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 (25) 참종교는 이래야 한다, 3.1운동 이끈 그들처럼

2020-03-02 10:11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5) 3·1운동은 겨레의 '성령'운동이었다

[다석 류영모]



3·1운동은 겨레의 성령이 통한 운동이었다

류영모는 3·1운동에 대해 뜻밖의 말을 한다. "3·1운동은 사람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聖靈)의 운동이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겨레가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위대한 거사였는데, 사람의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첫째, 거기엔 하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이 류영모의 통찰이었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민족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은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닌 이들이 목숨을 걸고 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궐기에 앞장섰다는 의미다. 그들이 기탄없이 나섰던 까닭은 이 겨레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신앙의 하늘을 되찾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한 애국적 감정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종교의 차이를 초월해, 이 겨레가 이미 보편으로 지니고 있던 '하늘사상' 아래 하나로 결집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나와 '하늘'의 소통을 가로막는 제국주의 방해자에 대한 숭고한 항거였다.

둘째,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태극기만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 깃발은 남을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깃발 속에 들어 있는 '태극'은 우리 겨레가 스스로를 낳은 시원(始原)이라고 생각해온 하느님의 존재를 표상해놓은 놀라운 이미지가 아닌가.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상징이면서 우리의 뿌리에 숨어 있는 '영원'과 만나는 기호이기도 했다. 두 가지는 같은 것이었다. 3·1운동은 총칼을 든 일제에 맞서 '성령'을 방패처럼 들고 나왔다. 일제는 같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필사의 군중들에게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곧바로 가혹한 탄압으로 '정신의 무기'를 든 사람들을 제압하려 했다. 그게 3·1운동이었다.

셋째, 요즘 같은 원거리 소통수단이 거의 없던 시절에, 마치 모바일을 활용한 '플래시몹(번개모임)'과도 같이 일제히 궐기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심지어 일본마저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다. 서로 아무런 면식도 없던 이들이 마치 오래 통하고 있었던 이들처럼 뭉치고 협업하고 하나처럼 움직일 수 있었던 까닭은 오직 겨레 전체의 내면을 가로질러 관통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의 '하늘'을 지닌 겨레로서의 자존감이었다. 외세에 이대로 굴복당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경들이 그들을 '일사불란'할 만큼 일제히 움직이는 군중이 되게 했다. 이것을 후세에선 독립정신이라 말하고 민족의식이라 부르지만, 현장에서의 그것은 그 이상이었다. 여성과 노약자까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나온 그 마음속엔 그들을 하나로 묶는 어마어마한 힘, 겨레의 근본을 이룬 바탕에너지, 즉 성령이 있었다는 게 류영모의 생각이었다.

무저항 정신은 악에 대항 않는 고차원의 정신

류영모는 3·1운동의 무저항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저항정신은 악에 대항하지 않는 고차원의 도덕정신입니다. 아무리 불살생을 마음에 새긴 사람도 악한 이를 보면 분노하여 금방 그를 제압하여 죽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참으로 선을 알고 악을 '없이' 하겠다는 사람은 살생을 택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을 보며 당장에 죽일 듯 날뛰는 사람이 악을 가장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죄악을 범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남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직도 선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그 자신도 악당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악을 없애야겠다는 것이면 악은 없어질 것이고 두어야겠다면 둘 것입니다. 사람은 무조건 선이어야 합니다. 무조건 선이 아닌 것은 악입니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한민족 역사에 대해, 하느님의 시나리오가 도중에 바뀌었습니다. 이 민족이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하고 생각하기를 게을리하여, 단군이 깨달았던 하느님을 잊어버렸지요. 하느님은 이 민족에게 깊이 생각하는 일을 되살려 주려고 고난의 역사를 짐 지웠습니다. 이 겨레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그때서야 사람들은 그간 잊었던 하느님을 다시 찾아나서게 됩니다. 그들이 지녔던 소중한 바탕이었던 영성을 다시금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3·1운동은 그런 겨레에게 함께 독립의 일을 하라고 힘과 기회를 준 것입니다."

류영모는 다시 이런 말을 한다.

"이 세상은 이기는 사람이 선이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지는 이는 악이고 불의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죄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영웅이란 이들은 권력을 차지하면 실컷 먹고 처첩을 많이 거느리면 대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과식과 과색(過色)하는 악마의 나라를 세우고 멸망해 갑니다. 이러한 세상은 단호히 부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갈 길은 하느님과 통하는 길뿐입니다. 천명을 받들어 느낄줄 알면, 성령을 받아 권능을 지니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 아들이 되는 것이 진정한 권능입니다. 권력을 택하여 삶을 탕진하겠습니까, 권능을 택하여 영원함을 얻겠습니까."

3·1운동 비밀자금 맡은 류영모 부친

1910년 류영모를 오산학교 교사로 모셔가기 위해 학교설립자 이승훈은 그의 부친을 찾아간다. 부친 류명근은 이승훈보다 두 살 위였는데, 두 사람 다 자수성가한 상인이었는지라 통하는 것이 있었다. 아들로 인해 알게 된 인연이었지만, 마음을 나누는 바가 있었다. 특히 40대에 들어 두 사람은 기독교도가 됐고 이후 장로가 되었기에 신앙적인 교감 또한 형성되었을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이승훈은 류영모의 집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한다. 문득 "천도교에서 3·1운동 자금을 댔다고 하더이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가만 있을 순 없지요"라고 말하며 돈 6000원을 꺼냈다. 기독교계에서 모금한 것이었다고 했다. 이 돈을 류영모에게 맡기며 말했다. "요즘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자네가 좀 맡아주시게." 그리고는 바삐 집을 나갔다. 류영모는 돈을 들고 고심하다가 종로에서 피혁상점을 하는 부친 류명근에게로 간다.

"이 돈을 누가 맡겼는데, 여기다 좀 넣어둬야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상점 금고에 넣어두었다. 이 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류영모와 이승훈뿐이었다. 그런데 수수께끼 같은 일이 일어났다. 6월이 되어 일본 형사들이 류명근의 점포에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돈을 압수했고, 류명근도 끌고 갔다.

이후 류영모는 종로경찰서로 찾아가 말했다. "아버지는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내게 있으니 나를 잡아 가두고 아버지는 풀어달라." 하지만 형사들은 듣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류명근은 105일 동안 감옥에 구속되어 있었다.

'민족대표 48인' 류명근의 105일 투옥

대체 어떻게 일본 형사들이 이 돈이 있는 것을 알았을까. 3·1운동 33인을 심문하던 중에 나온 얘기였다. 6000원은 천도교에서 이승훈에게 거사자금으로 준 돈이었다. 취조를 하던 경찰에게 천도교 측 인사가 사실을 실토한 것이었다. 하지만 류명근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지우고 아들은 무사하도록 했다. 류영모는 부친을 구출하고 스스로 죄를 덮어쓰고자 했다. 류명근은 3·1운동으로 구속된 9456명 중 한 사람이었다.

3·1운동 민족대표는 33인이지만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거나 서명하고, 인쇄·배포하고, 탑골공원 만세시위 등 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가한 핵심인사를 두루 아울러 '민족대표 48인'으로 꼽는다. 본래는 3·1운동으로 일제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48인을 가리켰다. 류명근은 그 48인 중 한 사람인 '민족대표'였다. 자긍심을 지닐 만한 것이었지만 류영모는 이 대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것은 자랑스럽겠지요. 하지만 하느님께는 내가 가는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세 가지 눈을 기억함

혈육이라고 해서 하느님을 단독대면하는 일에 예외일 수 없다는 소신을 밝힌 것이지만, 그렇다고 류영모가 부친에 대한 각별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잊지 못할 눈을 두 번 보았습니다. 3·1운동 때 형사가 가택수색을 하면서 질문을 던지자 아버지는 눈을 똑바로 떠서 형사를 바라보았습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노여움이 가득한 눈이었습니다. 무엇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눈이었지요. 그때 그 눈을 잊지 못합니다. 또 한번은 돌아가시기 조금 전에 본 눈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옆에 있는 이가 거들어드리려 했는데, 그 얼굴에 뒤틀리는 주름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내가 '다시 누우십시오, 못 일어나십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고 '왜?' 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을 또한 잊지 못합니다."

이 말을 한 뒤 류영모는 '상상의 눈' 하나를 더 말했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어머니를 쳐다보는 눈길을 류영모는 평소에 자주 상상했다고 한다.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어떻게 쳐다보았을까. 그 생각을 하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고운 어머니를 쳐다보는 그 사랑스런 눈길의 아버지. 부친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다 갔지만, 자신과는 길이 다른 분이었다.

분노의 눈길과 죽음의 눈길, 그리고 삶이 피어나던 시절의 사랑의 눈길은 인간 삶의 압축과도 같다. 희망과 고뇌와 절망이 어른거린다. 류영모는 아버지의 눈길을 '인생경전'의 챕터처럼 때로 가만히 펼쳐보았을까.

명백한 확언과 침묵, 100년전의 '은둔자(Hermit)'

이쯤에서 다시 류영모가 누구인지 묻는다. 오스트리아 화가인 에곤 실레(1890~1918)는 우연히도 류영모와 같은 해에 출생한 사람이다. 그는 22세 때인 1912년에 '은둔자들(Hermits)'이란 그림을 그렸다. 이때 류영모는 오산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지식에 대한 갈증도 깊었고 신앙에 대한 갈구 또한 깊었다. 당시 조선을 비롯한 동양이 서양의 교회기독교를 받아들이던 시대에, 류영모는 레프 톨스토이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 종교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었다. '신앙하는 대상(하느님)'을 서양교회의 오랜 관습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겠다는 생각을 굳힌 류영모였다. 이것은 신앙의  일대(一大) 각성이었다. 그의 삶과 말과 행동과 지향하는 바를 생각하면, '은둔자'라는 표현이 붙여질 때 의미심장해진다.
 

[에곤 실레의 작품 '은둔자들'(1912).]


류영모는 식민지-전쟁-분단에 내몰리는 시대, 즉 이 땅의 역사 중에서도 역경으로 가득 차 있던 소란한 시기를 살면서 강력한 '고요'를 유지했던 사람이었다. 역사적 소란함을 내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삶과 죽음의 본질을 깊고 꾸준히 밀어붙였다.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서 그의 심령으로 쇄도한 종교와 문명과 지식들은 특유의 강인한 성찰력과 집요한 자기완성의 희구로 하나의 가닥을 이루며 고요함을 구축해 나갔다. 영국의 TV프로그램 제작자이자 명상가인 피터 프랜스(Peter France)는 '은둔자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은둔은 모든 가면과 위선을 벗기는 일이다. 은둔은 결코 허위를 참아주지 않는다. 명백한 확언, 그리고 침묵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그를 둘러싼 숲의 고요에 의해 조롱받고 심판받는다."

명백한 확언과 침묵. 다석 류영모의 삶은 여기에 닿는다. 피터 프랜스는 마치 류영모를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은둔'을 풀어놓고 있다. "모든 죄악은 바로 인간의 거짓된 자아, 말하자면 자신의 이기주의적인 욕망에서만 존재하는 거짓된 자아가 삶의 근본적인 본체라고 가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거짓된 자아를 장식하고 그것의 무가치한 본질을 대단한 무엇으로 포장하기 위해 쾌락과 경험, 권력과 명예, 지식과 사랑을 축적하느라 삶을 소진해 버린다."

류영모는 이 자아를 '제나'라고 불렀고, 이것을 '얼나'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것이 류영모의 명백한 확언이며, 그의 놀라울 만큼 고요한 삶은 거짓된 자아의 입을 다물게 한 견고한 침묵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0년 전에, 인간의 피상적인 궤도를 이탈해 은둔자로 숨쉬며 깊고 완전한 어둠과 적막을 향해 나아간 성자가 있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