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509호 찾은 文, 민주인사 일일이 호명…“독재시대 국민의 울타리”

2020-06-11 08:34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 참석
단상 올라 직접 악수하고 훈장 수여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고(故) 이한열 열사 모친 배은심 여사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현직 대통령 최초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을 방문해 헌화했다.

제33주년 6·10 민주항쟁을 기념하고 국가폭력에 대한 사죄의 뜻을 전하기 위해 민갑룡 경찰청장도 현직 최초로 함께했다.

2017년에 이어 3년 만에 기념식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일상의 민주주의’로 사회적 화두로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승강기를 이용해 남영동 509호 조사실에 도착한 뒤, 1987년 고(故) 박종철 열사를 물고문했던 그 욕조를 바라봤다. 김정숙 여사가 준비한 헌화 이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문 대통령은 “이 자체가 그냥 처음부터 공포감이 딱 온다. 물고문이 예정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선 스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경찰에서 이곳을 민주인권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내놓은 것도 큰 용기”라고 말했다. 509호 대기실 밖에는 박종철 열사 형인 박종부씨와 민 경찰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 대통령은 민 청장에게 “이 장소를 민주인권을 기념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하고, 또 어제는 공개적으로 사과 말씀도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동행한 김정숙 여사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설명을 듣다가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유동우 민주인권기념관 관리소장은 “어떻게 하면 여기에 끌려온 사람들, 연행돼 온 사람들이 완벽한 고립감과 공포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까 이런 방향으로 설계가 돼 있다”고 했다.

유 소장은 “1976년도에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처음에 5층으로 지어졌다가 1983년도에 전두환 정권 때 7층으로 증축됐다”면서 "아까 들어오실 때 맞이했던 정문, 그 철문을 보면 2개로 돼 있다. 방호문까지 돼 있는데 눈을 가린 상태로 거기를 통과하면 그 방호문이 열리는 소리는 탱크가 굴러가는 굉음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들린다“고 설명했다.


유 소장은 “5층 조사실은 철제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나선형 계단은 72계단으로 돼 있고 세 바퀴를 돌게 돼 있다”면서 “나선형 계단은 2층, 3층, 4층으로는 나가는 통로가 없다. 여기 발 디디는 순간 5층까지 끌려 올라가서 바로 조사실로 올라가게 된다”고 말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기념식에 참석해 훈장을 받는 민주인사들의 이름과 사연을 일일이 호명하며 예우를 갖췄다.

문 대통령은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가 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를 향해 쓴 편지를 낭독하자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이 여사가 편지 낭독을 마치자 박수로 위로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12명에 대한 합동 훈장 수여식을 위해 단상에 올랐다. 정부가 6·10 기념식에서 합동으로 훈장을 수여한 것은 처음이다.

이미 고인이 된 11명의 민주주의 발전 유공자들의 훈장은 자녀와 증손자, 배우자 등이 대리해 수령했다.

고 이소선 여사는 딸 전순옥씨가, 고 박형규 목사는 증손자인 10살 유승민 군이, 고 조영래 변호사는 배우자 이옥경씨 등이 자리했다.

문 대통령은 이들과 악수를 나눈 뒤 간단히 인사말을 건넨 뒤 훈장을 수여했다.

유일한 본인 수여자로 배은심 여사가 마지막으로 단상에 오르자 문 대통령은 배 여사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고 위로의 말을 나눴다. 이후 배 여사의 목에 훈장을 걸어주고, 왼쪽 가슴에 훈장을 달았다. 배 여사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소선 여사에 대해 “전태일 열사를 가슴에 담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평생을 다하셨다”고 소개했다.

박형규 목사에 대해서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일생을 바쳤다”,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변호사의 상징”으로 설명했다.

국민포장을 받은 조지 오글 목사, 제임스 시노트 신부도 거론했다.

문 대통령은 “실로 이름 그 자체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이며, 엄혹했던 독재시대 국민의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분들”이라며 “저는 거리와 광장에서 이분들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을 영광스럽게 기억한다”고 추모했다.

문 대통령은 ‘광야에서’가 울려 퍼지자 일어나 합창했다. 이 노래는 6·10 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2007년부터 참석자들이 기념식 마지막에 부른 노래다. 행정안전부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공식 제창곡 추진을 검토하고 있다.

한편 ‘꽃이 피었다’를 주제로 한 올해 기념식에는 정·관계 주요 인사와 민주화운동 인사 및 후손, 민주화운동 단체 관계자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해에는 400여명이 모였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행사 규모를 대폭 줄였다.

경과보고에는 6·10 민주항쟁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이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낭독은 영화 ‘남영동 1985에서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역을 맡은 배우 박원상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