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칼럼] ​생활정치 무능력자들에게 내리는 정치적 禁治産 선고

2020-03-09 08:00

코로나19 사태로 국민들의 심신이 지쳐가고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평상시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나 집에서 업무를 보면서도 오랜 동안 어린이집과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을 돌보는 부모와 조부모들은 이전에 누리던 소중한 일상을 언제나 되찾을 수 있을지 하루하루가 힘겹다. 감염의 걱정 때문에 사람 만나기가 두렵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으로부터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결코 반갑지 않은 언론보도를 지켜보는 것도 우울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국민들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정부가 잘 하는 부분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특정 지역에서 감염병의 급속한 확산세로 인하여 정부의 관리능력에 대한 객관적 한계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 사태를 관리하는 정부당국의 대처방식을 보고 있는 국민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은 무엇보다 마스크 수급에 관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의 조기종식을 위해서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 등 개인위생을 강조하면서도 마스크의 수급과 시장상황이 어떤 지도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는 정부의 말을 믿고 새벽부터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하는 국민들은 도대체 정부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도 오랜 시간 기다려 마스크 몇 장을 사면 다행이지만 빈손으로 발길을 돌리는 국민들은 “이게 정말 나라인가”라는 자조와 한탄 속에 할 말을 잃었다. 마스크 5부제, 대리수령 확대 등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정책속에 현장의 혼란은 여전하다.

그런데 마스크 문제는 비상적인 상황에서 특정 재화의 수급불안으로 야기된 일회적 사건인가? 아니면 보다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깔려 있는 것일까? 아마도 마스크 사태는 민생과 생활정치가 정치의 본질이며 핵심적 과제라는 것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인식부족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구조적인 결함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문재인 정부에게 생활정치라는 개념은 매우 생경한 것이며 그런 경험도 부족하다. 생활정치는 국민의 의식구조, 행동양식과 시장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는데, 문재인 정부는 국민들의 현실적인 요구보다는 자신의 신봉하는 고결하고 숭고한 이념에 집착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문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2년 반 이상의 시간은 주로 남북과 북미관계 개선, 친중 반일, 전 정권에 대한 적폐청산, 검찰개혁이라는 일종의 이념정치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념정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생활정치와의 균형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그렇게도 밀어붙이는 검찰개혁 하나만 보아도 이념정치가 균형을 잃고 과대포장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검찰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법적 정의(criminal justice)의 실현이다. 죄를 지은 사람을 반드시 처벌해서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사안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법적 정의는 음식으로 비유하면 소금과 같은 것이어서 소량으로 맛을 결정하는 것이지 과다하게 사용해서 음식의 이 곳 저 곳에 소금 덩어리들이 하얗게 널려 있다고 상상해 보라. 아마도 우리는 고혈압과 성인병에 바로 노출될 것이다. 사법적 정의는 바로 소량으로 보이지 않게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소금의 역할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법적 정의나 검찰개혁은 정부 정책의 저 한 켠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할 일이지 특정인을 법무부장관으로 내 세워 수많은 사람들은 거리에 내 몰고 수 개월간 국정을 마비시킬 그럴 문제가 아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경제는 추락을 거듭하고 국민들의 일상과 민생은 극심한 고초를 겪고 있다. 무능력자들에 의하여 생활정치가 이념정치에 희생된 것이다. 업친데 덥친다고 하지 않았나. 코로나19가 물러간 이후에 우리 경제의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할 것이다. 슈퍼예산과 추경을 통해 재정을 쏟아 붓는 것 외에 근본처방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암담하다. 취업과 결혼, 조그만 집에서 자녀와 작은 행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좌절은 미친 집값과 고용절벽 앞에서 끝없이 계속된다. 취임 초기에 청와대 일자리 상황판 앞에 서 있던 대통령은 그 이후에는 북한만 이야기 한다. 평화경제는 좋은데 구체적인 해법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념정치에 희생된 것이 어찌 민생경제 뿐이랴. 문대통령은 재임 중에 미세먼지를 30% 줄이겠다고 공약했고 UN 사무총장을 지낸 분이 총 책임을 맡아 적극적인 정책을 공언했건만 그는 잘 보이지도 않고 미세먼지 문제는 국정의 주요과제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미세, 초미세 먼지는 지금도 그리고 장래에도 분명하게 코로나19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의 건강을 위협할 것이지만 국민들은 이미 그러려니 체념하고 살아간다.

교육과 보육 역시 생활정치의 주요한 영역이다. 2019년 신생아 수는 30만에 겨우 턱걸이 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30년 후인 2050년에는 30세에서 44세의 인구 500만 명이 4천만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교육경쟁력과 노동생산성이 어느 정도로 고도화 되어야 대한민국이 유지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다. 30만명의 미래세대를 지금처럼 줄 세우기식 사교육으로 내 몰 것인가 아니면 국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과 적성을 잘 파악하고 이들이 성장하고 직업세계에 진입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을 교육의 본질로 보고 담대한 변화를 시도할 것인가? 결국 교육혁명도 생활정치인데 미래세대 보호를 위한 생활정치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기성세대의 빛 잔치로부터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노력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독하게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이념정치꾼들은 기상천외한 선거법을 만들고 기득권 수호를 위한 선거전략에만 탐닉하고 있다. 처참해진 민생 속에서 정치에 냉소적인 국민들은 다가오는 선거가 귀찮고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럴수록 정치인들과 정당들은 그럴듯한 사이비 민생공약으로 또 다시 우리를 현혹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그 동안 적폐와 색깔론으로 우리 사회에 기생한 정치인과 정당이 혹시 내 지역구에 공천을 받거나 비례대표 목록에 있는지 조금만 시간을 내어 살펴보자. 이번 선거가 생활정치에 무능한 이념정치인들을 모두 청산할 수는 없겠지만 국민이 내리는 정치적 금치산 선고를 두려워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진 = 김성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