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영웅' 그 장군은 노인이 아니었다

2020-05-11 18:43
만100세 장경석 장군을 만나다

[박상철 교수]



[장수연구전문가 박상철 스폐셜] [100년의 대화] 필자 박상철 교수노화(老化) 연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박상철 교수는 서울대 의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30년간 서울대 의대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전남대 연구석좌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노화 분야 국제학술지 ‘노화의 원리’에서 동양인 최초 편집인을 지냈고 국제 백세인연구단 의장, 국제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노화 연구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노화이론을 세운 그의 논문은 과학저널 ‘네이처’지에 소개됐습니다.



 

장경석 장군 인터뷰, 박상철 교수(중간) 곽영길 아주경제 회장(오른쪽)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백년을 넘게 살아온 분들을 만나면 출생시기에 따라 사회적 성향과 국가관으로 표현될 수 있는 시대정신이 차이가 큰 것을 엿볼 수 있다. 자라고 살아온 과정에서 마주친 사회체제가 너무도 다른 한말, 일제, 해방, 한국전쟁 등의 격동을 겪어내야만 했던 우리나라 백세인들은 세대별로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20여년 전 만난 백세인은 대부분 19세기말에 태어나서 20세기를 거쳐 21세기까지 격동의 3세기를 살아온 근세사의 산 증인들이었지만 이들이 10대일 때 국가가 붕괴되어 교육체계가 갖춰지지 못했기에 학력을 가진 분이 거의 없었다. 10여년 전에 만난 백세인은 한일합방 전후로 출생하여 일제하의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극히 일부 대학을 마치기도 하였다. 최근에 만난 백세인은 삼일독립운동 이후 출생하여 일제하의 초중등교육을 받고 해방 전후로 대학교육을 받은 분들이 상당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달랐다. 1900년 전후 출생의 백세인은 우리나라를 아직도 조선이라고 하였고, 1910년 전후 태어난 이들은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가 일부 남아있었다. 그러나 삼일독립운동 전후 1920년경에 태어난 백세인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당당하게 표출하였다. 이들은 이삼십대에 태평양전쟁 막바지의 찬탈, 해방 후 남북 갈등과 한국전쟁의 참담한 현장을 몸소 겪어낸 분들이다. 국가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초부터 새롭게 구축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석을 완성한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아왔기에 일제치하에 숨죽이며 살아온 전세대의 백세인들과 여러 측면에서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코로나 사태가 조금 진정된 지난 5월초 연휴 기간에 찾은 어떤 백세인은 지금까지 만난 여느 백세인과 차원이 다른 특별한 분이었다.

안내 받아 실내로 들어선 순간 안광이 형형한 어르신이 소파에 앉아 계셔서 큰절로 뵙기를 청하자 그냥 앉으라 하는 말씀에서부터 압도되었다. 바로 1920년에 출생하여 만100세가 된 우경 장경석 장군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백세인은 으레 기력이나 자신감이 어느 정도 쇠하여 있었는데 이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백세인을 조사할 때 기본적으로 시행하는 시간 공간 지남력, 수리력, 기억력, 우울증 여부, 질병이환경력 등에 대한 일반적인 검사 자체가 자신을 무시하는 일이라며 뚝 잘라버렸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자부와 삶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있는 분이었다. 선대 가족이나 친척 중에 장수한 가족력은 없었다. 본인의 평생 노력을 통해 장수를 누린 대표적인 분이었다. 부인은 십여년 전에 작고하였지만 성공한 3남3녀를 두었고 이미 손자 증손자까지 본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자신이 월남하여 집안의 중시조를 이루었음을 당당하게 자랑하였다.

장옹이 살아온 삶의 궤적은 특별하였다. 함경도 청진 출신으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보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였다. 해방이 되어 혼란해지자 월남하여 같은 처지의 월남한 동료들을 모아 함께 새로운 삶을 개척하다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5기생으로 마쳤다. 장교로 임관되어 국군 포병부대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기여하였고 한국전쟁 초기에는 강릉을 지켜내어 북한군의 동해안 남침이 지체되었고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장 장군의 빛나는 업적은 여러 군데 전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그러나 사단장과 사령관을 하며 승승장구하던 군에서 갑자기 강제로 예편되어 45세의 젊은 나이에 실업자가 되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어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요가를 시작하였다. 십여년 이상 명상과 요가를 하다가 심도 깊은 수련에 대한 갈증을 느껴 칠십세 나이에 요가의 본향인 인도로 직접 가서 요가의 구루(Guru)인 아난다 무르티를 만나고 칭하이 무상사와 같은 세계적 대가들과 교류를 하였다. 그는 용인대학에 국내 체육학계에 최초로 요가학과를 설립하고 교수가 되어 직접 지도하기도 하였다. 특히 <의식혁명(Power vs Force)>라는 책을 접하고 책이 해지도록 수십번 정독하면서 인간의식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자비로 나이 팔십에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까지 찾아가서 그 책의 저자이자 기(氣)연구의 세계적 구루인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를 만났다. 호킨스 박사와의 논의과정에서 자신의 기 수준이 이미 최고수준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면서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매일 새벽에 요가 수련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였고 철저하게 채식 식단을 지키는 도인의 삶을 평생 살았다. 가족의 전언에 따르면 귀신도 채식을 좋아한다며 제사상도 채식으로만 하도록 지시할 만큼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식생활은 하루 세끼를 정확히 정해진 시각에 하고 대중소의 개념으로 나누어 조반은 충분히, 중식은 적당히, 저녁은 소식하는 패턴을 지켰으며 마늘과 낫토를 상식하였다. 한편 댁을 방문하였을 때 태극기가 베란다에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실내에 걸린 액자에도 여러 개의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어 군인 출신이어서 특별한 애국심으로 그런가 생각했는데 뜻밖의 답을 들었다. 우리나라 태극기가 가장 기가 세기 때문에 365일 펄럭이게 하고 우리 국민들에게 기를 나누어 주기 위해서 태극기를 항상 걸어 놓는다고 하였다. 자신이 가진 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명함 크기의 카드를 만들어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라며 나누어 주었다. 그 카드에는 유해차단패라는 문구와 태극기가 새겨 있었고 ‘일체의 유해파를 끊고 일체의 액신을 쫓으니 건강과 행복이 꽉 찬다’ 라는 문구와 하나로 첨단이론연구소라는 소속이 적혀있어서 그 내용을 여쭈었다. “혼자 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더 이상 상대가 없는 최고라는 뜻이야” 자신이 하는 일에 대단한 자부심과 주위를 위한 강한 배려의 마음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백수의 나이에도 자신의 연구소를 만들어 운영하는 당당한 모습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그는 팔십 가까이 되어 처음으로 하이텔 단말기라는 간이컴퓨터를 알게 되자 본격적 컴퓨터 기초교육을 받았다. 나이 많은 피교육생들은 대부분 중도 포기하였지만, 그는 최신 컴퓨터로 보수교육까지 신청하여 교육을 받았다. 컴퓨터를 사용하여 100세에 <나를 찾는 그 세월: 100년을 살면서>라는 자서전을 직접 써서 발간하였고 그 책들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장옹의 삶에서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추구하며 굴하지 않았던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젊어서는 군인의 길을 걸어 장군이 되었고, 중년에는 요가로 도를 닦아 교수가 되고, 노년에는 컴퓨터를 만나 세상을 폭넓게 개척해나가는 그의 모습은 시련을 이겨내고 해법을 찾아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는 영원한 구도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바로 노인을 위한 행동강령으로 본인이 주장해온 ‘하자, 주자, 배우자’ 강령을 실천하여 장수를 이룬 분이었다. 정신심리학자인 마크 아그로닌은 <노인은 없다 (The End of Old Age)>라는 책에서 나이 들수록 더 발전하고 더 강해지는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나이가 많아지면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한 슈퍼히어로 학자, 일상의 평화를 찾아내는 현인, 다음세대를 마음으로 껴안는 수호인인 관리자,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더욱 화려하게 꽃피는 꽃 같은 창조자, 죽음을 초월하여 우주의 섭리를 내다보는 예지자’가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바로 장옹이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일상생활을 점검하기 위해 근자에 만나는 친구분이 없느냐고 묻자 “친구? 다 죽고 없어. 당신도 마찬가지로 오래 살면 그렇게 돼요. 한 스무살 밑이 친구가 되지. 그들하고 가까이 하려고 애쓰는데 그게 제대로 잘 안돼. 그러니까 자연히 독서를 한다든가 명상한다든가 그러지. 만일 내가 명상 안 배웠으면 노년에 무엇을 하고, 어떻게 뭘 했을지.” 비록 친구가 없어도 명상과 요가수련으로 시간을 소요할 수 있음을 과시하였다. 덧붙여 다시 젊어지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묻자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어. 인생은 파란만장하게 그걸 극복하고 엮어져 나가는 것이오”라고 답하였다. 모든 인생의 역경을 헤쳐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앞만 바라보면서 후회 없이 살아온 삶을 담담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당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항상 위기마다 귀인을 만나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아무리 본인이 강해도 함께 살아야하는 진리를 되새겨주었다.

이천년 전에 이미 장자(莊子)가 “뜻을 가지고 가는 자는 그 어느 것도 말리지 못한다(之者物莫之傷)”라고 말한 가르침은 인간의 장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백수를 이룬 분들을 만나게 되면 한분 한분마다 당당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나름대로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어떤 일들에 몰입하고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장경석 장군의 경우는 더욱 특별하였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나이에 전혀 상관없이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지 않았다. 바로 목적을 가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그는 ‘늙음은 없다’는 철학을 세상에 전파하는 도인(道人)이며 나이듦의 의미를 새롭게 한 영원한 젊음의 백세인이다. 또한 본인이 저술한 <노화혁명>이라는 책에서 ‘노화는 죽기 위한 변화가 아니고 생존을 위한 거룩한 과정이다’라고 한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분이 아닐 수 없다. 삶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떠한 고통과 시련이 오더라도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창의적으로 해결해가며 예지적인 식견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당당한 백세인의 모습은 후학들에게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며 초고령사회를 밝히는 횃불이 되고 있다.

 

[장경석 장군이 만들어 명함크기 나누어준  카드] 

[장경석 장군의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