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6) 가치와 믿음 '혼란시대', 류영모같은 큰 스승이 있는가
2020-03-04 10:53
'부활 오산학교'의 신임교장과 함석헌학생
"3·1운동은 이승훈의 작품이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의 전기를 쓴 오병학은 이렇게 말했다.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3·1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느님의 작품이었으리라."
독립선언서 서명 때 순서를 놓고 왈가왈부하자, "이것은 죽는 순서인데, 누가 먼저 죽고 싶다는 얘기요?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라고 말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이승훈은 3·1운동 이후 세번째로 감옥에 갔고 1922년 7월 풀려났다. 최장 투옥자였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는 민족정신의 양성소라고 할 수 있었다.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함석헌이 "일제시대엔 아이 낳는 것도 억울했다. 일본국의 사람을 낳는 게 아닌가"라고 말할 정도로 그런 생각이 투철했다. 교장을 지낸 조만식과 류영모는 평생 한복만 입었다. 함석헌은 아예 한복 차림으로 미국과 유럽을 여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자존심은 이 학교의 분위기를 웅변한다. 교장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으니, 3·1운동 이후 이 학교가 멀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세운동의 핵심 기획자이자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은 경기도 경찰에 붙잡혀 갔고 오산학교 교장 조만식은 평양경찰서에 끌려 갔다. 교감 박기선과 학생들(재학생과 졸업생을 막론하고)은 정주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줄줄이 체포됐다. 1919년 3월 31일 일본 헌병들이 몰려와 학교에 불을 질렀다.
먼저 풀렸던 이윤영과 조형균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승훈을 찾아와 면회했다. 오산학교가 불탔다는 얘기를 들은 이승훈은 김기홍, 김이연, 류명근·류영모 부자를 거론하며 그들의 도움을 청해 학교를 재건하라고 당부했다. 1920년 9월 4일 오산학교가 부활했다. 잿더미 속에서 살아난 불사조 같은 학교 교정에 서서 교사와 재학생, 졸업생들은 하염없이 울었다. 옥중에 있던 이승훈은 소식을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오산의 일은 참 이상해. 웬 은혜를 이렇게 주시는지 몰라."
3·1운동 이후 재건된 오산학교는 독립운동의 본산으로 유명해졌다. 이승훈은 민족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학교의 명성을 듣고 다른 공립학교에 다니다가 전학 온 학생들이 많았다. 평양, 신천을 비롯해 황해도, 함경도, 영·호남에서도 몰려왔다. 그때 온 학생 중에 함석헌도 있었다.
함석헌은 평양고보를 다니다가 3·1운동을 맞았다.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던' 만세 시위를 벌인 뒤 고향 용천에 돌아가 몇 달을 지냈다. 집안 어른들이 학교에 가라고 재촉해서 평양으로 갔다가 학교 근처에서 동급생 친구를 만났다. 그는 "학교 당국에 가서 결석한 것을 빌어야 한다"는 학우의 말을 듣고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2년을 놀다가 친척 형인 함석규(목사)의 소개로 오산학교에 가게 된다.
"오산학교는 초가지붕을 이은 가설 교실이었습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곳에 참교육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학교를 사람들은 부활오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손질이 덜 된 꺼칠꺼칠한 나무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쳤을 뿐 책상도 걸상도 없는 맨 마루바닥이었습니다. 500명쯤 되는 학생들이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3·1운동이라는 엄청난 혁명의 폭풍이 지나간 뒤였는지라 모두들 흥분하고 있어서 어수선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이 혼란을 하나로 다스려 가고 있더군요. 이곳 저곳에 앉기만 하면 옛날 오산학교 얘기뿐이었습니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의 재능은 단연 돋보였다. 함석헌의 방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본 뒤에야 불을 끄고 자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였다.
조만식 퇴임 이후, 류영모 교장 추대
오산학교가 재개교를 한 뒤 2주일 뒤 조만식이 2년간의 옥살이를 끝내고 풀려난다. 그는 집보다도 학교가 걱정이 되어 출옥하자마자 정주로 달려왔다. 교장이었던 조만식이 돌아오자, 일제는 교장인가를 취소하는 통지를 보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교장 자리를 떠나야 했다. 후임 교장을 놓고 오산학교 교사와 졸업생 후원자들은 고심했다. 함석헌은 당시의 풍경을 전한다.
"오산의 유지들이 혼돈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육의 길을 열 수 있는 사표(師表)가 될 분을 고르고 고른 끝에 류영모 선생님을 새 교장으로 추대했지요. 류 선생님은 초창기 오산에 교사로 계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였던 사람의 얘기를 들으니, 선생님의 요한복음 해설은 참으로 놀라웠다고 하더이다."
류영모는 망설였다. 오산학교에 다시 갈 생각이 있었다면, 일본에서 대학공부를 제대로 하고 왔을 것이다. 그는 교단에 설 생각은 없었고, 농촌에 내려가 노동을 실천하며 사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저토록 부활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오산학교를 생각하고, 또 옥중의 이승훈을 떠올리니 사양할 수 없었다. 11년 만에 그는 오산학교 교단에 다시 선다. 1921년 9월 7일.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한다. 처음 오산학교 교사로 왔을 때가 20세였고, 교장으로 다시 온 때는 31세 때였다.
당시 이 학교 졸업반(3학년)이었던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무렵, 학생들 사이에 새 교장에 대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가을 학기에 새 교장이 오는데 아주 놀라운 분이며 초창기 오산학교 시절에 교사로 근무했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첫 수업을 받고 난 뒤의 기억을 함석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이 들어오시는데 한복차림이었고 키는 자그마하고 등은 조금 굽었더군요. 뒷머리가 툭 튀어나왔던 게 인상적이었죠. 말씀은 크게 울리는 소리도 아니고 웅변조도 아니었습니다. 조용조용 말씀하시는 스타일이었어요. 배울 학(學) 한 글자를 풀어 말씀하시는데, 무려 2시간을 강의했죠. 학생들이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의 첫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승이 묻자 몇몇 학생이 쭈뼛쭈뼛하며 대답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입니다."
- 맞습니다. 그 첫 구절이 '학(學)'으로 시작합니다. 공자는 지혜로운 분이셨는데 무엇이 더 배울 게 있다고 첫 마디부터 '학(學)'을 말씀하셨을까요. 학이시습지를 줄이면 '학습'이 되는데 배운 뒤에 익히는 것까지 포함한 말입니다. 공자가 말한 학습은 지식을 습득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인식 기반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일입니다. 공부하는 일이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공부로 깨닫고 다지는 단계단계가 기쁘다는 것입니다.
- 학(學)이란 한자 글자는, 아이들(子)이 집 안에서(家) 산가지(爻)를 가지고 숫자놀이를 하며 노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산(算)가지는 수를 셈하는 데 사용하는 막대로 옛사람들의 주판이지요. 배움이란 걸 옛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습(習)은 어린 새(羽)가 날개를 퍼득이며 날마다 스스로(日, 自) 날아오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익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해주지요. 조선 초의 학자 화담 서경덕은 어린 시절 어린 새가 자주 날아오르며 나는 법을 배우는 것을 보고 학문의 의미를 깨우쳤지요. 이를 조삭비(鳥數飛)라 합니다.
- 배울 학((學)은 아이가 캄캄한 속에서 나와 두 손을 들어서 손을 놀리는 것을 나타낸 뜻모음 글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평생 거짓 학생 노릇을 하다가 죽어 무덤에 들어갈 때도 버젓이 학생 아무개라고 쓰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철학자도 신학자도 학자면 자꾸 배운 것을 익혀야 하는데 버릇없이 감투를 좋아합니다. 바람 감투를 얻어 쓰는 맛에 이 세상에 나온 보람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또 가투를 쓴 사람에게 옳은 제자도 없겠지만 은사라고 좇아다닙니다. 이러니저러니 말 많고 유혹 많은 세상에 학자는 배운 것을 익혀야 하는 것이 그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과거를 더듬고 영원을 찾는 것을 익히는 이 맛, 이 재미야 말로 즐거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공자가 하신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의 뜻입니다.
- '배우다'라는 말은 '배다'에 사동(使動, 하게 하다)의 의미를 지닌 '우'가 들어간 것입니다. '배다'라는 말은 우선 '임신하다'라는 의미가 있지요. '배다'라는 말은 '뱃속에 아이가 생겨나서 자라다'란 뜻으로 배(腹)와 상관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만 쓰이는 게 아니라 포유류 동물의 새끼, 조류나 어류의 알, 줄기 속에 든 이삭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쓰인 '배우다'는 '배게 하다'로, 임신하게 하거나 생산하게 하거나 속에서 자라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식이 단순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태아(胎兒)를 '배우는 사람'이 품어서 그것을 속에서 키우는 것이 '배움'입니다. 아기를 낳는 것은 결국 산모이듯, 뭔가를 배우는 일 또한 스스로 그 지식의 어미가 되어 내부에서 피와 살을 붙이고 생명을 돋우는 일입니다. '배우고 익히다'를 같이 쓰게 되면 더욱 심오하지요. 몸 속에 '생각의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배우는 행위인 학(學)이고, 그것을 뱃속의 아기처럼 숙성(熟成)시키는 일이 바로 습(習)입니다.
- 또 하나. '배다'는 '스며들다'의 뜻이 있습니다. '배우다'는 '스며들게 하다'라는 의미도 됩니다. 스며드는 것은 조금씩 파고들어 큰 부분을 적시는 것이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속적인 이동이 있으며 점차 확장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또한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라는 뜻도 있지요. 습관이 된다는 것은 배움이 인간의 행동과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말하는 요체이기도 합니다. 냄새가 배는 것처럼 배움이 스며듭니다. 접촉이 있으며 물들어가게 되는 과정이 바로 배움입니다.
- 배움이란 말은 '임신하게 함'과 '스며들게 함'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공자가 학이시습지의 기쁨을 말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생각을 잉태하고 그것을 안에서 키워내주는 생명행위가 바로 배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부에 앞서 이것을 배우는 것이 가장 큰 '배움'입니다(이 대화 내용은 필자가 한 선지식(善知識) 강연에서 들었던 인상깊은 '배울 學' 강의를 얹어서, 오산학교 분위기를 감안하면서 류영모의 화법으로 재구성해본 것이다).
류영모 교장실 문고리만 쥐다 놓은 함석헌
교장 류영모는 11년 아래였던 스무살 함석헌 학생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함석헌은 이 분과 무슨 말이든 나눠보고 싶었다. 그는 이런 일을 털어놓았다.
"류 선생님께서 오산학교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생님을 조용히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무엇 때문이랄 것도 없이 그저 그러고 싶어서, 계시는 방문 앞에까지 가서 문고리를 잡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서 무슨 말을 어떻게 여쭈어야 할까 그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내 맘이 여리고 수줍음이 많아서 그런 것인데, 그때 용기를 내서 들어갔더라면 선생님 편에서 아시고 무슨 말로나 말문을 열어주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결점이 있습니다. 의지가 약하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것입니다. 류영모 선생님을 그토록 존경하면서도 한번도 질문을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후회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스스로 나는 이때까지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무 살이 되도록 인생이란 문제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숨'이나 '참' 같은 낱말을 들어본 일이 없었지요. 이제 겨우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모든 문제를 좀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한스럽지요. 선생님은 누구를 두들겨서 깨워주는 성격은 아니었거든요."
두 사람이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데에는 만남이 길지 않았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졸업반이었고, 류영모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교장 인준이 거부되어 1년 만에 그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신원조회를 해본 결과, 3·1운동 48인 중의 한 사람인 류명근의 아들임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을까. 전임 교장 조만식과 같이 한복만 입고 다니는 류영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작동했던 것일까.
내가 오산에 온 건, '함'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1922년 여름 류영모는 오산학교를 떠난다. 학교 사환이 짐을 들고 따라왔다. 밤길을 걸어 고읍(古邑)역을 가는데 문득 함석헌이 따라왔다. 함석헌은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로서는 잘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咸錫憲),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저 송구스럽기만 했습니다." 이후 함석헌의 생후 2만 날을 기념하는 생일잔치 때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일생 중에서 정신적으로 단층(斷層)을 이루며 비약한 때가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이 류영모 선생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10년쯤 뒤에 낸 함석헌의 '한국역사'를 읽고 가장 기뻐한 사람이 류영모였다.
함석헌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한 대목은, 1940년 8월호 '성서조선'(통권 139호)에 실린 류영모의 글 '저녁찬송'에 살짝 보인다. "근 20년 전에 그때는 여름비로 길에 물이 넘치고 밤이 어두운데 오산학교에서 고읍역까지 형(함석헌)이 나를 전송해줄 때, 허방에 빠지면서 이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어둠이 분명히 빛보다 크다'고." 그날 비가 와서 길 위로 물이 범람해 있는지라 어둠 속에서 여러번 물웅덩이에 빠졌다. 이렇게 캄캄한 길을 걸으며 물에 빠져보니 어둠이 과연 빛보다 더 크다는 걸 알겠군. 이렇게 중얼거리듯 말을 한 것이다. 함석헌은 당시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류영모는, '어둠이 빈탕(허공)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그의 철학을 내비친 것이다. 류영모는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우주의 속삭임을 방해하며 밤이야말로 영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1940년경부터 사용한 다석(多夕)이란 호에도 빛보다 어둠이 지닌 진실을 담으려 한 것이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