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김기춘 블랙리스트 사건' 파기…‘의무 없는 일’ 판단 엄격해야

2020-01-30 16:55
일부 무죄 취지...김기춘 전 실장, 조윤선 전 장관 2심부터 다시

박근혜 정부 시절의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직권남용죄에 해당하지만 유죄가 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에서 심리 미진과 법리오해를 이유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따라 김 전 실장과 조 전 수석 등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자들은 2심부터 다시 재판을 받게 됐다. 대법원은 블랙리스트가 불법이라는 점은 명백히 하면서도 '직권남용'을 적용하려면 '의무없는 행위'를 강요하는 구체적인 실행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번 재판의 쟁점은 이른바 '좌파 예술인'들을 예산 지원대상 등에서 제외한 '블랙리스트 작성'과 그에 따른 피고인들의 지시가 ‘직권 남용’인지, 또 그에 따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의 행위가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직권남용죄(형법 제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에 성립한다.

대법원은 우선 “예술위·영진위 등에 특정 예술인들에 대한 정부지원을 배제하라는 지시를 한 것은 직권을 남용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불법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다. 

다만 “의무에 없는 일에 대한 판단에는 잘못이 있다”며 각종 명단이나 심의진행상황 등을 보고받은 행위는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봤다. 

반면, △예술위원장 등에게 특정인물을 배제하라고 지시 △지시가 이행될 때까지 사업진행 저지, △배제대상자에게 불리한 사항 의도적 부각 △배제 대상자가 포함된 안건 회의에서 제외 △지원배제를 위한 명분발굴 △고의로 새로운 기준을 부가해 사업 재공고 △심의위원 등에 관련의견 제시 △상영불가 통보행위 등은 '의무없는 일'로 직권남용이 된다고 판단했다.  

법령에서 정한 직무범위를 벗어나거나, 법령에서 정한 의무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게 했을 때만 처벌대상이 될 뿐 단순한 협조요청이나 의견청취, 보고지시 등은 '의무 없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이른바 '사법농단'과 '국정농단' 등 굵직한 사건에도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돼 있는 만큼 이번 선고 결과가 미칠 파장 등까지 감안해 다각도로 심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파기환송의 취지는 직권남용죄에 관한 법리오해와 그로 인한 심리미진"이라며 "반드시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라고 할 순 없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 전 실장은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는 특정 공무원 사직 강요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1심보다 높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조 전 수석도 1심에서는 국회 위증 혐의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지만, 2심에서는 지원배제에 관여한 혐의까지 추가로 인정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전 실장 등은 박근혜 정부 시절 정부에 비판적인 단체나 예술가 등에 대해 이름과 배제 사유 등을 정리한 문건(블랙리스트)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이를 기초로 정부지원금 등을 줄 대상에서 배제하도록 한 혐의로 기소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부수석 등 7명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 상고심 판결에 입장해 착석해 있다. [사진= 연합뉴스]