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재난은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
2020-07-20 10:57
지난 주말 모처럼 전시장과 서점에 다녀왔다. 서울 인사동 '러시아 현대 작가전'과 예술의전당 '세계보도사진전'에는 많은 이들이 몰렸다. 코로나19 여파로 한산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딴 세상이었다. 일반인들에게 러시아 현대 미술은 생소하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최인아 책방'도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이들이 책을 고르고 읽는 모습에서 인간 내면에 잠재된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를 새삼 확인했다.
‘코로나 블루(Corona Blue)’는 코로나19로 겪는 우울증이다. 코로나19는 기온이 오르면 소멸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2차 팬데믹을 예고하고 있다. 반년 넘게 지속되는 대유행 탓에 곳곳에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코로나 블루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문화예술만 한 게 없다. 때로는 그림 한 장, 공연 한 편, 시 한 소절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당장 먹고살기도 버거운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타박할 수 있다. 그게 얽히고설켜 간단치 않다.
올해 상반기 코로나19로 인한 공연·전시분야 매출 피해액은 1500억원대로 추정됐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자료다. 이로 인해 공연예술 및 시각예술 분야 고용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공연·전시 분야는 다른 직종보다 비정규직(프리랜서)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오랜 휴관과 불황은 비정규직 문화예술인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갔다는 뜻이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고용 피해액은 572억원으로 추정됐다.
재난은 약자에게 더 혹독하다.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재난을 당하면 지배층은 어떤 식으로든 부와 정치권력을 통제한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는 더욱 소외된다. 우리 사회도 IMF 외환위기 당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부유층은 외환위기 속에서 부를 더 키운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19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전시·공연 분야 비정규직 종사자가 겪는 재난과 고통은 감내할 수준을 넘어섰다.
존 C. 머터는 <재난 불평등>에서 재난이 지닌 속성을 고발한다. “지배층은 재난 충격을 완화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소득 변화를 겪지 않는다. 반면 가난한 사람은 죽고, 다치고, 집을 잃는다. 이전보다 더 고통 받고 그나마 가진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목받지 못한다. 기득권층은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알고 수단도 가지고 있다. 부자는 재난으로부터 멀리 피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빈곤의 덫에 갇히거나 덫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어떤가. 이쯤 되면 특정한 빈곤층만 문제가 아님을 알 것이다. 문화예술인이 겪는 고통과 내가 처한 고통이 다르지 않다. 재난과 빈곤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에 공동체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영국 정부는 지난 17일, 극장과 갤러리·박물관에 15억7000만 파운드(약 2조3443억원)를 긴급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입장 수입이 줄고 감원이 늘어난 데 대한 조치다. 놀라운 것은 속도다. 지원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전달된 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
국내 전시·공연계 역시 경영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동안 문화예술계는 여러 경로를 통해 지원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정부나 정치권은 아직까지 이렇다 할 답이 없다. 서울문화재단 차원에서 지원한 게 전부다. 서울문화재단은 5개 부문 500여 창작활동에 50만원에서 최대 2000만원까지 45억원을 지원했다. 근본적인 처방이라기보다 긴급구호 성격에 가깝다. 재정이 열악한 다른 지자체는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정세균 총리는 19일, 공공 미술관과 박물관·도서관 운영을 재개한다고 밝혔다. 앞서 정부는 공공 미술관과 박물관, 도서관 운영을 중단했다. 많은 이들은 이런 조치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장거리 기차나 비행기에서는 몇 시간이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정작 한두 시간에 불과한 공연은 제한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지원 방안을 모색할 때다. 문화예술 종사자와의 연대는 재난 불평등을 완화하는 다른 방법이다. 문화예술은 한류의 원천이기도 하다.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고, 결국 공동체를 위협한다. <재난 불평등>에 나오는 한 대목. “부자가 이기고, 가난한 사람이 진다. 부자는 이용하고, 가난한 사람은 못한다.” 이런 사회는 희망이 없다. 코로나19를 단순한 재난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공동체를 위한 정치적 담론으로 확장하고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 그럴 때 우리 사회는 나아간다.
이제 코로나19는 생활 속 일부분이 됐다. ‘위드 코로나(코로나와 함께하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연대하고 보듬자. 곽재구는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고 했다. 시인은 신산한 삶을 희망으로 전환시킨다. 이 또한 문학이 지닌 힘이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전시‧공연장을 찾고 서점에도 들러 볼 일이다. 코로나19로 지친 내면을 채우는 ‘위드 코로나’는 멀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