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4시간만에 무제한 돈풀기 결단 ..트럼프도 "굿 잡"
2020-04-05 15:37
연준, 세계의 경제의 마술사 (上)
미국 특유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이하 연준)는 모든 경제 상황을 매의 눈으로 살펴 각종 금융·통화 정책을 배후에서 조정한다. 금리를 올리고 내리며 美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담보로 기축통화인 달러를 찍어내고 통화량도 조절한다. 필요시 강력한 규제로 금융기관을 옥죄어 고위험 투자를 억제한다. 그야말로 세계 경제의 돈줄을 틀어쥐고 흔드는 힘센 마법사이다. 기준 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는 평균 6주에 한번 개최된다. 이때 온 세상의 관심은 이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문구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된다. 발표문은 그 파급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단어 몇개 수정하는 데 몇주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번 위기는 美 주택시장 버블과 경제 시스템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2008년 금융위기와 달리 시스템 밖에서 기인한다. 바이러스 방역을 위해 생산,소비, 수요, 공급, 이동 등 모든 경제활동이 인위적으로 정지되면서 복합적인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초유의 사태이다. 특히 바이러스 퇴치는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인지라 문제 해결은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연준의 파격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금융시장이 급등과 급락을 거듭하고 있는 이유이다.
경기 침체의 전조 단계에 나타나는 신용경색이 더욱 악화되면 금융권의 위기로 확대되어 혼란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가능성도 있다. 이럴 경우, 바이러스가 당장 사라진다해도 경제 회복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연준이 부랴부랴 수조 달러의 자금을 공급하는 이유는 경제활동 마비로 인한 기업과 은행의 돈가뭄을 해소하고 숨통을 일시에 터주면서 최악의 위기 상황은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또 바이러스가 멈추면 실업자들이 즉각 일자리로 돌아가 기업 활동이 최대한 빨리 정상화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조치이다.
이제 파월 의장의 역할은 트럼프 대통령 못지않게 중요하다. 파월은 매파도 비둘기파도 아닌 중립성향의 '친(親)시장' 주의자이다. 모질고 비정하다고 소문난 뉴욕의 월가에서 잔뼈가 굵은 실용주의자로 그의 전임자인 재닛 옐런, 벤 버냉키, 앨런 그린스펀 등 저명한 경제학자 출신들과 차별화 된다. 차분하고 온건한 성격이지만 연준을 자기 입맛대로 함부로 취급하는 트럼프와 날을 세우면서 오랫동안 그의 눈엣가시처럼 취급을 받기도 했다. 파월의 판단력과 집행능력이 각국 정부와 시장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고 있다는 점은 우리 모두에게 큰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는 600억달러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한국은행의 이주열 총재와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있다. 금융위기 당시 '헬리콥터 벤'으로 불린 버냉키를 비롯하여 과거 수많은 위기에서 구세주 역할을 한 연준 의장들의 활약은 잘 알려져 있다. 파월 의장이 이번 미증유의 경제 대위기를 극복해낸 영웅으로 세계 경제사에 기록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연방준비이사회(FRB)는 연준의 최고의사결정 기구로 이사 7인과 지역 연방은행 총재 5명이 의결권을 행사한다. 우리로 말하면 금융통화위원회이다. 대통령이 이사회 이사 7명 중에서 4년 임기의 FRB 의장을 임명하고 상원의 비준을 받지만 금리 결정 등 통화정책은 연준의 독립적 권한이다. FRB는 미 연방 재무부로부터 독립된 기구로 그 수장은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역향력을 갖고 있다. 연준은 100여년의 역사에서 2018년 2월 4년의 임기를 시작한 파월을 포함 총 16명의 의장을 배출했다. 아마 이번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다면, 글로벌 금융시장의 관심은 파월과 트럼프의 ‘힘겨루기’에 쏠렸을 듯하다. 왜나하면 파월이 트럼프의 줄기찬 금리인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으면서 두 사람 간의 갈등이 여러 차례 표면화됐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트럼프는 연준의 독립성을 완전 무시하다시피 했다. 지난해 트럼프가 중국과의 무역협상에서 승리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미국의 금리를 유럽이나 일본처럼 제로금리 수준으로 내리라고 압박하면서 파월을 향해 “중국보다 연준이 문제다”“멍청하다” 등 원색적인 비난을 늘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연준은 2018년 3월, 6월, 9월, 12월 0.25%포인트씩 총 네 차례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트럼프는 지난 2018년 12월 금리 인상 후 파월의 해고 가능성을 자신의 정책 보좌관들과 논의하면서 "파월이 나를 후버로 만들고 있다"고 언급해 월가에 파문을 일으켰다고 뉴욕타임스는 최근 보도했다. 후버는 1929년 10월 24일 주식 시장의 붕괴로 이른바 미국에 대공황이 터지던 해 임기를 시작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일컫는다. 말이 씨가 된다고 트럼프 취임 후 잘나가던 미국 경제에 대공황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트럼프가 2017년 말 지명한 파월 의장은 카터 행정부 시절 겨우 17개월 재임하다 연준 내 신뢰 부족으로 사임했던 기업 CEO 출신 윌리엄 밀러 의장 이후 첫 비경제학자 출신이다. 법조계, 관계, 금융계 등에서 경력을 쌓은 온건한 실용주의자로 그의 다양한 실무 경험은 최대 강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파월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투자은행 '딜런, 리드 앤드 코'(Dillon, Read & Co)에서 일했다. 조지 W.H. 부시(아버지 부시) 행정부 시절 컬러스 브래디 재무장관과 호흡을 맞춰 3년간 재정 담당 재무부 차관을 지내면서 미 의회 인사들과도 교류를 넓혔다. 또 1997년부터 8년간 사모펀드 칼라일그룹 파트너를 지내면서 금융시장에서 이름을 알렸고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 연준 이사로 6년간 일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례처럼 굳어졌던 경제학자 등용 카드를 버리고 그를 선택한 것은 파월의 민간 경험을 중시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임명 당시 그는 박사학위를 소지한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고품질의 경제 분석과 정책 집행 능력을 지닌 시장이 선호하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평소 조용하고 자기 주장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지만 코로나 사태가 마침내 미국 등 세계 경제를 집어 삼킨다고 판단한 파월은 주저없이 벌떡 일어나 행동에 들어간다. 금리인하뿐 아니라 기업의 돈줄이 막히지 않는 정책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자, 파월은 평소 조심스럽기로 소문난 연준으로 하여금 단시간 내에 초강력 대책을 잇달아 내놓게 했다. 파월의 지도력과 신뢰가 입증된 셈이다. 파월과 함께 연준에서 일했던 브루킹스 연구소 넬리 리안 연구원은 파월 의장이 상황 판단을 매우 빨리 하고 결정적으로 행동을 하는 인물로 "지금 상황에 진정으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연준은 지난달 15일 금리를 '제로'수준(0~0.25%)으로 전격 인하하고 대규모 국채 매입에 나선다며 트럼프 행정부 지원사격에 나섰다. 열흘 사이에 기준금리가 1.5%나 인하된 선제적이며 파격적인 조치이다. 이런 결정을 하는 데 불과 4시간이 걸렸는데 평소였으면 이틀이 걸릴 만한 결정이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이어서 무제한 국채매입과 더불어 CP매입기구(CPFF) 설치도 발표한다. 한계 상황에 몰린 기업과 가계에 자금을 공급하는 비상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이다. 연준이 양적완화 정책을 사실상 무한대로 확대시킨 것이다. 연준의 돈 찍어내기 새 챕터가 시작되었다고 미국 언론은 떠들었다. 바이러스 전염을 늦추기 위한 도시 봉쇄, 사업장 폐쇄 같은 조치가 경제를 혼수상태로 만드는 상황에서 연준은 무엇보다도 기업 돈줄이 막히지 않는 정책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미 의회는 한목소리로 연준의 시장 개입을 적극 독려했다. 미국 정부의 2조달러 규모 경기 부양책도 지난주 의회를 통과하며 이젠 코로나19와의 진정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트럼프는 지난달 14일 기자회견까지만 해도 연준 의장을 해임 시키거나 강등 시킬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이 있다고 강조하며 파월 의장을 압박했다. 그동안 파월에게 틈만 나면 협박조로 금리인하를 요구했던 트럼프의 이런 기자회견은 우리에게 너무나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트럼프는 파월이 결단력이 필요한 위기 상황에서 매처럼 공격적으로 비행하자 그에게 "굿 잡(good job)"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파월을 선택한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