 한글풀이


도(道, 진리)는 비어있어서 아무리 퍼 담아도 가득 차지는 않는다. 비어있음. 이것이 노자가 처음으로 언급한 절대세계의 모양이며, 그것이 상대세계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비어있는 도는 깊어서 만물을 낳았다. 너무나 맑아서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 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날카로운 것을 부드럽게 하고 얽힌 것을 풀고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을 뭉치게 한다. 이런 현상을 어디서 보았는가. 자연에서 우리가 보지 않았는가. 절대세계에서 온 '도'는 바로,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자연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들이다. 나는 그 맑은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즉 누가 낳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신에게서 나온 것이란 건 안다.

"도는 허공이다. 천지만물을 낳을 만큼 깊고, 있는지도 아리송할 만큼 맑은 허공이다." 이것이 노자가 한 말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허공의 아들이라 허공을 바라야 한다. 우주는 허공 안에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과 허공을 동일시했다.

노자가 밝힌 절대세계의 원리는 이것이다. 좌예해분 화광동진(挫銳解紛 和光同塵). 날카로운 것을 부드럽게 하고 얽힌 것을 풀고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을 뭉치게 한다. 절대세계는 그러니까, 부드럽고 풀려있으며 빛은 온화하고 약한 것은 뭉쳐지는 그런 성질을 가진 세계다. 이것이 성령이다. 하느님의 뜻이 구현되는 방식이다.

노자의 하느님은 골짜기의 조물주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노자의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했다. 그러나 노자의 하느님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같은 개념의 '인격신(人格神)'이 아니다. 노자의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한 절대세계의 '허공'이다. 허공의 형상은 어떤 측면에서도 인간을 닮지 않았다. 허공은 생명이 아니며, 그러나 '사멸한 상태'도 아니다. 하느님이 왜 세상과 만물을 창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어떤 '좋은 의도(사랑)'에 의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노자의 행간을 살피면, 하느님은 텅빈 골짜기로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 같다. 첫 생명은 무(無)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무(無)의 자식일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은 생명을 일일이 창조하지 않았고, 생명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자율방식 혹은 위탁방식으로 생태계가 유지되게 했다.

하느님이 생태계를 창조하는 방식은, 생태계에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인간도 그 생태계 속에서 생겨났다. 첫 인간이 다른 동물에서의 진화를 통해 생겨났든, 혹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영성'을 받아낼 정신을 지닌 첫 인간이 새롭게 창조된 것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 인간의 출현에 하느님이 근거를 제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노자는 이렇게 형성된 생태계의 법칙이, 절대세계에서 파견보낸 '하느님의 뜻'이라는 점을 거듭 밝혔다. 인간은 그 하느님의 뜻을 받아내어 스스로의 삶에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자의 하느님은 사람같이 생긴 존재도 아니고, 초인도 아니며, 오로지 저 자연으로 드러나는 생멸과 순환의 이치 속에 들어있으며, 자연 속에 '진리'로 존재하는 것들의 원천(源泉)이라고 생각했다. 자연 속에 법칙과 진리로 존재하는 것들은, '최고의 인격(人格)'이라 할 만한 높고 깊은 도를 지니고 있다.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은 '자신'과 닮은 존재를 구상했으며, 그것이 저 도(道)로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노자 또한 인격신이라 할 수 있으나,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인격신과는 상당히 다르다.

노자의 도(道)는 '인격신'

노자의 도(道)는, 인간이 지켜야할 최고 윤리이며 유일한 윤리체계이다. 인간이 지켜야할 윤리야 말로, 신이 지닌 인격성(人格性)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신의 인격성'을 발현할 수 있는 동기(動機)를 불어넣었고, 인간은 그것을 구현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신의 인격성 혹은 '인격신'을 인간 모두가 제대로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자는 그 급(級)을 매겨놓았다. 가장 아래의 급은 '인격신'을 무시하는 사람들(侮之)이다. 그 위의 급은 겁내는 것(畏之)이다. 또 그 위의 급은 좋아하고 우러르는 사람들(親而譽之)이다. 가장 높은 급은, 그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不之有之)이다.(도덕경 17장) 가장 오묘한 것은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의 인격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인격성과 인간의 인격성이 같아졌기에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워진 상태를 말한다. 즉 신이 가르칠 필요가 없는 인간. 신성을 이룬 '신격인(神格人)'이 인격신이 강림하는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노자는 보고 있다.

고대인(古代人)인 노자는, 절대세계에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허공의 하느님이 '섭리'를 통해 상대세계에 보여준 인격의 정본(正本)을 마스터한 사람을 꿈꾸었다. 그것이 그의 도(道)의 완성이었다. 도를 완성한 사람은 바로 성인(영적인 인간)이었다. 이 도(道)는, 인간이 그간 추구해온 가치와는 어떻게 다른가.

노자는 또 리얼하게 그 '수준'을 매겨준다. 이른 바 인의예지충효는 어디서 나왔는가. 하느님의 도(道)가 사라졌을 때 생겨난 것이 인의(仁義)다. 하나님의 '도'에 닿지 못한 이들이 그 대용품으로 '인의'를 강조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상대적인 가치인지라 늘 잣대가 애매하고 시비에 휘말린다. 그 다음, 인간이 숭상하는 '지혜'가 등장했을 때 그와 함께 거짓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지혜 또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서로 거짓말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을 우린 자주 보지 않는가. 또 '효와 자애로움'이란 가치는, 가족의 불화 때문에 중요시되었고, '충성'이란 가치는 국가가 혼란하기 때문에 높여졌다. (도덕경 18장) 즉, 인간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모두 상대적이며 잠정적인 것일 뿐이다. 영원하지 않으며 확고하지도 않다. 상대적인 '가치'들은 아무리 높이 쳐주어도, 사실은 불안한 것들이다. 진짜 가치는 어디 있는가. 절대세계인 신에게 있다. 노자는 이런 생각이 뚜렷했다.

인간의 육신을 벗지 못한 신

기독교의 하느님은 어떤가. 신에 대한 기독교의 상상력은, 고대의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상상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신화적 신은, 육체가 있으며 감정도 있으며 인간과 같은 실수와 죄도 저지르는 '인간을 닮은 신'이었다. 구약에 등장하는 신은, 그리스의 신과 비슷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후 기독교의 신은 육체를 벗어났지만, 노자의 상상처럼 아무런 실체가 없는 '빈 것'이란 상상까지는 나아가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을 닮은 형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이 내용적으로 완전한 '숨은 신'이 되는 것은 예수의 시대 이후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본따서 창조되었으나, 그 '형상'은 육체적이고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적 특질'을 본따서 창조되었다고 본다. 하느님은 절대세계에 있고 인간은 상대세계에 있기에, 상대세계의 형상이나 경험으로 하느님을 접할 수 없다. 이런 완전한 단절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믿음' 뿐이며, 그 믿음으로 강화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동질성'의 힘 뿐이다. 이 동질성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뜻'이 바로 성령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많은 기독교도들에게 완전하게 공유되거나 동의된 것은 아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하느님의 '육체적 형상'을 이미지로 그리고 있으며, 육체적 특질로 다가오는 하느님이 인간과 직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대 전통의 상상을 기반으로 한 '육체적 인격신'이야 말로 매우 강력하고 뿌리깊은 믿음의 바탕이며 근거가 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우주의 근본 원인이나 도덕의 근원, 미의 근원을 하느님으로 보는 인격신의 관점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엔가 인간의 익숙한 신관(神觀)은 물질세계의 형상을 빌린 하느님을 떠올리기 쉽다. 

신은, 육체가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문제다

류영모는 '육신'에 대한 서구의 집착이, 기독교를 왜곡시켜 놓은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성령 잉태나 부활, 기적 같은 것들은 모두 육신으로 보여준 이적(異蹟)이다. 류영모는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육신을 받은 독자(獨子)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독생자(獨生子)임을 강조한다. 모든 기적은 성령에 있으며, 부활이나 영생 또한 성령의 문제라고 말한다. 부활은 몸이 되살아난 게 아니며 영생은 몸이 영원토록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육신은 하느님에게 소용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몸뚱이는 혈육의 짐승이다. 질척질턱 지저분하게 먹고 싸기만 하는 짐승이다. 한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몸나에서 얼나로 솟날 때 비로소 사람이 회복된다. 예수가 말한 인자(人子)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회복된 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로고스적 관점이 거듭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까닭은, 신을 물질세계의 존재로 소환하려 하기 때문이다. 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려 상대세계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신일 수 없다. 신이 물질세계에서 권능을 발휘하며 무엇인가를 초자연적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믿는 모든 믿음은, 기복적(祈福的) 사유의 결과다. 약한 인간이 상상의 무엇에 의지하려는 욕망에 부응하는 지점에 등장하는 '물신(物神)'일 뿐이다.

류영모는 말한다. "하느님이 계시느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절대)를 그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신은 약속과 이행을 통해, 인격성을 드러낸다

과학적 사유가 발달한 서구에서는 '신의 인격성'을 역사적인 약속 이행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과학신학자인 존 호트(John Haught,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1942~ )가 '과학과 신앙'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구약성서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인격성은 언약의 체결과 이행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났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내용이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이며, 과학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우주가 비인격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우주의 드라마는 처음부터 인격성의 함양을 약속하고 있었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창조적인 결과를 미래에 허용함으로써 그 약속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인격적인 돌봄은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미래를 피조물에게 선사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하느님이 곧 세계의 미래다. 피조물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는 것보다 더 인격적인 돌봄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피조물에게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심어주는 것보다 더 인격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일은 없다. 자연을 향한 약속, 그 약속을 이행하는 신실함 속에서 우리는 구약에 등장한 인격적 하느님을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노자를 통해, 기독교의 신관(神觀)을 일신했다. '빈탕'(空)이 세상 창조의 원천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갈파했다. 노자는 빈탕의 리더십으로 세상을 깨우치려 했지만, 류영모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빈탕'의 절대세계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세웠다. 과감히 육체 중시의 기복적인 면모를 혁신하고, 몸나를 이겨 오직 얼나(성령)로 나아가는 영적 수행을 실천해 나갔다. 도덕경은, 류영모를 만남으로써, 21세기 인간이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고차 인격(高次人格)을 지닌 하느님을 자율적으로 접속하는 참된 도(道)를 드러내게 됐다.

성서 요한복음 14장 5~6절이, 노자의 묵은 책과 류영모의 깊은 사유(思惟)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께 말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나는 절대세계의 변치 않는 도(道)이며, 오직 절대세계의 가치를 이루는 진리이며, 너희가 성령으로 영원히 사는 그 생명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