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쏘아올린 '위임통치' 논란…남북대화 복원 구상에 찬물?

2020-08-21 17:54
국정원 '김정은 위임통치' 발표…남북 관계 '악재' 우려
'책임회피' 위임통치…北 '최고존엄' 모욕 오해할 수도
정세현 수석부의장 "'역할 쪼개기, 전결권 키워준 것"
전문가들 "'위임통치' 표현 부적절, 역할분담이 맞다"

국가정보원이 20일 국회 정보위원회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언급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위임통치’가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특히 국정원이 김 위원장의 위임통치 배경을 ‘통치 스트레스’, ‘책임회피’로 내밀어 북한의 반발을 야기, 남북 관계를 한층 악화시킬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아울러 정부가 추진 중인 ‘작은 교역’에서부터의 남북 교류협력 구상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북한 평양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열린 제7기 제6차 당 전원 회의를 주재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이날 전원 회의에서는 내년 1월 8차 당대회 개최가 결정됐다.[사진=연합뉴스]


21일 외교·안보전문가들은 국정원의 ‘위임통치’ 보고에 경솔했다는 의견을 내놨다.

신범철 한국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국정원의 보고서가 함부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 업무보고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보고였다”고 말했다.

최병섭 정치학 박사(통일부 정세분석국 전 정보상황실장)도 “‘위임통치’라는 말은 좀 그렇다”면서 “위임통치란 수장이 없을 때, 통치가 불가능할 때 쓰는 말이다. 역할분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최 박사는 “지금 (남북 대회가) 단절된 상태에서 무언가 대화 물꼬를 만들기 위해서 이런 얘기가 거론된 것 같다”면서도 ‘위임통치’라는 표현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북한은 유일영도체제이고 김정은 위원장이 건재한 정상체제에서 정치는 자신이 직접 관장하고 경제, 사회, 군사, 대외 등 분야별로 책임자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것”이라며 “위임통치가 아니라 역할분담”이라고 주장했다.
 

21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광복 75주년, 새로운 한반도 건설을 위한 역할과 과제’에서 송영길 외교통일위원장(왼쪽 두 번째부터), 이인영 통일부 장관,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입장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평화통일포럼’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정원의 ‘위임통치’ 발표에 대해 “역할을 나눈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수석부의장은 “최종결정권자(김 위원장)가 권한을 조금 넘겨줄 수는 있지만, 결정권까지 주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최종 결정권은 김 위원장이 가지고 있고 분야별로 웬만한 것은 거기서 다 조율하고 조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정 수석부의장은 국정원의 ‘위임통치’ 발표 평가를 묻자 “위임이라는 단어 안 쓰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이후 국정원의 ‘위임통치’ 표현 사용 확인 후 “사람마다 같은 용어에 대한 개념이 다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행정용어인 ‘전결권(결재권자가 하위 관리자에게 결재를 위임)’을 언급하며 통상적인 위임통치의 개념과 다르다고 부연했다.

정 수석부의장은 “(고위 간부들의) 전결권이 키워졌다고 봐야 한다”면서 “정부 부처에서도 전결권을 차관이나 실·국장이 가진 경우가 있는데, 전결이라고 해도 장관에게 보고는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북한의 위임통치는 ‘횡적인 역할 분담’이 아닌 ‘상하 역할 분담’으로, (간부들이) 1대1로 김 위원장에게 맞먹을 수 없을 것”이라며 ‘위임통치’의 확대해석에 선을 그었다.

정 수석부의장은 김 위원장이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에게 역할을 분담하는 것에는 ‘자신감’과 북한 관료들에 대한 ‘신뢰’가 반영된 것으로 봤다.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평화통일포럼 ‘광복 75주년, 새로운 한반도 건설을 위한 역할과 과제’에서 이인영 통일부장관이 축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부 전문가들은 국정원의 섣부른 단어 선택이 남북 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나아가 김 위원장이 유보한 북한의 대남 군사적 행동이 재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이것이 정부의 남북 교류협력 구상에 악재가 될 가능성도 높게 점쳤다.

그러나 백학순 세종연구소장은 “김정은이 실무 권한을 줬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김정은의 권력이 세고, 안정성이 확보됐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김정은이 유통성을 가지고 하나의 국가를 운영하는 것으로 결코 우리한테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지난 19일 당 제7기 제6차 전원회의 결정서에서 경제 실패 등 자기반성을 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남북 간 교류협력의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백 소장은 “당 전원회의 이후 내년 제8차 당대회 준비 기사가 노동신문에 실렸다. 주목할 점은 이날 신문 1면에 북한 노동당 농업상이 농업에서의 정면돌파전을 강조했다”면서 “그만큼 식량 사정도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남북 간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겠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